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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던 倭5王(413~502) 이후 倭는 중국에 대해 '해 뜨는 나라'라는 자부심을 세우기 시작했고, 530년에 있었던 임나 통치의 위기 이후에는 반도에 설치했던 간섭 기구의 명칭을 그 자부심을 적용한 日本府로 바꾸었다가, 당나라가 반도를 점령하고 열도에까지 위협을 가하자 670년에 아예 그 명칭으로 국호를 바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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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 ~ 0502 倭5王
왜왕의 왕위계승은 찬(讚,贊)→진(珍,彌)↓제(濟)↓흥(興)→무(武)로 이어졌는데 찬(讚)→진(珍)과 흥(興)→무(武)는 형제관계이고 진(珍,彌)↓제(濟)↓흥(興)은 부자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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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8~0478 宋書(488)
讚이 죽자 아우 珍이 왕이 되어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스스로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 불렀다. 興이 죽자 아우인 武가 즉위하여 사지절 도독 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倭國王을 자칭하였다. ▐ 478년까지도 중국에 조공하며 스스로를 倭國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사건에 나오는 日本, 天皇 그리고 中國은 모두 후대에 고쳐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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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 日本書紀(720)
新羅王은 高麗軍이 모두 新羅 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高麗王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 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任那王이 膳臣 반구, 吉備臣 소리, 難波吉士 적목자에게 권하여 新羅를 구해주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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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4 日本書紀(720) 日本府
▐ 일본서기에서 日本府가 등장하는 가장 앞선 사건이다. 日本府는 이 사건에서 1회 언급되었고 541년 이후의 사건에서 34회 언급되었다. 왜가 반도에 진출하여 간섭한 것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200여년에 달하나 日本府가 집중적으로 언급된 것은 마지막 20여년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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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0530 近江毛野臣
529년에 왜는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보내 신라에 망한 남가라와 녹기탄을 다시 세워 임나에 합치게 하려 했다. 그러나 530년에 임나의 사신이 왜에 와서 모야신의 폭정을 폭로하자 왜는 모야신을 불러들였다. ▐ 임나에서 있었던 모야신의 활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日本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日本府란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다면 464년 사건에 나오는 日本府는 후대에 가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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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544 임나 재건 논의
541년 4월에 임나를 재건하라는 천황의 조서가 백제로 오자 임나의 여러 나라들이 백제에 모여 방안을 논의하였다. 7월에는 백제 성왕이 신라와 화해하려는 임나의 움직임을 듣고 이를 꾸짖었다. 544년 3월에 성왕은 임나에 파견된 몇몇 사람의 소환을 요구하는 표문을 올렸다. 11월에 천황의 조서가 오자 성왕은 다시 임나의 여러 나라를 불러 임나 재건의 방안을 논의하였다. ▐ 이때부터 日本府가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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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544 임나 재건 논의
▐ 倭國의 국호가 日本으로 바뀐 것은 670년의 일이니 왜가 562년 이전에 반도에 설치한 간섭 기구를 日本府라 표기한 것은 후대에 가필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고쳐쓰려면 전부 다 고쳤썼을텐데, 일본서기에서 日本府가 언급되는 35회 중 34회가 541년 이후의 사건에서 나타나고 그 이전의 사건에서는 간섭 기구를 日本府라 하지 않았다. 이것은 日本府가 후대에 고쳐써진 명칭이 아니라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명칭일 가능성을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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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1~0552 日本書紀(720) 日本府
任那日本府(5)┆安羅日本府(2)┆日本府卿(3)┆日本府臣(3)┆任那日本府吉備臣┆日本府印岐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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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隋書(636)
왜왕 多利思比孤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아뢰길 "듣자오니 바다 서쪽 보살천자께서 불법을 다시 일으키신다 하니 사신을 보내 조배드립니다. 아울러 중 수십 명이 여기 와 불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였다. 그 국서에는 '해 뜨는 곳 천자가 해 지는 곳 천자에게 글을 보내오. 별일 없으신가?' 어쩌고 저쩌고 하였다. 황제가 글을 보고 언짢아 홍려경에게 "오랑캐가 보낸 글이 무례하구나. 다시는 이런 말이 들리지 않게 하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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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隋書(636)
▐ 日本이란 명칭은 中國에 대해 대등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는 격을 지니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삼한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는 우월한 존재라는 느낌을 가지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530년 이후 임나 통치에 위기가 왔을 때 통치 기구의 명칭을 日本府로 바꾸었다면, 그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훗날 당나라가 반도를 점령하고 열도에까지 위협을 가했을 때 국호를 日本으로 바꾼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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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 舊唐書(945)
