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06.03 찢어진 깃폭
by politician on 2020-05-25
글쓴이 김문은 본명이 김건남이고 1946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났다. 1980년 5월 19일에 광주에 있는 친지들을 만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왔다가 겪은 일이다. 5월 24일 새벽 7시에 군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철로를 따라 광주를 빠져나와 서울행 기차를 탔다. 6월 3일 명동성당에서 이 글을 낭독하였고 수녀들이 녹음하여 퍼뜨렸다.

1. 아름다운 도시  

1980년 5월 19일, 아름답고 조용한 전원도시 전남의 도청소재지, 독립과 민주주의 투쟁에 몸바친 수많은 영웅을 길러낸 호남의 젖줄이며 빛의 고을인 광주가 피의 쑥밭으로 변하던 날, 공설운동장 입구에다 황급히 승객을 토해내고 도망치듯이 시외로 빠져 나가던 고속버스 뒷모습에서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피로에 지친 몸을 택시에 던지고 운전사에게 도청 앞으로 가자고 말했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죽는 시늉을 하면서, “차라리 걷는 게 나을 거요”하며 확 브레이크를 밟고 나를 다시 내리게 했다. 하는 수 없이 걷기로 하고 임동 쪽으로 걸어갔다. 불타 버린 파출소가 어느 패전한 도시의 단면을 보여 주는 듯했다. 도처에 대검을 부착한 계엄군들이 승전의 대가로 얻어 낸 적지를 짓밟듯 온통 시가지를 누비고 있었다. 나의 전신에선 오싹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스레 그들 가운데를 뚫고 벌써부터 이마에 돋아난 식은땀을 훔치면서 금남로에 접어들었다. 한때는 꽃들이 무성히 피어나 내방객을 환영해 주던 아름다운 도시, 소박한 인정, 잘 정돈된 시가지들은 모두가 옛 시절의 추억에 잠기고 폐허로 변해 가고 있었다. 포근한 어머니의 젖가슴마냥 도시를 살찌게 하는 아름다운 산 무등산, 또 봄이면 둑 위에서 낚시질하는 강태공들의 모습이 깃든 극락강이 있는 아름다운 전원도시에 지금은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2. 살인면허  

광주시민은 양처럼 순하다. 그러나 이 날 그토록 순한 양들이 민주수호라는 제단에 바쳐지는 피의 제물이 되고 있었다.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는 권력의 지속적 유지를 위해 현체제의 어떤 변화도 용인하지 않는다. 어떠한 변화나 개선을 촉구하는 행위는 권력자에 의해 즉각 체제전복의 음모로 간주되어 무참한 탄압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후진국의 풍토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이지만, 오늘의 호남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는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반민중 탄압의 극을 장식할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함성, 창자를 뒤틀리게 하는 비명, 임종을 알리는 듯한 숨가쁜 신음소리, 흡사 대지가 메말라 저 젊은 넋들에게서 짜낸 피를 서서히 마시고 취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하늘은 온통 메아리치는 함성으로 찢어지고 있었다. 시위학생들과 구경하던 무고한 시민들을, 벌떼처럼 날아들어 온 공수특공대가 단 한 마디의 경고도 없이 포위해 버렸다.  

“설마 무고한 양민을 죽이기까지 하랴”하는 단순한, 그리고 어리석은 믿음에 의지하고 중심가에 접어든 나는 일단 살아야 되겠다는 가장 본능적인 마음에 쫓겨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뒤쫓아오는 총검의 섬뜩한 촉감이 어깨로 의식되며 어느 빌딩 안으로 정신없이 뛰어들어갔다.  

고맙게도 먼저 온 사람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셔터를 내려 주어 철퇴로 골통이 부서지는, 대검에 가슴이 찢어지는 참극을 면할 수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내 곁에 다가와 있음을 절감했다. 나는 피신객들 틈에서 생쥐처럼 움츠려 앉아 그물망처럼 엮어진 셔터의 바깥 정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고막을 찢는 총성, 예리한 대검, 철봉 휘두르는 소리, 누군가의 목숨이 절단나는 비명소리는 지옥의 한 장면처럼 내 의식을 뚫고 들어왔다.  

