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은 왜 몽골 황제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였나?
by Silla on 2022-02-26
한 나라의 왕이 다른 제국의 황제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는 얘기는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고려사절요에는 왕씨고려의 충렬왕이 원(元)의 황제 앞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사건의 앞뒤를 한번 조사해 보았다.
충렬왕은 1236년에 태어나 1260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당시 왕고는 몽골의 침략을 받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상태였는데 1270년에 가서야 개경으로 다시 되돌아 왔다. 충렬왕은 1272년에 몽골로 들어가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1274년에 결혼하였다. 결혼한 그 해에 아버지인 원종이 죽자 왕고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의 위세에 눌려 왕으로서의 권위를 온전히 세울 수 없었다.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죽자 몽골에 살던 그녀의 아들 충선왕이 돌아와 충렬왕의 신임을 받던 신하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이듬해인 1298년에는 아버지인 충렬왕을 내쫓고 잠시 왕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충선왕은 7개월 뒤 왕위를 다시 충렬왕에게 돌려주고 몽골로 돌아갔다. 이 충선왕은 1308년 충렬왕이 죽자 왕위를 이어 받았다.
충렬왕의 재위시기에는 쿠빌라이 칸의 일본 원정이 두 차례나 있었다. 1274년과 1281년에 있었던 이 원정에 충렬왕은 많은 인원과 물자를 제공해야 했다. 또 수시로 처녀를 요구하는 원나라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앞뒤의 정황을 살펴보면 충렬왕의 역할은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버텨내기 힘든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충렬왕은 음주와 가무를 즐긴 것이 아닐까?
어쨌든 충렬왕은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1288 고려사절요
○ 내전(內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왕이 자주 일어나 춤을 추니 공주(제국대장공주)가 이를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 3월에 좌우익 만호 나유ㆍ한희유ㆍ장순룡 등이 내전에서 왕에게 향연을 베풀었는데, 술이 얼근해지자 왕이 일어나서 춤을 추고 손뼉을 치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다.

1297 고려사절요
○ 봄 정월 초하루 갑자에 왕이 신정을 하례하고 나서 전에 올라가 황제를 모시고 연회에 참석하였다.
○ 황제가 왕에게 어안(御鞍)을 내리고, 또 시종하는 신하 10명에게도 안장을 내렸다.
○ 진왕이 그 나라로 가려 하니 황제가 그 저택에 행차하여 그를 전별했는데, 왕이 공주와 함께 연회에 참석하였다. 술이 얼근하게 되자 왕은 일어나 춤추고 공주는 노래하였다.
○ 2월에 황제가 성남(城南)에 행차하여 사냥하는 것을 관람하였는데, 왕이 호종하여 아뢰기를, “신의 선신(先臣, 원종) 식(禃)이 기미년에 세자로서 조회하러 들어왔을 때에 세조(쿠빌라이 칸) 황제께서 남방을 정벌하고 돌아오셨는데, 선신이 변량(汴梁 북송의 도읍지)의 옛 도읍터에서 맞이하여 뵈니, 세조께서 기뻐하여 칭찬하시고 사랑하심이 날로 더 많아졌으며, 소신(小臣)에 이르러 공주로 아내를 삼게 하시고 대대로 동쪽의 제후국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라건대, 기미년(1259년, 원종이 몽골에 들어간 해) 이후의 포로된 자와 유민으로서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에 있는 자를 모두 본국으로 데려가게 해 주소서." 하니,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왕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절하고 사례하였다.

1300 고려사절요
○ 여름 4월에 동지밀직사사 설경성(薛景成)을 원 나라에 보내어 황태후(皇太后)의 상을 조문하였다.
○ 무오일에 왕이 조문하기 위하여 원 나라에 갔다.
○ 6월 임자일에 왕이 상도(上都 원나라의 수도)에 이르니, 황제(성종, 쿠빌라이의 손자)가 '지손연(只孫宴)'을 크게 베풀었다. 지손이란 중국말로 '빛깔'이라는 뜻인데, 연회에 나오는 사람이 의관을 모두 같은 빛깔로 하는 것이다. 황제가 왕에게 명하여 연회에 참석하였는데, 왕은 여러 왕과 부마들 가운데서 좌석의 차례가 넷째 번이었고 총애가 특별하였다.
○ 왕이 양 2백 두와 술 2백 합(榼)으로 황제에게 축수를 올렸다. 다음날 또 대궐에 나아가 ‘부두연(扶頭宴)’을 베풀었는데, 황제가 고려의 노래를 부르라 하니 왕이 대장군 송방영(宋邦英)과 송영(宋英) 등에게 쌍연곡(雙鷰曲)을 부르게 하였다. 전왕(前王, 충선왕)은 단판(檀板 박자를 맞추는 악기 이름)을 잡고 왕은 일어나 춤추며 헌수하니, 황제와 황후가 기뻐하였다.
○ 가을 7월에 왕이 대궐에 나아가 처녀 2명과 환관 3명을 바치고, 또 처녀 1명을 승상(丞相) 완택(完澤)에게 시집보냈다.
○ 황제가 명을 내려, 우리나라에서 요청한 풍속에 관한 여러 가지는 그대로 행하도록 할 것을 허락하였다. 왕에게 활ㆍ화살ㆍ해청(海靑 매)ㆍ요자(鷂子 새매 새끼) 및 금으로 장식한 안장 2벌을 주고, 시종한 신하들에게는 금단(金段)을 겉감 안감 끼워서 3백 36필씩과 활ㆍ칼 30개씩과 안장 20벌을 주었다. 황후는 왕에게 옷 3벌을 주었다.
○ 임진일에 왕이 상도(上都)를 출발하였다.

'술이 얼근해지자 왕이 일어나서 춤을 추고 손뼉을 치며 스스로 노래를 불렀다.'
이때 충렬왕의 가슴 속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