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과 천군동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산성에 비정(比定)된다. 명활성은 본서 신라본기에 6차례, 제사지와 지리지에 각각 1차례, 김유신전에 1차례 등장하며, 『삼국유사』 등에도 나타나 있다. 신라본기에는 명활성이 실성이사금 4년(405)과 눌지마립간 15년(431)에 왜병(倭兵)의 침입과 관련하여 처음 등장하며, 자비마립간 16년(473)에는 성을 수리[葺]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동왕 18년 명활성으로 이거하여 소지마립간 10년(488) 다시 월성으로 이거할 때까지 궁성(宮城)으로 사용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진흥왕 15년(554)과 진평왕 15년(593)에도 각각 성을 수축(修築) 또는 개축(改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김유신전에는 선덕여왕 16년(647) 비담의 난 때 비담이 명활성에 주둔하여 월성에 진영을 둔 왕의 군대와 공방한 것으로 나온다. 그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慶州府) 산천(山川)조에 명활산이 부 동쪽 11리 지점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 대체로 현재의 흰등산(해발 268m)과 그 북쪽 봉우리(해발 253m), 그리고 그 서쪽의 장군봉(해발 204m) 일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토성과 석성이 모두 확인되었는데, 토성은 흰등산과 그 북쪽 봉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석성은 북쪽 봉우리와 서쪽의 장군봉, 그리고 그 사이의 북쪽 골짜기와 서남쪽 골짜기를 둘러싼 둘레 4.7km의 포곡식 산성이다. 양자의 관계에 대해서는 토성이 먼저 축조되어 사용되다가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박방룡, 2013, 55~58쪽, 64~69쪽).
문제는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쌓은 것이 언제인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1988년 북쪽 골짜기에 있는 명활성(석성)의 북문지 부근에서 「경주 명활성비(明活城碑)」가 발견되었다. 또 이로 인해 기존에 경주 월지(月池)의 호안 석축에서 발견된 비편 역시 같은 명활성비라는 것이 확인되었다(「경주 월지 출토 명활성비」). 여기에는 신미년(辛未年), 즉 진흥왕 12년(551)에 성을 축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에 따라 진흥왕 12년에, 사료에 나타난 것으로는 진흥왕 15년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파악되었다(박방룡, 2013, 69쪽). 명활성에 대한 조사로는 1988년 북문지 서쪽 구간에 대한 긴급 발굴조사가 있었고, 2012~2013년 북쪽 구간에 대한 시굴조사와 북문지에 대한 정밀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특히 최근의 조사에서는 이른 시기의 신라 석성 양식으로 알려진 반원형 치성(雉城), 즉 곡성(曲城)이 확인되었다. 이에 따라 석성으로의 개축이 삼년산성과 유사한 자비마립간 16년(473)에 이루어졌으며, 6세기에는 성의 수·개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명활성의 폐기 시점에 대해서는 북문지에서 출토된 토기와 기와의 연대에 의해 7세기 중엽으로 파악하였다(류환성, 36~51쪽).
〈참고문헌〉
박방룡, 2013, 『신라 도성』, 학연문화사
류환성, 2014, 「신라 수도의 방비 태세를 읽다 -경주 명활성 북문지유적-」, 『2013 한국고고학저널』, 국립문화재연구소바로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