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5·18 광주 재진입작전 문서에 'Good Idea'"(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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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1.12.27. 오후 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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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 하나' 발령 공수부대도 하달…"발포명령자 특정할 것"
1980년 5월 전남도청을 장악한 계엄군의 모습.(5.18민주화운동기록관 제공 영상 캡처)/뉴스1 © News1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진돗개 하나' 발령 조치가 공수부대에도 하달된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재진입작전을 건의한 문서에 "Good Idea"라고 발언한 사실도 드러났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27일 출범 2주년 기념 대국민 보고회를 열고 중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위는 80년 5월19일 국방부장관실에 모인 신군부 핵심인사 9명(전두환·노태우·정호용·유학성·차규헌·황영시·주영복·이희성·유병현)이 광주진압작전을 격일 간격으로 논의한 사실을 '5공전사'(현대한국사사연구회 편찬, 1982)를 통해 찾아냈다.

조사위는 이 자리에서 공수부대의 증파, 발포, 광주봉쇄작전, 최종 진압작전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결정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또 경찰 기록을 통해 80년 5월21일 오전 8시 '진돗개 하나' 발령조치가 공수부대에도 하달된 사실도 새롭게 확인했다.

그동안 3·7·11공수여단의 어떤 자료에도 이날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사실은 기록돼 있지 않았다.

조사위는 80년 전남도경찰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사항'을 통해 전라남도 전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예비군 제외)됐다는 사실을 제7공수여단 작전상황실에 파견된 (경찰)연락관 양 모 주임이 입수했다는 기록을 확인했다.

5·18 조사위는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면 실탄분배와 발포가 허용된다"며 "3·7·11공수여단과 20사단 등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어떠한 자료에도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 사실은 기록돼 있지 않아 기록누락의 사유를 계속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다.

1980년 5월 계엄군에 끌려가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5.18민주화운동기록관 상영 영상 갈무리)/뉴스1 © News1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 진압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에 관여한 사실도 새롭게 찾아냈다.

2군사령부가 작성한 문건인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 사항'에 관련 기록이 있다. 80년 5월23일 진종채 2군사령관이 충정작전(광주재진입작전)을 건의한 문서에 "각하께서 'Good Idea'"라고 발언한 내용이 적혀 있다.

5·18조사위는 "이 같은 사실이 광주진압작전의 최종적이고 실질적인 승인권자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는 대다수 국민의 추정적 의혹 수준을 넘어 움직일 수 없는 결정적 증거에 이를 수 있도록 관련자들의 인정진술 등을 확보해 내년 5월까지 역사적 진실에 준하는 추가조사 결과를 내놓을 것"이라고 말했다.

80년 5월20일 야간에 광주역 인근 여러 곳에서 발포가 있었고 사전에 준비됐을 가능성도 확보했다.

종전 조사결과는 제3공수여단이 차량 등으로 공격해 오는 시위대를 향해 권총을 발사해 차량을 정지시켰다는 박 모 대대장의 진술이 5월20일 광주역발포 상황을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였다.

5·18조사위는 "이날 야간에 광주역 일원 외에도 인근 지역인 대인동, 동명동, 신안사거리, 광주시청 등 최소 7개소 이상의 지역에서 사격, 또는 피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5·18보상심의자료의 상이자 관련기록을 통해 확인했다"며 "현장에서 발생한 총상환자들의 피해사실에 대한 교차검증과 정밀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육군본부 작전처, 병력배치현황'(1980년 5월21일)을 통해 3공수여단에 M16 소총탄 39만9840발, 수류탄 1590발, 같은 날 7공수여단에 M16소총탄 84만발, 수류탄 3300발이 보급됐다는 기록도 찾아냈다.

5·18조사위는 "이 탄약의 보급 시기, 방법 등에 대해 우리 위원회는 정밀 추적 중에 있다"며 "같은 날 오전 광주교도소 경계병력(31사단)에 헬기를 통해 실탄 2만발이 추가 보급된 사실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동안 제3·7·11공수여단의 작전에만 치중되면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은 20사단의 역할도 새롭게 드러났다.

5월19일 9인회의에서 결정한 내용을 마지막까지 현지에서 주도적으로 실행한 병력이 20사단이다.

20사단은 80년 5월21일 광주 도착 당시부터 광주가 최종적으로 진압된 후 6월27일까지 지역계엄부대인 31사단을 제치고 모든 상황을 주도했다.

5·18조사위는 "31사단이 상비사단보다 규모가 작은 향토사단이기 때문에 역량 부족을 이유로 20사단을 작전에 투입한 것인지, 강력한 진압과 평정을 목적으로 전투력이 강한 20사단을 투입한 것인지에 대해 면밀한 검증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조사위는 이밖에 계엄군이 비무장 민간인을 참혹하게 살상한 사건과 살해된 민간인 시체 다수가 실종됐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광주와 전남 일원의 무기고 피습사건에 북한군이 관련됐다는 주장, 북한특수군의 광주 침투 주장이 허위라는 점 등도 밝혀냈다.

5·18조사위는 "발포명령 체계의 실체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위권 발동, 광주진압작전 관여사실을 밝혀가고 있다"며 "당시 군기록, 경찰기록 등에 대한 더욱 정밀한 확인, 분석을 통해 그동안 쟁점으로 남아 있던 전두환의 자위권 발동의 관여, 발포명령 체계의 실체를 확인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 발포명령과 관련해 당사자의 인정진술 확보노력과 함께 그동안 계엄군 장·사병의 전수조사과정에서 확인된 증언들과 군 관련 기록 등의 모든 정보를 빅데이터화해 사회적관계망분석(SNA)으로 발포명령자를 특정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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