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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고려사 : 세가

충렬왕 7년(1281) 신사년

• 봄 정월

초하루 무술일. 원나라에서 왕통(王通) 등을 보내 새로 만든 「수시력(授時曆)」1)을 반포했는데, 이는 허형(許衡)2)과 곽수경(郭守敬)3)이 만든 것이었다. 관련 조서는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나라를 가지고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은 반드시 천문을 관찰해 농경에 적합한 절후를 가르쳐 주는 것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왔으니 황제(黃帝)4)·요(堯)5)·순(舜)임금6)에서 3대(代(夏·殷·周))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그러했다. 일관(日官)으로 임명된 자는 모두 대대로 그것을 가업으로 삼아 늘 절후의 변동을 조사해 천문의 운행과 일치시켰으므로 역법(曆法)을 자주 고치는 폐단이 없었다.
그러나 진(秦)나라 때에 와서 옛 성인들의 학문을 깡그리 없애버리면서 한 해의 끝마다 윤달을 두는 바람에 옛 역법은 더욱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나라로부터는 「적년일월법(積年日月法)」7)을 만들어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표준으로 삼았는데, 이 법을 오늘까지 그대로 이어온 것이다. 천문은 계속 쉬지 않고 운행하는 법이라 정해둔 하나의 법칙으로 묶어두려 하면 한참 뒤에 반드시 어긋나게 되고 어긋남이 있으면 반드시 고쳐야 하니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이치인 것이다. 이제 태사원(太史院)으로 하여금 영대(靈臺)8)를 짓고 의상(儀象)9)을 만들어 매일 매달 관측하고 실험함으로써 정확한 도수(度數)를 계산하게 하는 한편 「적년일월법」은 완전히 폐기하게 했으니 이는 역법이 천체의 운행과 완전히 일치해 영원히 폐단을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방금 새 역서가 완성되었으므로 『수시력』이라 이름을 짓고 지원(至元) 18년(1281) 정월 초하루부터 실시할 것임을 온 천하에 널리 알리노니 다들 그리 알지어다.”

○ 왕통(王通) 등이 도일사(道日寺)에 객관을 정해 놓고 낮에는 태양의 그림자를 측정하고 밤에는 천문을 관측하는 한편 우리나라의 지도를 구해 보았다.
임인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한강(韓康)을 충청도와 교주도(交州道)에 보내 군마(軍馬)의 사료를 비축하게 했다. 당시 경상도 전수별감(慶尙道轉輸別監)이 기한을 정해 놓고 사료를 빨리 수송하라고 심하게 독촉했으므로 백성들이 다 도망쳐 숨어버렸고, 고구현(高丘縣 :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의 향리는 기한에 늦게 되자 처벌받을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병오일. 전국의 성황(城隍)10)·명산(名山)·대천(大川) 가운데 사전(祀典)에 등재된 것에는 모두 덕호(德號)를 덧붙여 주었다.
신해일.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정사일. 원나라 개원로(開元路) 동녕부(東寧府)의 왕만호(王萬戶)와 에센대왕[也先大王]이 일본 정벌에 관한 일 때문에 사자를 보내 왔다.
경신일. 지진이 발생했다.
을축일. 정동행성(征東行省)에서 공문을 보내, 신첨군(新簽軍) 15,000명의 식량과, 원나라 군사가 절령(岊嶺)11)에서 합포현(合浦縣)까지 가는 동안에 말에게 먹일 사료를 준비할 것을 통보해 왔다.

