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城
by Silla on 2024-12-30
경주 지역에 있었던 신라 왕성으로, 정확한 위치는 미상. 금성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초기 기사와 『구당서(舊唐書)』 및 『신당서(新唐書)』의 신라전 등 중국 역사서에 나타나 있다. 먼저 중국 사서에는 신라가 금성에 도읍한다거나(『翰苑』 蕃夷部 新羅 注 所引 『括地志』), 왕이 거처하는 곳을 금성이라 하고 둘레가 7~8리, 위병(衛兵)이 3,000인이라 하여(『구당서』 및 『신당서』의 신라전), 금성을 신라의 도성 내지 왕이 거처하는 구체적인 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둘레 7~8리를 당척(唐尺)으로 파악했을 때 약 4,320m 정도가 되며, 이러한 길이는 왕도 전체의 둘레와는 차이가 있고 월성 둘레의 2배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금성을 월성과 인근 핵심 구역을 포함한 만월성(滿月城)과 같은 실체로 이해하기도 한다. 어쨌든 중국 역사서나 「경주 숭복사비(崇福寺碑)」와 같은 통일기 금석문에 보이는 금성은 왕도의 명칭 내지 『삼국사기』 지리지의 만월성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혁거세 21년(기원전 37) 경성(京城)을 쌓고 금성이라 하였으며, 동 26년(기원전 32)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이후 금성은 소지마립간 22년(500)까지 모두 26차례 등장하며, 그 후에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이것을 구체적인 궁성(宮城)으로 간주했으며, 금성 동남에 월성을 쌓았다고 해서 금성의 위치를 월성 서북쪽이라고 하였다. 사실 초기 기사의 금성은 경성으로 나타나 있고 그 실체가 불분명한 점이 많지만, 지리지에서처럼 월성 이전의 구체적인 궁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慶州府) 고적조(古跡條)에는 ‘금성정(金城井)’과 ‘금성(金城)’의 항목이 따로 있는데, “금성정(金城井)은 부내(府內)에 있으며 신라 시조 때에 용이 이 우물에 나타났다.”라고 되어 있고, “금성(金城)은 본부 동쪽 4리에 있으며 신라 시조 혁거세 때에 쌓은 토성(土城)으로 둘레가 2천 4백 7척”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금성은 남고루(南古壘)로 알려진, 조선 시대 경주부성 동쪽에 있던 고려 시대 읍성의 흔적을 지칭할 가능성이 있으며, 금성정의 경우 그것이 부내(府內)에 있다고 한 점도 흥미롭다. 금성의 구체적인 비정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지만(전덕재: 2009, 170~172쪽, 박방룡: 2013, 177~144쪽, 정연식: 2016, 40~44쪽), 월성과 같이 분명한 유지(遺址)를 특정하지는 못하고 있다.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박방룡, 2013, 『신라 도성』, 학연문화사
정연식, 2016, 「신라 금성(金城)의 위치 고증」, 『한국사연구』 173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