남녀노소, 학생, 시민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갈기고 찌르고 부수었다. 마치 2차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모잠비크 민중이 무자비하게 학살되던 그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는듯한 착각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만큼 재빨리 나는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위의 일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미처 피하지 못한 70세 가량의 할아버지의 뒤통수에 공수병의 철퇴가 내려치자마자, 노인의 입과 머리에서 분수 같은 피가 쏟아져 내리며 비명도 아픔도 없이 훌쩍 거꾸러졌다. 나는 어찌해야만 좋을지 몰라 망연히 서 있다가 꼬아지는 아픔에 계단에 주저앉고 말았다. 곁에 있던 아주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그대로 장승처럼 땅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약하고 힘없는 민중의 집단적 분노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호소할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서러움이었다.  

살인현장, 그것도 가장 무자비하고 잔악한 살인현장을 직접 목격하기는 처음이다. 그러나 살인자의 악랄함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두 명의 공수부대에게 개처럼 끌려온 여인은 만삭에 가까운 임신부였다. “야, 이년아, 그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게 뭐야.1” 나는 무엇을 묻는지 몰라 그녀의 손을 살폈으나 손에 주머니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쌍년아, 뭔지 모르나. 머스마가. 계집아가.” 그들은 매우 흥분한 것처럼 보였으며, 내가 그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깨달은 순간은 바로 이 순간이었다. 여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으나 아마 자기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눈치였다. “그럼 내가 알려주지!” 순간 여자가 반항할 짬도 없이 옷을 나꿔채자 그녀의 원피스가 쭉 찢어지며 속살이 드러났다. 공수병은 대검으로 그녀의 배를 푹 찔렀다. 후비면서 찔렀는지 금방 창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아랫배를 가르더니 태아를 끄집어내어 땅바닥에 할딱이고 있는 여인에게 던졌다. 도저히 믿을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이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돌리고 몸서리치면서 이를 갈았다.  

나는 눈을 감고 혀를 깨물었다. 전신에 경련이 일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시체도 공수병도 보이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사람의 말에 따르면 마치 오물을 쳐내듯이 가마니에 쑤셔 넣고 쓰레기 차에 던져 넣고 갔다는 것이다. 나는 무의식중에 소리쳤다. “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이 순진무구한 사람들의 피의 대가로 무엇을 해야 보상이 될까. 이제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정말로 저들이 이 나라 국토방위라는 성스러운 과업을 수행하는 대한민국의 국군일까.  

내 자신의 목숨을 위해 그토록 끔찍한 광경을 숨어서 엿보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에 항거할 수 없는 자신의 비굴함을 보고 참으로 치사한 인간의 모습이 바로 나로 보여졌을 때, 자신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배가 갈라져 죽어가던 그 여인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의 비겁하고 용렬한 모습에서 최초로 자기증오의 감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어느새 딴 곳으로 피신했는지 내 옆에 있던 사람들은 다 없어져 버렸다. 계엄군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핏자국과 파편이 오물과 분노와 함께 남아 있었다. 대검과 철봉을 피해 군중들은 골목, 다방, 식당, 가게, 건물 등 안전한 곳이면 아무 데고 뛰어들었다. 피를 마시기에 혈안이 된 군인들은 아무나 잡히는 대로 찌르고 갈겨서 현장에서 즉사시키는 것이었다. 그들은 살인면허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누구나 죽일 수 있는 살인면허를 소지하고 있었다.  