• 2월

기사일. 재추들이 수강궁(壽康宮)에서 왕을 위해 잔치를 열고 원나라로부터 책봉의 조서를 받은 것을 하례했다.
○ 도둑이 왕궁(王宮)에 들어와 보옥(寶玉)을 훔쳐갔다.
정축일. 응방(鷹坊)과 내료(內僚)의 관리들이 왕을 위해 잔치를 열자, 왕이 쌀 1백 곡(斛)을 주어 그 비용을 보조했다.
신사일. 카바나[哈伯那]가 동계(東界)에 가서 여진군(女眞軍)을 사열했다.
임오일. 장군 이인(李仁)을 원나라에 보내 군마(軍馬) 사료의 비축량을 줄여달라고 요청하게 했다.
계미일. 승비(僧批)12)를 2백여 명에게 내렸다.
병술일. 조성도감(造成都監)에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 원나라의 목수를 초청해다가 세 해에 걸쳐 궁실을 수축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큰 고통을 겪고 있었는데, 이번 화재를 두고 사람들은 하늘이 주의를 주노라 내린 벌이라고들 수근댔다.
경인일. 왕과 공주가 세자부(世子府)에 행차했다.
○ 내료(內僚) 하예(河汭)13)가 왕명을 내걸고 국신고(國贐庫)14)의 금·은과 세모시를 가져다가 내탕(內帑)15)에 들이고는 왕이 총애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 물건들은 모두 왕이 원나라에 입조할 때 쓸 여비조로 과렴(科斂)16)으로 거두어들인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기해일. 저판교(猪坂橋)17)의 인가 백여 채에 화재가 발생했다.
계묘일. 수강궁(壽康宮)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임자일.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과 만호(萬戶) 박구(朴球)·김주정(金周鼎)이 군사를 거느리고 합포현(合浦縣)으로 향했다.
갑인일. 원나라에서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우승(右丞) 힌두[忻都]와 홍다구(洪茶丘)를 보냈다. 당시 우리 익조(翼祖)18) 또한 원나라 조정의 명을 받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와서 두 세 차례 왕을 알현했는데 그 태도가 매우 공손했다. 이에 왕이,
“경은 본래 사족(士族)이니, 어찌 근본을 잊었겠는가? 지금 경의 행동거지를 보니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충분히 알겠다.”
고 치하했다.
을묘일. 장군 노영(盧英)이 원나라로부터 귀국하는 편에 황제가 왕을 부마국왕(駙馬國王)으로 책봉한다는 조서와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인(印)을 보내왔다. 앞서 왕이,
“제가 공주에게 장가들었으니 부마(駙馬)라는 두 글자를 덧붙인다는 조서를 다시 보내주기 바랍니다.”
고 건의했는데 황제가 그것을 허락한 것이다.
병진일. 왕이 힌두·홍다구와 함께 정벌에 관한 일을 의논했는데 왕이 남쪽을 향해, 힌두 등은 동쪽을 향해 앉았다. 원나라에 사대(事大)한 이후로는 왕이 원나라 사신과 동서(東西)로 마주 보고 앉았는데, 이때 와서 힌두가 감히 대등하게 행동하지 못하니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했다. 힌두 등이 합포현으로 떠났다.
무오일. 원나라 황후(皇后) 쿵크라트씨[弘吉剌氏]19)의 부음이 도착했다. 공주가 중랑장(中郞將) 정공(鄭公)을 원나라에 보내 장례 참석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 이 달에 임천호(林千戶)가 원나라에 귀부했던 우리나라 사람 15,000명을 데리고 왔다.

• 4월

초하루 병인일. 왕이 합포현(合浦縣)에 행차하는 길을 우부승지(右副承旨) 정가신(鄭可臣)이 호종했다.
경진일. 왕이 합포현에 도착했다.
계미일. 왕이 합포현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했다.
경인일. 공주가 원나라로 떠났다.
무술일. 힌두[忻都]·홍다구·김방경·박구(朴球)·김주정(金周鼎)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일본을 치러 갔다.
무신일. 가뭄이 계속되자 갓 착용과 부채 소지를 금지했다.
갑인일. 비가 왔다.
계해일. 정동행성(征東行省)의 총파(摠把)가,
“이 달 26일에 각 부대가 이끼도[一岐島]를 향해 떠났는데 쿠루쿠타[忽魯勿塔]가 지휘하는 수군 113명과 뱃사공 36명이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실종되었습니다.”
고 보고했다. 이에 낭장(郞將) 유비(柳庇)를 보내 원나라에 보내 그대로 알리게 했다.

