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신조(應神朝) 건국과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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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2. 2.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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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신조(應神朝) 건국과 멸망

1. 응신조 건국 경위

일본열도에 백제계 혈통의 천황(天皇)이 처음으로 등장한 시기는 응신천황(應神天皇) 때이다. 이 응신조(應神朝)는 응신(應神)이 백제본국의 지원으로 대화지방(大和地方)에 세워진 백제계 혈통의 왕조이다.

A.D 247년에 신공황후가 사망한 후 남왕계(男王系)와 여왕계(女王系)의 싸움으로 야마대국이 멸망하자 일본열도는 100여개 소국(小國) 분립(分立)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 구태백제(仇台百濟)는 구태백제계 부여(夫餘) 무리는 가야계(加耶系) 이주 무리로 가득 찬 구주(九州), 사국(四國), 담로도(淡路島) 등지나 신라계(新羅系) 이주 무리로 가득 찬 혼슈(本州)의 동해(東海)와 인접한 북륙지방(北陸地方)을 피하여 아직 개척(開拓)이 덜 되어 이주 여지(餘地)가 남아있는 오사카(大阪), 나라(奈良), 교토(京都) 등 대화지방으로 이주시켜 여러 개의 소국(小國)을 세웠다.

​​그 후 A.D 369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적대관계가 되자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대화지방(大和地方)에 건국된 백제계 소국(小國)들을 뭉쳐 백제계(百濟系) 혈통(血統)의 천황(天皇)을 세워 그 힘을 고구려 방어에 이용하려고 그 해 A.D 369년에 대화지방의 소국왕(小國王) 응신(應神)을 천황(天皇)으로 세우기 위하여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인구인 백제 120현(뒤에 17현 인원 추가로 보냄) 인민(人民)과 말 2필, 백제왕의 신임을 나타내는 칠지도(七支刀), 칠자경(七子鏡) 등 각종 중보(重寶)와 왕인(王仁) 등 학자들과 천자문(千字文) 등 각종 서책(書冊)을 보내었다. 백제 근고초왕 등의 지원으로 A.D 390년에 대화지방에 백제계 혈통의 응신조(應神朝)가 세워졌다.

2. 응신조(應神朝) 멸망 년도와 멸망 원인

그 후 영락(永樂) 9년(A.D 399년)에 구태백제가 다시 응신조 왜병(倭兵)을 동원하여 신라를 침공하자 광개토왕은 다음해 영락 10년(A.D 400년) 정월에 반격을 개시하여 퇴각하는 응신조 왜국 군사를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 대마도)를 점령하고 이어서 동해(東海)와 인접한 혼슈(本州)의 북륙지방(北陸地方)에 있는 신라(新羅, 일본서기에는 길비국<吉備國>으로 적혀 있는데, 신라라는 뜻이다.)와 연합하여 응신조(應神朝) 왜국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일본서기 이중천황본기(履中天皇本紀)에는 이중천황이 A;D 400년 2월 1일에 즉위하였다고 적혀 있다. 응신천황 뒤에 즉위한 이중천황(履中天皇)의 즉위일자가 A.D 400년 2월 1일인 것으로 보아, 응신조는 그 이전 즉 A.D 400년 1월 31일 이전에 멸망한 것이 분명하다.

일본의 연대기(年代記)에는 이때 명석포에서 백마(白馬)의 목을 베는 항복의식이 있었고, 신라는 응신조로부터 6현을 빼앗았다고 적혀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으로 전쟁상태로 되어 있는 한일관계를 복원하려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고승 현소를 조선에 파견했다. 그 결과 1609년 조약으로 강화가 성립됐지만, 그 때 조선의 답례 사절로 일본에 온 오윤겸의 통역으로 온 이혜직은 "일본연대기"라고 하는 책을 보았는데, 그 것에는 "응신 22 년 신라군이 내습 해오자 전투에서 패한 응신천황은 오사카에서 백리 떨어진 명석포에서 항복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또한 막부 관리의 안내를 적간관에 간 바, 동쪽 오카의 윗쪽에 한 개의 무덤이 있었다. 관리에 따르면, 그것은 백마총이라는 것으로, 항복의 맹세 표시로 백마의 목을 베어 매장한는 것이며,이때 길비국 지방의 6개 현을 신라에 양도했다고 한다. 적간관은 적마관라고도 하며 현재 하문시인데, 메이지 35 년, 아카마세키에서 시모노세키로 호칭을 변경하였으나, 백마총에 대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豊臣秀吉の朝鮮出兵によって戦争状態のままになっていた日韓関係を修復しようとして、徳川家康は高僧玄蘇(げんそ)を朝鮮に派遣した。その結果、1609年の己西条約として講和が成立したが、そのとき、朝鮮の答礼使節として来日した呉允鎌(オユンキヨム)の通訳として随行してきた李恵稷(イヘジク)は、『日本年代記』なる書物を見ている。それには「応神22年、新羅軍が襲来してきた。戦いに敗れた応神天皇は、大坂から百里離れた明石浦で降伏した」と記録されていた(当時の1里は現在の400メートル強)。さらに幕府の役人の案内で赤間関へ行ったところ、東の岡の上に一つの塚があった。役人によると、それは白馬塚と呼ばれるもので、降伏の誓いの印に白馬の首を斬って埋めたものであり、このとき、吉備国地方の六つの県を新羅に割譲したという。赤間関とは赤馬関ともいい、現在の下問市のことで、明治35年、赤間関から下関に呼称を変更しているが、白馬塚のことはなにも伝えられていない」

위 연대기에 나오는 응신조(應神朝)가 항복하면서 신라(新羅)에게 6현을 양도한 지역은 혼슈(本州)의 오까야마현(岡山縣), 히로시마현(廣島縣), 가가와현(香川縣), 효고현(兵庫縣), 아고우시(赤穗市) 등지이다. 아래 지도 참조

그 전까지 신라계(新羅系) 이주민(移住民)들은 동해(東海)와 인접한 이즈모(出雲), 돗토리(鳥取) 등지에 거주하고 있었다.

초기 신라계 이주민 이주지역

결어

응신조 건국은 백제 근초고왕이 대화지방의 백제계 혈통의 소국(小國)들을 뭉쳐 백제계 혈통의 천황을 세워 그 힘을 백제의 고구려 방어에 이용하려고 응신을 지원하여 응신조를 세웠고, 응신조 멸망은 응신조 왜 군사가 백제본국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제 지역으로 출병하여 고구려에 복속하는 신라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광개토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A.D 400년 정월경에 응신조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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