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60.07_ 의자왕은 왜 망했을까?
by Silla on 2022-02-27
의자왕의 실정을 말할 때 흔히 삼국사기의 이 기록을 언급한다.

656-03 삼국사기(1145) 백제본기 의자왕 16년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살펴보았는데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졌다'는 부분은 세월이 가면서 이야기가 부풀려진다.

삼국유사(1281) 권1
백제고기(百濟古記)에 이르기를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는 강물과 만난다. 서로 전하여 내려오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서로 일컬어 말하기를 ‘차라리 자진을 할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하여 서로 이끌고 이곳에 이르러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墮死岩)이라 한다.”라고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인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음은 당사(唐史)에 명백히 쓰여 있다.

낙화암(落花岩) - 김흔(1448-1492)
扶餘王氣日衰替 부여의 왕기가 날로 쇠미해지니
月滿當虧枉黷筮 달도 차면 기우는 것 애꿎은 점장이만 죽였구나
鼓角聲殷炭峴動 은은한 고각 소리 탄현을 뒤흔들고
樓船影壓白江蔽 누선 그림자가 백마강을 덮었네
藥石忠言口初苦 약석 같은 충신의 말이 처음은 입에 써서
宴安鴆毒臍終噬 호강만 누리더니 끝내는 후회막급
三千歌舞委沙塵 삼천의 노래와 춤 모래에 몸을 맡겨
紅殘玉碎隨水逝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

이런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삼천궁녀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지금도 부여에서는 매년 삼천궁녀진혼제가 열리고 있다.
원래 '삼천궁녀'란 말은 왕의 대규모 축첩의 희생이 된 가련한 여인을 뜻하는 말로 싯귀에도 자주 쓰였다. 예를 들면, 당(唐)나라 시인 백락청의 시에 '꽃같이 단장한 삼천 궁녀 얼굴들, 몇이나 될까 봄 바람 속에 눈물 흔적 없는 이는 (三千宮女如花面 幾箇春風無淚痕)'라는 싯구를 들 수 있다. 많은 군사를 가리켜 '백만대군'이라 하듯이 일종의 관용구였던 셈이다.
물론 의자왕이 축첩을 좀 심하게 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기록도 있다.

657-01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7년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주었다.

(여기서 좌평은 백제의 최고관등을 말하고 식읍은 그곳의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 자기 수입으로 삼는 지역을 말한다. 이 기록은 왕과 그의 아들들이 계급지배의 열매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그래서 백제왕조의 멸망원인을 이러한 지배세력 내부의 분열에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백제의 패망에 대해서는 연속극에 어울리는 설명도 있다.
'642년 의자왕은 장군 윤충으로 하여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한다. 당시 대야성의 도독은 김품석이었는데 그의 아내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일전에 김품석은 아랫사람인 검일의 예쁜 아내를 빼앗은 적이 있는데, 이 일로 인해 검일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마침 백제군이 쳐들어 오자 검일은 몰래 식량 창고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식량이 떨어진 신라군은 항복하였고 김품석과 그의 아내도 죽었다. 이때 김품석과 그의 아내가 백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고도 하고 김품석이 처자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도 한다. 백제군은 김품석과 그의 아내의 시신을 가져갔는데 훗날 이 유골들은 김유신에게 포로가 된 백제군과 교환하게 된다. 이 일로 김춘추는 큰 충격을 받았고 딸의 복수를 도모하기 위해 고려에 사신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원병을 요청하는 김춘추에게 고려의 보장왕은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죽령 이북의 땅을 돌려주면 군대를 보내주겠다고 한다. 김춘추가 이를 거부하자 보장왕은 그를 가두어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이 김유신 장군으로 하여금 군대를 출동시키게 하였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고려는 김춘추를 풀어주었다. 이때 김춘추가 토끼와 거북 이야기에서 착상을 얻어 보장왕을 속이고 탈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쨋든 김춘추는 고려의 지원을 얻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난 후, 김춘추는 다시 당나라에 백제정벌을 위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성사되지 못하였다가 10여 년 후 다시 요청하였을 때는 성공하게 된다. 그래서 660년 마침내 백제를 정벌하였다. 이 전쟁에는 김춘추의 아들인 김법민도 참전하였는데,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이 항복해 오자 누이를 죽인 데 대한 화풀이를 그에게 하였다. 그리고 대야성 싸움에서 신라를 배신했던 검일은 신라군에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그런데 당나라가 정작 멸망시키고 싶었던 나라는 고려였다. 당나라가 백제를 정벌한 것도 신라의 요청이 있기도 했지만 고려정벌을 위한 전단계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나라는 신라가 원하는 백제정벌에 협력해 주는 댓가로 자신들의 고려정벌에 신라가 협력해 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백제에 이어 고려도 마침내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망하게 된다.'
요약하면, 김품석이 부하의 아내를 빼앗은 일이 점점 커지고 커져서 나중에는 백제와 고려가 멸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 설명에 의하면 의자왕의 실정은 큰 의미가 없다.