• 6월

임신일. 김방경(金方慶) 등이 일본군과 싸워 3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이튿날 다시 벌어진 전투에서는 홍다구의 군대가 패전했다. 범문호(范文虎)도 전함(戰艦) 3,500척으로 만군(蠻軍 : 남송군) 10여만 명을 거느리고 오다가 태풍을 만나 만군이 모두 익사했다.
계미일. 왕이 경주(慶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머물면서 승려들에게 승비(僧批)를 내렸는데, 승려들이 왕의 측근들에게 비단을 뇌물로 주어 승직(僧職)을 얻으니, 사람들이 ‘나선사(羅禪師)’, ‘능수좌(綾首座)’라고 비꼬았다. 이들 승려 가운데는 처를 얻어서 가정을 꾸리는 자가 태반이었다.
병술일. 원나라에서 기병 3백 명을 보내 합포현(合浦縣)을 방어하게 했다.

• 7월

계묘일. 낭장(郞將) 유비(柳庇)가 원나라로부터 귀국하는 편에 황제가 탐라(耽羅)의 진수군(鎭戍軍) 50명으로 하여금 육지로 나와 농사짓게 허락했다.
을사일. 공주가 의주(懿州 : 중국 遼陽路 順安縣)에 도착하자 황제가 고려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내렸다.
정미일. 공주가 돌아왔다.
기유일. 왕이 합포현(合浦縣)으로부터 개경에 돌아왔다.
갑인일. 왕과 공주가 수강궁(壽康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중랑장(中郞將) 박온(朴昷)을 시켜,
“각 부대가 다자이후[太宰府]까지 진군해 여러 차례 교전하다가 아군과 적군이 다 퇴각해 있던 차에 만선(蠻船 : 남송 선박) 50척이 뒤미처 도착하므로 다시 성을 향해 진격 중입니다.”
라는 보고를 올리고는 노획한 갑옷과 투구, 활과 화살, 안장 딸린 말 등의 물품을 바쳤다. 이에 박온을 섭장군(攝將軍)으로 임명했다.
무오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한강(韓康)을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

• 8월

정묘일. 왕과 공주가 경상도에 행차했다.
경오일. 장군 원경(元卿)이 에센부카[也先不花]와 함께 원나라로부터 귀국했는데 그 편에 황제가 타나[塔納]를 경상도, 타라치[塔刺赤]를 전라도, 에센부카[也先不花]를 충청도의 토토카순[脫脫禾孫]으로 각각 임명했다.
임신일. 별장(別將) 강세(康世)로 하여금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의 표문을 가지고 원나라에 가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
○ 왕과 공주가 용안역(用安驛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에 머물면서 음죽감무(陰竹監務) 김이(金珥)20)의 행정 고과가 가장 우수하다는 보고를 듣고 그를 도평의안독원(都評議案牘員)21)에 임명했다.
병자일. 왕과 공주가 순안현(順安縣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머물자 경상도 안렴사(按廉使) 민훤(閔萱)이 새로 지은 원(院)에서 두 사람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정축일. 어가(御駕)가 보주(甫州 :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에 당도하자 보주부사(甫州副使) 박린(朴璘)이 시냇가에다 따로 정자를 만들어 두고는 잔치를 여니 왕의 측근들이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어가가 다시 안동부(安東府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로 이동하니 안동부사(安東府使) 김군(金頵)22)이 채붕(彩棚)을 설치하고 풍악을 울리며 영접했다. 반면 안동판관(安東判官) 이회(李檜)는 백성들의 인력과 재물을 아껴서 영접에 드는 쓸데없는 비용을 극력 줄였고 또한 어가를 맞는 의례가 화려하지 않았으므로 내료(內僚)들이 모두 그를 헐뜯었다. 이에 이회를 보주로, 박린을 안동부로 각각 인사 이동시켰다.
기묘일. 별장(別將) 김홍주(金洪柱)가 합포현(合浦縣)으로부터 행궁(行宮)에 와서 일본정벌에 나섰던 군사들이 패배한 사실과 원수(元帥)들이 합포현으로 귀환한 것을 보고했다.
임오일. 장군 이인(李仁)을 원나라에 보냈다.
을유일. 찬성사(贊成事) 박항(朴恒)이 죽었다.
갑오일. 김방경(金方慶) 등이 행궁으로 찾아와 왕을 알현했다.