“쿼바디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로마로 간다” 로마병정들에게 무차별 학살되는 초기 기독교인들을 보고도 도망가는 사도 베드로를 보고 하신 예수의 말씀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권력에 짓눌리고, 풍요로부터 외면당하고, 소외와 고독의 한 가운데서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권력과 무력의 제물이 된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결코 서 푼 이상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로마에 가서 먼저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박히자는 결단을 내리고 발걸음을 돌렸던 그 역사적인 전환, 그들의 행동이 오늘의 기독교의 초석이 되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의 형제가, 나의 동포가 저렇게 피를 토하는 현장에서 자리를 피해 시 변두리에 위치한 월산동 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처가와 동생들의 생사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 내가 도망할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가 도망치기에 충분한 이유가 못 된다고 다시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이 자리에서 죽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업을 내가 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충분한 도피이유가 될까. 모르겠다. 우선 이 순간을 면하고 보자. 나는 가능한 한 골목길만을 선택해서 달렸다.  

다행히 손에 든 게 없어서 좋았다. 어느 골목을 벗어나 대로 앞에서 딱 서고 말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빈 상자 뒤에 숨겼다. 참으로 무섭고 끔찍한, 역사가 생긴 이래 어느 학살의 현장에서도 결코 시도되지 못했을 그런 장면을 보아야 했다. 과연 저 군인들이 나 자신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똑같은 한국인이란 말인가. 설령 김일성에 의해 북한에서 남파된 게릴라인들 이들처럼 잔인할 수가 있을까.  

공수병들이 여대생으로 보이는 3명의 여학생을 불러 세워 놓고는 발가벗기고 있었다. 브래지어와 팬티까지도 모조리 찢어내고 그 중 유독 험하게 생긴 공수병이 구둣발로 아가씨들을 차기 시작했다. “빨리 꺼져! 이 쌍년들아!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고 데모나 하고 지랄이야!” 그는 성난 늑대처럼 내몰았다. 나는 아가씨들이 빨리 도망쳐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내 소원과 달리 내 기도가 들리지 않았는지 그 아가씨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때 군인 하나가 고함쳤다. “이 쌍년들이 살기가 싫은가 봐! 그럼 할 수 없지” 순간 아가씨들의 등에는 대검이 꽂혀있고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아가씨들이 거꾸러지자 군인들은 대검으로 그네들의 가슴을 ×자로 긋더니 생사도 확인하지 않고 쓰레기차에 던져 버렷다. 암매장을 하는지 불태워 버리는지 그것은 알 길이 없었다.  

바로 이 때였다. 시민들의 분노 어린 고함이 더욱 거칠어졌고 흥분이 절정에 올랐다. 누군가 “시민이여! 모두가 일어섭시다! 우리의 자식들이 다 죽어갑니다. 공구들과 곡괭이든 닥치는 대로 가지고 싸웁시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와---!”하는 함성과 함께 시민들이 모여들더니 어느 목재소에선가 각목을 가져왔다. 겁에 질린 오합지졸처럼 도망치던 시민들은 돌아와 싸우는 자세로 돌변해 갔고, 학살은 더욱 심해졌다. 공수부대와 맞서 맨손으로 싸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만일 내가 총검에 대항하다 죽는 날이면 죽음이 너무나 헤픈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간신히 자제하면서 될 수 있는 한 빨리 달렸다. 그 날 밤 11시가 지나서야 동생들의 생사를 확인할 수가 있었다. 아가씨들의 끔찍한 최후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려서 한잠도 자지 못했다.  