日本國者 倭國之別種也 以其國在日邊 故以日本為名 或曰 倭國自惡其名不雅 改為日本 或云 日本舊小國 並倭國之地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해 뜨는 바닷가에 있다고 해서 일본을 국호로 하였다고도 하고, 왜국이라는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일본으로 고쳤다고도 하며, 일본은 원래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을 병합하였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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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 舊唐書(945)
▐ '或云日本舊小國並倭國之地 일본은 원래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을 병합하였다고도 한다'는 부분은 '倭國이 반도에 설치하였던 日本府란 통치기구에서 이름을 따와 日本으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이야기의 와전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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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 舊唐書(945)
▐ 穢, 貉 그리고 倭는 모두 중국인들이 붙여준 명칭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貊人은 나라 이름을 高句麗라 하였고 倭人도 나라 이름을 日本으로 바꾸었다. 韓은 낙랑 한씨의 성씨를 따라 붙여진 명칭이므로 부정적인 의미가 없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나라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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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 新唐書(1060)
後稍習夏音 惡倭名 更號日本 使者自言 國近日所出 以為名 或云日本乃小國 為倭所並 故冒其號 나중에 점점 중국의 소리를 익히고는 왜라는 이름을 싫어하여 일본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사신이 말하기로는 나라가 해 뜨는 곳에 가까워 그렇게 이름지었다고도 하고 일본은 원래 작은 나라였는데 왜를 병합하면서 국호가 되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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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0 三國史記(1145)
倭國更号日夲 自言近日所出 以爲名 왜국이 이름을 바꾸어 日本이라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해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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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78 禰軍 墓誌銘
지난 顯慶 5년 관군이 본번을 평정하던 날 조짐을 보고 변화를 알아 검을 잡고 귀의할 곳을 알았으니, 由余가 戎에서 나온 것과 유사했고 金磾가 漢으로 들어온 것과 같았다. 성상께서 기뻐 찬탄하며 영화로운 반열로 발탁하니 우무위·산천부·절충도위를 제수했다. 이때 日本의 남은 무리가 扶桑에 의거하여 징벌을 필해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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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東都成立記·海東安弘記
① 日本 日夲 ② 中華 中華 ③ 吳越 吳越 ④ 托羅 乇羅 ⑤ 鷹逰 鷹逰 ⑥ 靺鞨 靺鞨 ⑦ 丹國 丹國 ⑧ 女犾 女真 ⑨ 獩㹮 穢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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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1 東都成立記·海東安弘記
▐ 안홍은 수나라에 유학을 갔다가 576년 또는 605년에 돌아왔고 선덕여왕은 647년에 죽었으니 동도성립기는 분명 670년 보다 훨씬 이전에 편찬되었다. 그 동도성립기에 일본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으니, 일본이라는 말는 670년 이전부터 신라에서 사용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동도성립기에는 倭라고 되어 있었지만 1281년에 삼국유사를 편찬하면서 당대에 사용되던 말인 日本으로 바꾸어 기록했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유사에는 9한의 하나인 여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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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那日本府(みまなにほん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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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임나일본부설 폐기?… 속내 여전
일본 역사학계가 임나일본부라는 용어를 폐기하는 데 동의한 것이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주장은 지금까지 폐기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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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역사공동위 결론… 日 "임나일본부설 근거없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는 이틀간 도쿄에서 합동토론회를 갖고 한일 간 쟁점이었던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상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측 학자들은 그동안 주장해 온 임나일본부설은 일부 타당치 않다고 인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광 교수는 “임나일본부 존재 자체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이었다는 데 동의하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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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역사공동위 결론… 日 "임나일본부설 근거없다"
▐ 임나일본부설(X) 임나경영설(O)┆일본서기에 나오는 '일본부'라는 말은 임나가 존재하던 당시에는 없었던 말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倭가 임나를 지배하고 통치하였다는 '임나경영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 학계가 '임나경영설'을 폐기한 적은 없다. '임나일본부'라는 용어가 잘못되었다고 인정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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