• 윤8월

계축일. 지진이 발생했다.
병진일. 좌사의(左司議) 반부(潘阜)를 보내 힌두[忻都]·홍다구(洪茶丘)·범문호(范文虎)를 위로하게 했다.
경신일. 왕과 공주가 경상도를 떠나 개경에 도착했다.
○ 이 달에 힌두·홍다구·범문호 등이 원나라로 돌아갔다. 일본 원정에 나섰던 군사 가운데 귀환하지 못한 자가 무려 십만 명이나 되었다.

• 9월

을해일. 중랑장(中郞將) 정공(鄭公)과 낭장(郞將) 유비(柳庇)가 원나라로부터 귀국하는 편에 황제가 칙서로, “왕이 일본정벌에 수고했으니 입조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계미일. 중랑장(中郞將) 정복균(鄭福均)이 원나라로부터 귀국하는 편에 황제가 첨의부(僉議府)를 종3품으로 승격시킨다고 알리는 한편 인(印)을 주조해 내려주었다.

• 10월

기해일. 원나라에서 칙령으로 본국의 금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23)를 설치하고 인후(印侯)를 소용대장군(佋勇大將軍)·진변만호(鎭邊萬戶)로 임명해 호부(虎符)와 인(印)을 내려주는 한편 장순룡(張舜龍)을 선무장군(宣武將軍)·진변관군총관(鎭邊管軍摠管)으로 임명했다.
기미일. 용문창(龍門倉)24)에 비축해 둔 군량을 내어 영부(領府)에 지급했다.

• 11월

계해일. 왕이,
“매월 초8일, 15일, 23일 및 황제의 본명일(本命日)25)에는 가축의 도살을 금하고, 또 각 관청은 휴무하라.”
는 지시를 내렸다.
을축일. 원나라에서 황자(皇子) 아야치[愛牙赤]를 소환했다.
경진일. 왕과 공주가 벽란도(碧瀾渡 : 예성강 하구의 국제무역항)에서 아야치를 전송했다.
임오일. 각 도(道)의 안렴사(按廉使)들이, 일본 원정에 참여했던 군사 9,960명과 뱃사공·선원 17,029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가 19,397명이라고 보고했다.

• 12월

임진일. 대장군 김자정(金子廷)을 원나라에 보내 신년을 하례하게 했다.
경술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과인이 과거 세자 신분으로 원나라 수도에 입조했을 때 나유(羅裕)·지윤보(池允輔)26)·김응문(金應文)27)·정인경(鄭仁卿)·차득규(車得圭)28)·김부윤(金富允)·이지저(李之氐)·황룡(黃龍)29)·김의광(金義光)30)·양저(梁貯)31)·주석(周碩)32)·김위량(金位良)33) 등이 호종하면서 노고가 많았다. 또 전에 역적 임유무(林惟茂)가 강도(江都 : 지금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군대를 장악하고 황제의 명에 항거했을 때 찬성사(贊成事)로 은퇴한 송송례(宋松禮), 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홍문계(洪文系),34)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송분(宋玢), 대장군 김지저(金之底)35)가 대의를 내세워 그들을 소탕36)해 국가적인 큰 공을 세웠다. 그 모두를 어떻게 포상할 지에 대해 의논해 보라.”

○ 이 해 봄부터 겨울까지 전국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많은 사람이 죽었다.