3. 언어를 초월한 사랑  

밤을 새워 볶아 대는 총성, 전쟁영화에서나 듣던 자동화기의 연발 소리, 카빈과 기관총이 연달아 빗발쳤다. 도대체 저 총알들은 누구의 가슴을 노리고 있는가. 도심의 아스팔트는 선혈로 물들고 계엄군의 무차별한 발포는 밤이 새도록 벼락 쳤다. 고3에 재학중인 내 동생이 군대에 화염병을 던지며 밤을 새운 뒤 집에 돌아와 전하는 말에 따르면 시위군중 5백여명 이상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고 한다. 나는 개죽음을 당해서는 안 된다며 말렸다. “친구와 형제가 죽어가는데 나만 살자고 도망가란 말입니까.” 내 동생은 흥분을 누르지 못하여 대들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친구와 친척들의 피를 보고 학생들과 시민들은 분노와 저주의 극에 달했다. 시내의 모든 택시기사들은 저마다 차를 몰고 와 시위군중을 태우고 카퍼레이드를 벌이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나 가로엔 박수와 환호로써 격려하는 시민들로 꽉 차 있었고, 젊은이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차에 올라탔다. 고속버스, 시내버스, 불도저, 노획한 군 장갑차, 장교 전용차, 각양각색의 차량들이 수백 대가 넘었다.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수백 명의 정비원이 뛰어나와 고장 난 차량을 정비하여 다시 내몰았다. 줄 서는 시위차량을 위해 서비스하는 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주유소 직원들은 아무 차량에나 필요한 대로 기름을 공급했다. 차량마다 피로 쓴 플래카드가 걸려져 있었다. 덜 마른 선혈이 흘러내리는 차체의 구호가 군중들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살인마 전두환을 때려 죽이자! 최규하 대통령은 물러가라! 김대중씨를 석방하라!”는 피로 갈겨 쓴 플래카드와 함께 대한민국의 국기가 그들의 손에서, 그들의 차에서 펄럭이고 있었다.  

울다가도 웃을 수밖에 없는 모습도 많았다. 고속버스 지붕에 올라앉은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함성을 외치며 총검 대신 각목과 공구로 차체를 두드리며 구호에 강한 악센트를 가미하고 있었다. 차량을 확보한 데모군중의 기동력은 무서운 것이었다. 동생은 오픈카에 횃불을 설치하고 시내를 누비며 시민들의 궐기를 외치고 다녔다. 나는 그를 말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 나는 생사를 걸고 친구들과 함께 투쟁하는 그의 충정에 감사함을 느꼈다.  

공수부대가 철수하겠다는 말이 들렸다. 시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군인들의 만행에 격분한 한 육군장교가 곁에 있던 5명의 군인을 사살하고 자기도 자살했다는 말이 전해졌다. 사병들 사이에 혼란이 커져 갔다. 공수특공대는 도시외곽으로 철수하고 정규 계엄군이 진입하여 시위군중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자행해 왔다. 젊은이들의 피가 여전히 거리에 흩뿌려져 있었다. 길바닥에 나뒹구는 어린 소년들의 피와 시체를 보며 어느 시민이 그냥 서서 구경만 할 수 있겠는가.  

광주는 공포와 전율의 도시가 되었다. 화염이 사방에서 솟았다. 군대에 의해 외부세력과의 모든 통신이 완전히 차단된 절해고도의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의 가슴은 불타고 있었다. 거기에 동참하지 못했던 사람, 하나로 굳게 뭉친 이 민중들을 자신이 직접 목격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해방감을 알 수 없으리라. 민주주의 수호 투쟁에 목숨을 던진 젊은이들의 얼굴에서 눈물을 볼 수 있었으리라. 피로 물든 가슴들, 그들의 머리엔 자신의 피로 쓴 구호와 얼룩이 진 띠를 동여매고 목이 찢어져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사랑하는 우리의 이웃, 어리고 티 없는 아이들, 이젠 아주머니들조차 차에 합류하고 있었다. 외치다 외치다 목이 쉬어 이젠 들리지조차 않는 목소리로 민중을 향해 눈물로 호소를 보내는 어린 소년들의 절규에 나는 기어코 울어 버리고 말았다. 승차하지 못한 시민들은 김밥을 만들어 왔고 음료수를 가져왔다. 먹을 것, 마실 것을 송두리째 쓸어 담아 왔다. 계란, 빵, 콜라, 우유, 쥬스 등 모두 시위군중에 주고 싶어했다. 상자에 모두 집어 넣다가 보니 노인은 그것을 들어올릴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을 들어다 달리는 차량을 세우고 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의 얼굴 위에는 싸우다 죽으리라는 각오가 역력했다.  

먹을 것을 준비 못한 부인들은 물통을 들고 나와 그들의 얼굴을 닦아 주고 물을 입에 대어 주었다. 시민들은 몰두한 얼굴로서 질주하는 차량을 따라 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목숨을 함께하는 피와 사랑의 투쟁이었다.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하는 사람, 약과 드링크제를 들고 나온 약사, 박수와 격려를 보내기에 혼신을 다하는 인파.  