의자왕의 실정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취리산 맹세문에 집약되어 있다.
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꺾은 당나라는 신라와 백제를 화해시키기 위해 665년 칙사 유인원을 보내어 신라 문무왕과 웅진 도독 부여융으로 하여금 웅진의 취리산에 올라 맹세를 하게 한다.
아래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그 맹세문의 첫 부분이다.

665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05년
曰徃者百濟先王迷於逆順不敦鄰好不睦親姻結託髙句麗交通倭國兵爲殘暴侵削新羅剽邑屠城略無寧歳
지난날 백제의 앞선 왕은 반역과 순종에 헤매어 이웃과 사이좋게 지내는데 힘쓰지 못하였고 친척과 사돈간에도 화목하지 못하였다. 고구려에 기대고 왜국(倭國)과도 서로 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하면서 신라를 침략해 해를 끼쳐 고을을 위협하고 성을 도륙(屠戮)하여 편안한 때가 거의 없었다.

여기서 '백제의 앞선 왕'은 부여융의 아버지인 의자왕을 말한다.
이 맹세문에 나오는 의자왕의 실정은 아래의 세 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1) 신라를 자주 침략하여 해를 끼쳤다.
(2) 친인척과 화목하지 못하였다.
(3) 고려 및 왜(倭)와 공조하였다.

'(1) 신라를 자주 침략하여 해를 끼쳤다.'의 예는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을 들자면 대야성 공격을 들 수 있다.

642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02년,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품석이 처자와 함께 나와 항복하자 윤충은 모두 죽이고 그 머리를 베어 서울에 전달하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의 주·현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왕은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이 사건은 신라에 큰 충격을 준 듯하다.

642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11년,
백제 장군 윤충이 군사를 이끌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도독 이찬 품석과 사지 죽죽·용석 등이 죽었다. 처음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김춘추의 딸이었다. 김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 하고는, 곧 선덕왕을 찾아뵙고 ‘신이 고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 말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2) 친인척과 화목하지 못하였다.'는 일본서기에 이를 암시해주는 기록이 있다.

642-02 일본서기 황극천황 원년
(641년 서명천황이 백제궁에서 죽자 백제는 조문사를 파견하였다.) 아담산배련비라부(阿曇山背連比羅夫), 초벽실사반금(草壁吉士磐金), 왜한서직현(倭漢書直縣)을 백제 조문사의 처소에 보내어 그 쪽 소식을 물었다. 조문사가 대답하기를 “백제국왕이 저희들에게 ‘새상(塞上)은 항상 나쁜 짓을 하므로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주기를 청하더라도 일본 조정에서 허락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제 조문사의 종자(從者) 등이 “지난 해 11월 대좌평 지적(智積)이 죽었습니다. 또 백제 사신이 곤륜(崑崙)의 사신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금년 정월에 국왕의 어머니가 죽었고, 또 아우 왕자의 아들 교기(翹岐)와 누이동생 4명, 내좌평 기미(岐味) 그리고 이름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제의 왕들은 이전에도 친인척과 갈등을 빚은 사실이 기록에 여러 차례 나와 있으므로 의자왕이 친족 및 인척과 화목하지 못하였다는 이 이야기도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3) 고려 및 왜(倭)와 공조하였다.'도 사서 기록으로 충분히 뒷받침이 된다.

