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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23권, 정조 11년 4월 2일 기해 7번째기사 1787년 청 건륭(乾隆) 52년

삼방곡의 샛길에 대한 일에 대한 부교리 김이익의 상소문

부교리 김이익(金履翼)이 상소하기를,

"신이 관북(關北) 지방을 왕래하면서 천려 일득(千慮一得)이 없지 않았습니다. 저 북관은 실로 우리 나라의 큰 기업(基業)을 열었던 땅이므로 무릇 선휴(先庥)135) 를 유양(揄揚)하는 데 관계된 것은 거의 다 거행하였습니다. 다만 이 경흥(慶興)의 한 구역에만은 실로 양조(兩祖)의 성스러운 자취가 있습니다. 대개 적도(赤島)에서 적인(狄人)을 피하여 굴을 판 것은 익조 대왕(翼祖大王)이 실로 휴명(休命)에 응한 것이며, 적지(赤池)에서 용(龍)을 쏘아 왕업을 세운 것은 도조 대왕(度祖大王)에게 이징(異徵)이 있었던 것으로 아직도 기적(紀績)의 일을 상고할 수가 있으니 마땅히 유사로 하여금 적도(赤島)적지(赤池)에다가 비석을 세워 천양(闡揚)하는 도리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대저 북로(北路)의 관방(關防)이 다른 도(道)에 비해서 가장 나은 것은 단지 철령(鐵嶺)의 한 가닥 길만 있기 때문이니 혹시 옆에 지름길이라도 통하게 되면 그것은 깊은 걱정거리가 될 것인데, 어찌 미세하다는 이유로써 소홀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대개 안변부(安邊府)의 서쪽에 삼방곡(三防谷)이란 곳이 있는데 암벽으로 땅과 떨어져 있고 수목이 하늘까지 닿는데 어느 때에 좁은 지름길이 났는지 모르나 근래에는 큰길을 이루어서 남도(南道)와 북도(北道)의 장사꾼들이 편리함을 취해서 모두 이곳을 따라 가는데, 그 노정(路程)을 계산해 보면 몇 사(舍)의 수고를 넉넉히 덜 수가 있습니다. 만약 관방(關防)으로 논한다면 한때의 근심에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또 회양읍(淮陽邑)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처음으로 약수포(藥水浦) 변(邊)으로 하나의 지름길이 나 있어 곧장 금화(金化)의 경계로 통하는데, 갑자기 큰 거리처럼 되어 대충 점사(店舍)를 설치해서 길가는 나그네를 꾀어 들이고 있어 도망자들이 자기 집처럼 드나들며 스스로 골짜기 안의 마을을 만들어 이미 교화(敎化)가 미치는 범위 밖의 풍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길이 한 번 열린 뒤에 또 각역(各驛)에서 모두 피해를 입어, 고산(高山)에서 풍전(豊田)에 이르기까지 일곱 역이 길가에 늘어서 있어 힘을 내 노역(路役)을 담당해 왔는데, 지금은 길가는 사람이 모두 그쪽 지름길을 따라가므로 의지하여 살아갈 길이 점점 없어지게 되어 우속(郵屬)들이 도망하는 사고가 이로 말미암아서 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크게 엄명을 내리시어 빨리 이 길을 막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흥(慶興) 땅에 비석을 세우는 일은 실로 겨를이 없어서였다. 그대의 말은 유소(儒疏)보다 더욱 체모가 중하니, 그대로 시행하겠다. 그대가 문적(文蹟)을 기록해 내어 소대(召對)할 때 가지고 들어오라. 삼방곡(三防谷)의 샛길에 대한 일은 다만 관방(關防)이 허술해지는 것이 한심할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일곱 역이 치우치게 그 해를 입고 있다고 한다. 이중 하나만 있어도 오히려 막아야 하는데 더구나 그 폐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겠는가? 즉시 묘당으로 하여금 도백(道伯)에게 행회(行會)하여 즉시 상소의 말에 의거하여 거행한 뒤에 장계(狀啓)하게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42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정론-정론(政論) / 군사-통신(通信) / 교통-육운(陸運)

  • [註 135]
    선휴(先庥) : 조상의 음덕이나 보호.

○副校理金履翼上疏曰:

臣於關北之來往, 不無千慮之所得。 惟彼北關, 實開我朝洪基, 凡係先庥之揄揚, 幾盡擧行。 第玆一區慶興, 實有兩祖聖蹟。 蓋赤島之避狄陶穴, 翼祖大王實膺休命。 赤池之射龍肇業, 度祖大王爰有異徵, 而尙稽紀績之擧, 宜令攸司, 立碑島池之上, 以盡闡揚之道。 大抵北路之關防, 較諸道㝡勝者, 只有鐵嶺一條路故耳, 苟或傍通捷徑, 則其爲憂虞之深, 豈以微細, 而忽哉? 蓋自安邊府之西, 有三防谷者, 巖壁絶地, 樹木參天, 未知自何時開得細逕, 近成大路, 南適北賈取便, 而皆從此去。 計其程路, 優減數舍之勞。 若論關防, 不止一時之憂。 又自淮陽邑西十里許, 創出藥水浦邊一捷路, 直通金化之境, 遽成康莊之衢, 略設店舍, 誘入行旅, 逃踪逋跡, 歸之如家, 自作谷中之聚, 已成化外之俗。 此路一開之後, 又有各驛幷被之害, 自高山豐田七驛, 星羅道邊, 力供路役, 今因行客之皆從彼逕, 以致資活之漸無其路, 郵屬之逃故, 由是而相續。 伏望誕降嚴命, 亟防此路焉。

批曰: "慶興地建碑事, 實緣未遑。 爾言比儒疏尤有體重, 依施。 爾其錄出文蹟, 召對時持入。 三防谷間路事, 不惟關防之踈虞爲寒心, 從以七驛, 偏受其害云, 有一於此, 尙可防遏, 況爲弊至此? 卽令廟堂行會道伯, 使卽依疏辭擧行後狀啓。"


  • 【태백산사고본】 23책 23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45책 642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정론-정론(政論) / 군사-통신(通信) / 교통-육운(陸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