4. 5월 22일의 헌혈자들  

최루탄의 독기가 확 퍼져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열기와 폐허로 변한 도시는 지옥의 한 장면 같았다. 데모군중이 점점 격렬해지자 또다시 계엄군은 사격을 시작하였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을 토하며 쓰러져 가는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다. 시민들은 화산지대마냥 되어 버린 금남로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30만 이상이라고 추정되는 그 거대한 인파는 거리를 꽉 덮고 장사진을 이루었다. 페퍼포그의 무서운 효력은 말로만 들었지 경험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연방 재채기를 해 대며 쏟아지는 눈물, 콧물을 필사적으로 훔쳐 대면서 군중 틈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계엄군은 도청 앞 광장에 장갑차를 지그재그로 정차시켜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총구를 시민 쪽으로 향해 놓았다. 그것은 언제 불을 뿜을지 모르는 활화산의 분화구 같았다.  

하오 3시, 장차 무서운 충돌을 예견하는 조짐이 짙어져 갔다. 무기가 없는 학생들은 유일한 무기로 각목과 주유소에서 뽑아 온 기름을 준비하였다. 그들은 다섯 개의 드럼통을 트럭 위에 싣고 통마다 기름을 가득히 담아 계엄군 쪽으로 몬 뒤 솜뭉치에 불을 당겨 드럼통에 던졌다.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이것이 신호인 양 계엄군들의 총구에서 불이 튀기 시작하였다. 장갑차 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치던 중 3학년 또래의 소년이 이마와 복부에서 시뻘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군중을 향하여 쏟아지는 실탄은 빗발치듯했다. 여기저기에서… 내 앞에서 지휘하던 청년이 “아이쿠”하는 외마디를 남기고 쓰러졌다. 들것을 준비하지 못한 군중들은 등에 업거나 각목으로 들것을 만들어서 환자와 시신을 날랐다. 저 어린 나이에 이름도 없이 죄도 없이 꽃잎처럼 쓰러져 갔다.  

태극기를 흔들며 동포의 총에 맞아 무의미하게 죽어간 저 무명소년의 이름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폭도, 불량배, 반국가적 단체, 용공세력 내지 간첩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 용의자라고 기록될 것인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들풀, 열매도 맺지 못하고 향기를 뿜어 보기도 전에 베어진 들풀, 이제 찬서리에 뒤덮인 저 어린 꽃에 무어라 이름을 붙여 주어야 할까. 찢어진 채 펄럭이는 피로 물든 깃폭, 그 속에 뚫린 총알구멍은 민중의 서리고 서린 적의와 원한만큼이나 많았다.  

오늘의 지성, 오늘의 종교인들이 진정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수십 년 동안 쌓여 온 민중의 원한, 우리가 그것을 무시하고 개인적인 안일과 영화를 얻기 위해 권력과 부도덕한 세력에 야합한다면, 그리하여 정부의 억압과 권력을 증가시키기만 한다면 장차 저 축적된 분노는 무엇이 되어 나타날 것인가. 역사가 전달되고 민중의 맥박이 끊어져야 하는 오늘의 위기 속에서 우리는 미래의 천국만을 꿈꿀 수가 있단 말인가. 단종을 복귀시키려다 실패한 사육신, 이태조의 건국에 반대하여 피를 뿌린 정몽주는 충신으로 역사에 기록되면서 왜 똑같은 대의를 위해 쓰러져 가는 젊은이들은 폭도라고 지탄되어야 하는가. 그들이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무슨 개인적인 욕심을 추구한 것이 있는가.  

