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語」
微子去之 箕子為之奴 比干諫而死
孔子曰 殷有三仁焉
「尙書大傳」
武王勝殷 釋箕子囚
箕子不忍周之釋 走之朝鮮
武王聞之 因以朝鮮封之
箕子既受周之封 不得無臣禮 故於十三祀來朝
「史記」
武王既克殷 訪問箕子
箕子対曰 天乃錫禹鴻範九等 常倫所序
「漢書」
殷道衰 箕子去之朝鮮
敎其民以禮義 田蠶織作 樂浪朝鮮民犯禁八條
「魏略」 箕子之後朝鮮侯
은나라가 주왕의 실정으로 주나라 무왕에 의해 망하던 시기에 은나라에 기자가 있었습니다. 논어에는 당시 주왕과 불화를 겪던 기자가 노비로 전락했다고만 되어 있는데, 연나라의 위만이 조선으로 도망가 왕이 된 이후 기자 또한 조선으로 달아났고 그러자 무왕이 조선에 봉했다는 이야기가 상서대전에 추가되었습니다.
이후 유학을 숭상하는 한나라의 분위기 속에서 기자가 홍범구등을 무왕에게 전했다는 이야기가 사기에 수록되었고,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병합한 후에는 위만조선의 범금8조도 기자가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한서에 수록되었습니다. 이어서 위만에 의해 멸망당한 조선의 왕조가 기자의 후손이었다는 이야기까지 만들어져 위략에 수록되었죠.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낙랑의 명망 가문은 기자의 후손을 자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자 이야기는 대부분 논어 이후 만들어진 것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