七年 春正月 戊戌朔 元遣王通等, 頒新成授時曆, 乃許衡·郭守敬所撰也. 詔曰, “自古, 有國牧民之君, 必以欽天授時, 爲立理之本, 黃帝·堯·舜, 以至三代, 莫不皆然. 爲日官者, 皆世守其業, 隨時考驗, 以與天合, 故曆法無數更之弊. 及秦滅先聖之術, 每置閏於歲終, 古法益殫廢矣. 由漢而下, 立積年日月法, 以爲推步之準, 因仍沿襲, 以迄于今. 夫天運流行不息, 而欲以一定之法, 拘之, 未有久而不差之理, 差而必改, 其勢有不得不然者. 今命太史院, 作靈臺, 制儀象, 日測月驗, 以考度數之眞, 積年日法, 皆所不取, 庶幾脗合天運, 而永終無弊. 乃者, 新曆告成, 賜名曰授時曆, 自至元十八年正月一日頒行, 布告遐邇, 咸使聞知.” 通等館于道日寺, 晝測日影, 夜察天文, 求觀我國地圖.
壬寅 遣知密直司事韓康于忠淸·交州道, 以備軍馬草料. 時, 慶尙道轉輸別監刻日, 督飛輓甚急, 民皆竄匿, 高丘縣吏恐後期抵罪, 自縊. 丙午 中外城隍·名山·大川, 載祀典者, 皆加德號. 辛亥 王如奉恩寺. 丁巳 開元路東寧府王萬戶·也先大王, 皆遣使來, 以東征事也. 庚申 地震. 乙丑 行省移牒, 備新簽軍一萬五千人粮料, 及大軍自岊嶺至合浦行程草料.

二月 己巳 宰樞享王于壽康宮, 以賀宣命. 盜入王宮, 竊寶玉. 丁丑 鷹坊與內僚享王, 賜米百斛, 助其費. 辛巳 哈伯那如東界, 閱女眞軍. 壬午 遣將軍李仁如元, 請減軍馬草料. 癸未 下僧批二百餘人. 丙戌 造成都監灾. 時, 請元木匠, 以修宮室, 今已三歲, 民不堪苦, 人以爲, “天示灾, 以警之.” 庚寅 王與公主, 幸世子府. 內僚河汭稱旨, 取國贐庫金銀·細紵, 入內帑, 分賜嬖倖. 此皆朝覲盤纏, 科斂37)者也, 怨讟交騰.

三月 己亥 猪坂橋人家百餘火. 癸卯 設消災道場于壽康宮. 壬子 元帥金方慶, 萬戶朴球·金周鼎, 帥師向合浦. 甲寅 元遣征東行中書省右丞忻都·茶丘來. 時, 我翼祖, 亦以朝命, 自東北面來見王, 至于再三, 益恭益虔. 王曰, “卿本士族, 豈忘本乎? 今觀卿擧止, 足知心之所存矣.” 乙卯 將軍盧英還自元, 帝賜駙馬國王宣命, 征東行中晝省印. 先是, 王奏曰, “臣旣尙公主, 乞改宣命, 益駙馬二字.” 帝許之. 丙辰 王與忻都·茶丘議事. 王南面, 忻都等東面. 事大以來, 王與使者, 東西相對, 今忻都不敢抗禮, 國人大悅. 忻都等往合浦. 戊午 皇后弘吉刺氏訃至. 公主遣中郞將鄭公如元, 請奔喪. 是月, 林千戶押歸附一萬五千來.

四月 丙寅朔 幸合浦. 右副承旨鄭可臣扈從. 庚辰 王至合浦. 癸未 大閱于合浦. 庚寅 公主如元.

五月 戊戌 忻都·茶丘, 及金方慶·朴球·金周鼎等, 以舟師, 征日本. 戊申 以久旱, 禁載笠持扇. 甲寅 雨. 癸亥 行省摠把報, “是月二十六日, 諸軍向一岐島, 忽魯勿塔船軍一百十三人, 梢手三十六人遭風, 失其所之.” 遣郞將柳庇, 告于元.