총알을 피해 퇴각하던 군중들은 어느 골목길을 꺾어 돌아 거기에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불행과 마주치고 말았다. 이런 혼란 속에서 몇 미터도 되지 않는 좁은 골목길에 수천 명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수많은 사람이 밟히면서 50여 명이 죽거나 부상당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 나는 “용케도 총알과 대검을 피했지만 여기에서 죽고 마는구나”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나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시민 여러분, 헌혈을 하십시오! 피가 필요합니다. 피가 없어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학생들은 마이크로 헌혈을 호소했다. 수많은 남녀가 헌혈하겠다고 나섰다. 진짜 피로 ‘헌혈차’라고 쓴 구급차에 탔다. 나는 적십자 병원을 향해 출발했다. 병원에 들어서자 피비린내가 나를 맞았으며 나는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병실, 복도 할 것 없이 그 큰 병원이 환자로 가득 차 있었다. 앉아서 채혈할 만한 공간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차를 타고 양림동 다리 곁에 있는 다른 병원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서 있던 군중들을 가르며 가운데서 한 청년이 나타나 군중을 저지하려고 하는 계엄군에게 돌을 던졌다. 그는 힘없이 거꾸러졌다.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둘이서 철모를 벗겨 골통을 박살내었다. 군중은 박수를 쳐 대었다. 모처럼의 복수를 목격한 시민들의 얼굴에서 승리의 기쁨이 출렁이고 있었다. 나 자신도 압제자에 대해 보복하는 것에 시원한 흥분이 저려 왔다.  

어느 병원이나 환자들은 초만원이었다. 마침내 헌혈을 하고 나서 나는 잠시 생각에 젖어 보았다. 누군가 이름도 모를 젊은이의 피와 내 피가 혼합되어 흐른다고 생각하니 연민의 정이 솟아올랐다. “살아라! 제발 살아서 용감하게 싸워 다오. 이 젊은이들 어느 누구의 피도 헛되지 않기를 바란다”  

5. 누가 그들을 폭도로 몰아세웠는가.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은 모두 도시외곽으로 철수했다. 시민들은 도청을 장악했고 화순, 송정리, 나주, 함평 등지의 무기고에서 무기와 탄약을 탈취했다. 4천여 정의 총, 5만발의 탄약, 수류탄, 다이너마이트는 계엄군과의 전투를 수행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각목과 공구만으로 중무장한 계엄군과 싸운다면 목숨만 더 잃게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시민들은 전술을 바꾸기로 했다. 곡괭이와 삽을 버리고 카빈총과 기관총, 수류탄을 집어들었다.  

누군가 도청과 시청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이 소문에 그치기를 나는 기도했다. 공수부대는 광주시민들이 진짜로 무기로 무장했다는 것을 알고 도시외곽으로 철수해 버렸다. 이 소식을 듣고 시민들은 기강와해의 최초의 징후를 보여 주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손에 무기를 들었으나 적이라곤 없는 전사들이었다. 기강와해는 정말 불행한 조짐이었다. 싸움터를 잃은 시민군은 자제심을 잃고 벌떼처럼 시내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이젠 중학생들이 수류탄을 들고 있었고 국민학생들은 손에 카빈총을 들고 있었다. 사용방법을 모르는 미숙한 손들에 무기를 맡긴다는 것이 시민 자신들에게 무슨 손해를 끼칠지 누가 알겠는가. 다시 한 번 시는 공포의 도시가 되어 버렸다. 밤새 그들은 하늘에 대고 총을 쏘아 댔다. 누가 이들, 기본적으로 선량한 사람들을 폭도가 되도록 몰아세웠는가.

그들이 무기를 훔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비극적 상황을 야기시킨 것은 무엇인가. 무기를 다루는 데 익숙지 않은 그들은 밤하늘에 연발로 쏘아 대서 밤하늘을 불꽃의 소나기로 바꿔 놓았다. 어느 총알에 다칠까 두려워 시민들은 문을 잠그고 방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다음날, 나는 동생과 조카들에게 도시를 떠나자고 재촉했다. 전남에서는 모든 교통이 마비되어서 우리는 걸을 수밖에 없었다. 걷기는 이조시대의 교통수단이었다. 우리는 3백년 전의 과거로 되돌아갔다. 등에 짊어진 짚신꾸러미를 생각케 해주는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둘이 떠났으나 오후에 되돌아왔다. 철로연변에 널린 시체더미를 보고 깜짝 놀라 되돌아온 것이다. 광주를 떠라려다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의 시체였다. 군대는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시내에서는 데모군중들이 밤낮으로 계속해서 총을 쏘아댔다. 끔찍한 사건들로 이어졌던 이 사흘은 나에겐 삼 년보다 더 긴 것 같았다.  

