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城
by Silla on 2024-12-30
신라 대부분 시기의 궁성(宮城)으로 현재의 경주 월성(사적 제16호). 본서 신라본기에 의하면 월성은 원래 호공(瓠公)의 집으로 탈해(脫解)가 길지(吉地)라고 여겨 빼앗아 거주한 곳이다. 파사이사금 22년(101) 성을 쌓아 월성이라 했으며 왕이 옮겨가 살았다. 자비마립간 18년(475)에는 왕이 명활성으로 이거했으며, 소지마립간 9년(487) 월성을 수리[葺]하고 이듬해 다시 월성으로 돌아왔다. 그 뒤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은 기본적으로 월성에 기거하였다. 본서 지리지에는 월성을 재성(在城)이라고도 했고 둘레가 1,023보이며,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는데 둘레가 1,838보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신월성과 만월성의 관계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쨌든 월성 혹은 신월성의 유지(遺址)는 현재까지 비교적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는데, 유적으로서의 ‘경주 월성(사적 제16호)’이 바로 그것이다. 경주 월성은 경주 시내 남쪽, 남천(문천) 가에 위치한 토성(土城) 유적이다. 울산 방면에서 흘러온 남천이 북류하다가 월성의 구릉에 부딪쳐 서쪽으로 꺾어져 흐르는데, 그것을 감싸듯이 초승달 모양으로 되어 있다. 반달 모양으로 인식되어 반월성(半月城)이라고도 불렀다. 성벽의 바깥 둘레는 2,340m 정도이다.
경주 월성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는 1980년 무렵부터 꾸준히 이루어졌는데, 2014년부터는 성 내부와 성벽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현재까지의 잠정적인 조사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까지 월성에서 출토된 가장 이른 시기의 신라 유물은 4세기의 것으로 알려졌다. 본서에 나오는 월성의 축조 연도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월성이 신라 정치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 것이 대체로 그 무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소지마립간이 월성을 수리했다고 하는 5세기에는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이 축조되고 그 북쪽으로 수혈 해자가 개착되었다. 셋째,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는 수혈 해자가 석축 해자로 개축되었는데, 이는 통일 이후 해자의 군사적 기능과 함께 조경적인 요소가 중시되었음을 시사한다(李相俊, 1997; 박성현, 2018). 또 신라본기에 의하면 통일 직후인 문무왕 14년(674)에는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다고 하여 월지(月池)를 조성하였으며, 동 19년(679)에는 동궁(東宮)을 처음 지었다. 그리고 월성 해자 북편에 대한 조사에서는 제의용으로 보이는 건물지가 확인되어 궁역이 월성 북쪽 방면으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리지에 나오는 만월성은 이처럼 통일기에 확대된 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전덕재: 2009, 226~228쪽, 박방룡: 2013, 186쪽).
〈참고문헌〉
전덕재, 2009, 『신라 왕경의 역사』, 새문사
박방룡, 2013, 『신라 도성』, 학연문화사
李相俊, 1997, 「慶州 月城의 變遷過程에 대한 小考」, 『嶺南考古學』 21
박성현, 2018, 「월성 해자 목간으로 본 신라의 왕경」, 『목간과 문자』 20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