六月 壬申 金方慶等與日本戰, 斬首三百餘級. 翼日復戰, 茶丘軍敗績. 范文虎亦以戰艦三千五百艘, 蠻軍十餘萬來, 會値大風, 蠻軍皆溺死. 癸未 王次慶州, 下僧批, 僧輩以綾羅, 賂左右得職, 人謂羅禪師·綾首座. 娶妻居室者, 居半. 丙戌 元遣兵三百騎來, 戍合浦.

七月 癸卯 郞將柳庇還自元. 帝許耽羅鎭戍軍五十名, 出陸耕種. 乙巳 公主至懿州, 帝勑還國. 丁未 乃還. 己酉 王至自合浦. 甲寅 王與公主, 宴于壽康宮. 元帥金方慶, 使中郞將朴昷奏, “諸軍至太宰府, 累戰, 交綏而退, 蠻船五十艘隨至, 復向其城.” 因獻所獲甲冑·弓矢·鞍馬等物.” 拜昷攝將軍. 戊午 遣知密直司事韓康如元, 賀聖節.

八月 丁卯 王與公主, 幸慶尙道. 庚午 將軍元卿, 偕也先不花, 還自元, 帝勑塔納於慶尙, 塔刺赤於全羅, 也先不花於忠淸, 皆爲脫脫禾孫. 壬申 遣別將康世, imagefont行中書省表如元, 賀聖節. 王與公主, 次用安驛. 聞陰竹監務金珥政最, 特差爲都評議案牘員. 丙子 次于順安縣. 慶尙道按廉使閔萱, 設宴于新院. 丁丑 次甫州, 副使朴璘, 跨川作茅亭, 設宴, 左右皆譽. 移次安東府, 府使金頵, 結綵棚, 張樂以迎. 判官李檜惜民力, 務省浮費, 又拙於進退, 內僚皆毁之. 於是, 移檜於甫州, 璘於安東. 己卯 別將金洪柱, 自合浦, 至行宮, 告東征軍敗, 元帥等, 還至合浦. 壬午 遣將軍李仁如元. 乙酉 贊成事朴恒卒. 甲午 金方慶等來謁行宮.

閏月 癸丑 地震. 丙辰 遣左司議潘阜, 勞忻都·茶丘·范文虎. 庚申 王與公主, 至自慶尙道. 是月, 忻都·茶丘·范文虎等, 還元. 官軍不返者, 無慮十萬有幾.

九月 乙亥 中郞將鄭公, 郞將柳庇還自元, 帝勑曰, “王勞於軍事, 其勿來朝.” 癸未 中郞將鄭福均還自元, 帝陞僉議府, 爲從三品, 鑄印, 賜之.

十月 己亥 元勑, 於本國金州等處, 置鎭邊萬戶府, 以印侯爲佋勇大將軍鎭邊萬戶, 賜虎符及印, 張舜龍爲宣武將軍鎭邊管軍摠管. 己未 發龍門倉兵粮, 給領府.

十一月 癸亥 下敎, “每月初八·十五·二十三日, 及帝本命日, 禁宰殺, 且放衙.” 乙丑 元召還皇子愛牙赤. 庚辰 王與公主, 餞于碧瀾渡. 壬午 各道按廉使啓, 東征軍九千九百六十名, 梢工·水手一萬七千二十九名, 其生還者一萬九千三百九十七名.

十二月 壬辰 遣大將軍金子廷如元, 賀正. 庚戌 有旨曰, “寡人嘗爲世子, 入朝京師, 羅裕·池允輔·金應文·鄭仁卿·車得圭·金富允·李之氐·黃龍·金義光·梁貯·周碩·金位良等, 有侍從之勞. 昔, 賊臣林惟茂, 擁兵江都, 以拒帝命, 贊成事致仕宋松禮, 前樞密院副使洪文系, 知密直司事宋玢, 大將軍金之底, 奮義掃蕩, 功在社稷. 其並議賞典.” 是年, 自春至冬, 中外疫厲大興, 死者甚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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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 충렬왕 7년(1281) 신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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