새로운 내각의 각료들이(구내각은 5월 17일 군부 쿠데타 후에 사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를 방문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은 총리를 만나기 위해 도청에 다시 모였다. 수만 명의 시민들이 뜨거운 햇빛 속에서 5시간 동안을 도청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시신을 도청 지하실에서 꺼내 밖으로 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대가 자제와 인내로써 행동하고 있다는 보도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허위에 찬 것인가를 총리에게 보여 주고자 했다. 지하실에 내려가 475구의 시체를 보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불에 탄 것도 있어 시민들은 다시 한 번 분노에 치를 떨었다. 5시가 되고 6시가 되자 시민들은 점차 기운을 잃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시체들은 다시 지하실로 되돌려 보냈다. 시민과 만나 해결책을 세우겠다고 약속했던 신임 총리는 그 약속을 깨고 시내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 놓지 않고 이 사태를 ‘폭동’이라고 몰아붙였다. 계엄분소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그는 더 이상 머무르는 게 무서워서 서울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것이 총리가 취임 후 행한 첫번째 조치였다.

그는 ‘완전한 무법상태’니 ‘폭도들에 의해 장악된 도시’니 하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신음소리가 아직도 들린다. 그들의 투쟁은 바로 가장 기본적인,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위한 투쟁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조국의 장래를 위해 역사의 이 순간에 일어서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그 결과로서 수많은 고통의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폭력도 아니었고 오도된 폭동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연적인 흐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천체운동처럼 완전히 자연스럽고 기본적인 역사의 방향을 좇지 않았던가.

한 젊은이가 얻어맞고 배에서 살점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고통을 잊은 듯 그는 자신의 피를 찍어 “자유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썼다. 이러한 비극이 우리 자신의 도시, 민족, 동포에게 안겨진다면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핏빛으로 말라붙은 우리 도시의 산하를 보고 어느 누가 입을 닫고 아무 말 없이 지낼 수 있겠는가. 80만 시민의 함성이 더이상의 메아리도 없이 빈 하늘에 그저 사라져 버릴 것인가. 그들의 고통과 시련이 헛된 것이 되어 ‘불순분자’의 선동을 받은 폭동에 불과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말 것인가.

6. 임금님의 새옷  

교통·통신이 완전히 마비된 호남일대는 자식의 생사를 알아보기 위해 조이는 가슴을 달래며 광주로 향하는 학부모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각처에서 걸어왔다는 늙은 부모들의 반응에서 도시에서의 비극을 목격한 우리는 이제 또 하나의 비극을 보아야 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누가 내 자식을 죽였느냐고 땅을 쳤고, 살아 있는 자식을 만난 이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들을 대피시키기도 매우 어려웠다. 계엄군이 도시를 포위하고 모든 도로를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군대가 비행기에서 뿌린 비라는 첫머리에 ‘호소문’이라 씌어 있었지만 내용은 기만과 술수로 버무려진 순전한 협박이었다. 방송 내용도 오히려 시민의 감정을 격화시킬 뿐이었다. “정부는 인내와 자제로써 발포를 못 하고 수많은 군경들이 희생되었습니다”라며 전시민이 고정간첩과 폭도들로 묘사되고 있었다. “하루빨리 여러분의 집으로 돌아가서 질서를 회복해 주십시오”등 공공연한 거짓말로 그들은 시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고 있었다.  

이런 거짓말로 가득 찬 삐라를 보고 시민들은 집으로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시민의 눈을 가리고 아웅해도 분수가 있지 정말 이럴 수가 있겠는가.” ‘정부의 발표’하면 이젠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을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권력에 의지해 변명하기에 급급한 정부 관리들을 보고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가 분노를 참을 수가 있겠는가.