631-03 일본서기 서명천황 03년
초하루 백제왕 의자가 왕자 풍장(豐章 부여풍)을 들여 보내어 볼모로 삼았다.
(의자왕은 641년에 왕이 되었으므로 이 기록은 연도를 잘못 표기한 거 같다.)

643-11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03년
왕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다. 그 목적은 신라의 당항성을 빼앗아 그들이 당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는 것이었다. 왕은 마침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왕 덕만(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니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시켰다.

653-08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13년
왕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여기서 '(3) 고려 및 왜(倭)와 공조하였다.'는 실정이라고 하기 어렵다.
어떤 왕조든 자신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왕조와 협력관계를 맺는 것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신라도 김춘추가 고려에 가서 원병을 요청한 적이 있고 왜(倭)를 방문하여 화친을 도모한 적이 있다.
이것이 취리산 맹세문에서 실정의 한 항목으로 언급된 것은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만약 백강구 전투에서 왜(倭)가 승리하고 그 여세를 몰아 신라까지 병합하였다면 취리산 맹세문은 그 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의자왕의 자리에 무열왕이 들어가 있을 것이고 왜(倭)의 자리에는 당(唐)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의자왕의 죄는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따져들어가 보면 의자왕의 진짜 실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600년경의 세계지도

의자왕은 641년 왕위에 올라 당나라 태종으로부터 '주국(柱國) 대방군왕 백제왕'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652년까지 6차례나 조공을 한 것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아버지 무왕때부터 이어진 것으로 무왕도 당나라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이라는 벼슬을 받고 13차례 조공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의자왕은 무왕에 이어 신라에 대한 압박을 지속하였는데, 642년에는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에 신라는 고려의 도움을 얻고자 김춘추를 고려로 보냈으나 거절당하고 만다. 오히려 고려는 643년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
당시 고려는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권력을 막 장악했던 때였다. 그런데 이 일은 당나라가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들에게 꾸준히 조공을 해 오며 우호관계를 다진 왕이 신하에게 살해당했는데도 이를 묵과한다면 천자국으로서의 위신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쪽으로부터 당나라의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는 남쪽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에도 백제가 수나라를 부추겨 고려를 침략하게 한 적이 있고 신라는 고려와 수나라가 전쟁을 하는 틈을 타 고려의 땅을 빼앗아 간 적이 있었다. 신라와 백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고려는 신라보다 더 위협적인 백제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고려와의 화친에 실패한 신라는 647년 김춘추를 왜(倭)에 보내어 화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왜(倭)는 전통적으로 백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도 건너와 머무르는 등 백제인들이 곳곳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신라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결국 653년 왜(倭)는 백제와의 우호관계를 재확인하였다.
신라는 648년 김춘추를 당나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백제정벌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당나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게 된다. 당나라로서는 고려를 압박하는데 같이 협력해 줄 나라가 필요했는데 백제가 이미 고려와 화친을 맺은 상황이라 신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백제는 653년 이후로 당나라에 조공을 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당나라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서 동북아시아는 당나라-신라의 연대와 고려-백제-왜(倭)의 연대로 갈라지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의자왕의 외교는 꽤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660년 나당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백제는 혼자 있었다.
고려는 한 명의 지원병도 보내주지 않았고 왜(倭)는 백제가 망하고 3년이 지난 뒤에야 구원군을 보내주었는데 이마저 완패하고 말았다.
요컨대, 의자왕의 실정은 잘못된 외교노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모음: http://qindex.info/d.php?c=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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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만약 중국이 당나라가 아니고 남북조시대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의자왕 정도의 실정은 이전에도 항상 있어왔다.
유독 의자왕의 실정이 패망으로 이어진 것은 다른 데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