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國史記」 百濟
樂浪使靺鞨襲破瓶山柵
樂浪來侵 焚慰禮城
王欲襲樂浪牛頭山城 至臼谷
王爲樂浪大守所遣刺客賊害薨
「三國史記」 新羅
樂浪兵至 國金城數重
樂浪謂内虚 求攻金城甚急
樂浪犯北邊 攻䧟朶山城
髙句麗王無恤 襲樂浪滅之
「三國史記」 髙句麗
王子好童遊於沃沮
樂浪王 崔理 遂同歸 以女妻之
好童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好童勸王襲樂浪
崔理 遂殺女子 出降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네 개의 군을 설치할 때, 예 지역에는 임둔군을 설치했다가 이내 폐지하고 15개 현 중 7개 현만 낙랑군으로 합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8개 현도 낙랑군과 친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하며 춘천에 있던 소국을 구심점으로 삼았던 듯합니다. 이 소국은 주변 나라와의 관계에서 낙랑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습니다.
백제의 북쪽에 있던 말갈을 동원하여 백제를 자주 침공하던 백제 동쪽의 낙랑이 바로 이 낙랑이며, 신라의 북쪽에서 여러 차례 신라를 침공하다 고려에 망해 5천명이 신라로 투항한 낙랑도 바로 이 낙랑이고, 고려의 호동왕자에게 딸을 시집보냈다가 고려의 침공을 받아 망한 낙랑공주의 낙랑도 바로 이 낙랑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