피바다가 되어버린 도시, 이 죽음의 도시에서 권력자들은 시민의 함성을 폭도로 규정했다. 이 무슨 배반인가. 물론 이토록 혼란한 틈을 타서 진짜 간첩이 한가운데에 끼어들었을 가능성을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정부 전복 기도의 일부로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검은 손님들’(북한 간첩)이 방화와 살인을 저질렀으리란 추측을 누구도 부정 할 수 없다. 그러나 시민들의 거사는 결코 간첩들의 현혹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어떤 열성적인 반공용사라도 광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방구석에 눌러앉아 자기 안전만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는 입, 사실을 사실대로 쓰지 못하는 펜,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지 못하는 라디오와 TV, 이것이 오늘의 한국이다. ‘임금님의 새옷’이라는 우화는 무엇인가.1 임금님을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임금님이 발가벗은 채로 “내 옷이 얼마나 아름다운가.”하며 뽐내는데도 신하들은 임금님에게 옷을 전혀 입지 않았다는 말을 못 한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가장 깨끗한 체, 가장 진실한 체, 가장 애국자인 체하기 위해 모든 대신들은 보이지도 않는 천을 만지며 혀가 닳도록 칭찬하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한국의 군대는 자기의 허위와 기만을 아무도 지적해 주지 않는 그 임금과 같다. 어리석은 임금은 발가벗고 행차하고, 대신들은 자신의 수치스러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임금이 발가벗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아첨과 기만의 화신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우화에서는 한 어린이가 진실을 지적한다. 그는 큰 소리로 외친다. “임금님은 발가벗었다!” 오늘날 한국 관리들에겐 이 어린이만큼의 양심을 가진 자가 하나도 없단 말인가.1 왜 그들은 이런 속임수와 음모로써 민중을 계속 속여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1 그들은 봉사해야 할 민중을 속이려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결코 영원히 속지않는다.  

억압과 학살로써 어떤 반대도 물리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식민지 시대(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부터 계승된 전근대적인 지배자 신념에서 오늘의 위정자들은 깨어나야 한다. 아들을 잃고, 남편을 잃고, 딸을 잃은 시민들 앞에서, 화염방사기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까맣게 타 버린 유해들 앞에서 저렇게도 처절한 유가족의 통곡소리를 못 들은 척하고 말 것인가.

불의로써 정복한 자는 자신의 불의의 압력으로 반드시 망하고 만다는 사실을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왔다. 양심인사들을 투옥하고 체포와 고문, 학살과 억압으로 사실을 은폐하려는 원시적 정책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간다의 아민, 히틀러, 혹은 로마의 네로를 예로 들 수 있겠으나, 그들 독재자들을 직접 알지 못하는 우리는 이 나라의 현 지배체제의 억압 속에 희망마저 좌절된 채로 그대로 남아 있다.  

강을 건너 공포의 도시로부터 빠져 나가려는 저 시민들을 보면서, 나는 그들과 패전국을 도망치는 피난민들 사이에서 한치의 차이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현역장교들조차 이 비극이 몰고 온 무시무시한 인명손실에 분노와 구토로 몸서리치고 있었다.  

데모군중의 시위차량을 지휘했던 모 대학생은 사살된 사람이 1천명, 교통사고·대검 등에 의해 죽은 사람이 8백명 가량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체 수를 확인해 보지 않은 이상 이 숫자를 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병원을 꽉 메운 부상자들의 대부분이 죽었거나 피와 의약품의 부족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니까 그 숫자는 더 불어날 것이 틀림없다. 한 종교단체는 사상자 수가 약2천명 이상이라고 말했다. 총알에 누더기가 되고 동포의 피로 얼룩진 민중의 응어리진 원한이 서린 저 깃폭을 보라. 뉘라서 이 응어리진 분노를 풀어 줄 것인가.

눈을 감으면 아직도 떠오른다, 저 찢기고 누더기가 된 깃폭이.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끊임없이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