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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철의 ‘역사 거꾸로 읽기’] 튀르크 14개 왕조의 뿌리, 고구려 고(高)씨 왕가 

6세기 고대 튀르크인의 모습이 우리 선조와 닮은 까닭은? 

[구당서], 고구려 보장왕 가문과 유민이 서쪽 동돌궐로 갔다고 언급
일부는 몽골, 카자흐스탄 등을 거쳐 동로마제국까지 진출했을 수도


▎키르기스스탄의 이식쿨(Issyk-kul) 호수 전경. 오늘날 카자흐스탄·중국 등과 국경을 맞댄 키르기스스탄 일대는 튀르크 부족의 주된 활동 무대였다. / 사진:보물섬투어
오랜 세월 튀르크 민족은 여러 갈래로 존재해 왔다. 유럽의 입구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 러시아 남시베리아의 타타리스탄인, 그리고 1453년까지만 해도 동로마 비잔틴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을 중심으로 한 터키에 이르기까지. 또 그 동쪽의 튀르크멘인·우즈벡인·카자흐인, 그리고 동방에 가까운 키르기스스탄 등등.

튀르크인을 부르는 말은 이렇게 다양하지만, 이들은 모두 자신을 ‘오구즈 할크(Oguz Halk)’라고 부른다. ‘오구즈인 백성’이라는 뜻이다. 또 자신의 선조가 ‘모든 튀르크인의 선조 오구즈 칸’이라고 입을 모은다. 단적으로 투르크메니스탄은 수도 아시가바트에 오구즈 칸 동상을 세우고, 대통령궁 이름도 ‘오구즈 칸 쾨섹(궁전)’으로 지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오구즈 칸은 옛 소리로 ‘호(코)-구르칸’, 곧 옛 우리말 ‘고구려 칸’이 튀르크어화 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도시 ‘우르겐치’의 옛 소리가 ‘구르겐치’였던 것과 같은 이치다. 고대 튀르크어에서 ‘Kh/K+모음’ 음절은 현대로 오면서 ‘Kh/K’가 탈락한 채 모음 하나만 남은 형태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튀르크인들과 우리가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인가?

돌궐로 떠난 고구려 왕가와 유민들


▎고구려 사신(오른쪽 첫째·둘째)이 등장하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사마르칸트는 6세기 돌궐 칸국 때부터 존재했던 고도시다.
놀랄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에서 800년간 강력한 왕국으로 존재했던 고구려가 668년에 망했다. 마지막 국왕 보장왕(寶藏王) 고장(高藏)과 그의 가족, 속민은 당나라 수도 장안에 끌려갔다. 그러나 당나라와 신라에 점령된 고구려 땅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당 황제는 국권수복을 위해 일어난 고구려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고장을 ‘조선군왕(朝鮮郡王)’이란 이름 아래 망한 고국 안동(安東, 곧 고구려)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고국 땅에 오자마자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구려 변경지역 고을을 가리키는 말갈(靺鞨, ‘말 고을’의 이두식 표현)의 수령들과 내통했다. 그중 하나가 걸걸중상(乞乞仲象)과 그 아들 대조영이었다. 이 사실이 당나라에 알려지자 당은 고장을 송환해 장안에서 멀리 떨어진 오늘날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로 불리는 당시의 공주(鞏州)로 유배했고, 보장왕은 여기서 훗날 눈을 감는다. 당나라 정사를 기록한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이후 그는 동돌궐제국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힐리카간(頡利可汗) 무덤 옆에 묻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구당서] 고구려전(高句麗傳)은 수수께끼 같은 한 줄의 기록을 남겼다.

“(마지막 국왕인 보장왕) 고장(高藏)이 영순 년간(682~683년)에 죽자 고려의 옛 왕가와 유민(高麗舊戶)은 돌궐(突厥)과 말갈(靺鞨)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고씨군장(高氏君長)은 사라졌다.”

이 기록에서 보장왕의 ‘고씨군장’ 가문 중 일부가 ‘말갈’로 들어갔다는 말은 그들 중 일부가 고구려가 무너진 지 29년 되는 698년경 다시 고구려를 부활시킨 ‘말갈국(靺鞨國)’ 곧 발해(渤海)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발해 우성(佑姓, 귀족성) 고씨(高氏)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 중 다른 한 갈래는 우리에게 오늘날에도 비교적 생소한 나라인 ‘돌궐’ 곧 ‘투르키스탄(Turk-i-stan)’으로 갔다고 한다. “돌궐로 간 고구려 왕가와 그 유민”이라?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고구려와 돌궐 간의 친선관계


▎고구려 말기(7세기 중반) 돌궐 칸국의 영향권. 고구려 유민의 한 갈래는 동돌궐을 거쳐 점차 서쪽으로 이주하게 된다.
놀랍게도 “돌궐로 사라졌다는 고려의 고씨군장과 그 유민”이 당시의 동돌궐 땅인 오늘날 몽골과 카자흐스탄으로 갔다면? 그 뒤 그들은 더 서쪽 당시의 서돌궐, 곧 오늘날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지나 1050년경 그들의 일가친척인 ‘셀주크 튀르크’가 제국을 지은 오늘날의 유럽의 문턱 터키 땅, 곧 당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오늘날 터키 이스탄불)에 이를 수도 있다. 약 350년의 세월에 걸쳐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한 셈이다.

동·서방의 고대 사서에 따르면, 이 도중 그들은 가는 곳마다 자신들의 왕조를 창조하며 현지인들과 통혼하기도 하고 현지화하기도 오늘날 튀르크민족 국가들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에 정착했다. 서쪽에서 시작하자면 이집트·터키·이란·시리아·투르크메니스탄·러시아 타타리스탄 공화국·아제르바이잔·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몽골리아·투바공화국 등이다. 과연 믿을 수 있는 이야기일까?

이 사실을 고대 사서에 적힌 그들의 행방 기록, 그들의 후손들이 남긴 선조들의 족보, 그들이 서쪽으로 나아가면서 그 후손들에게 생긴 얼굴 및 외모의 변화에 관한 기록 등 3가지를 통해 알아본다.

이처럼 고구려 왕가와 그 유민들이 서방으로 간 사실의 단서는 우선 고구려가 건재한 시기에 고구려와 돌궐 간의 친선관계에서도 발견된다. [수서(隋書)] 돌궐전은 동돌궐의 계민카간(啓民可汗, Yami Kaghan)이 고구려 사신과 자기 장막 안에서 만나고 있을 때 불시에 방문한 수 양제가 이를 보고 “돌궐과 고구려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했다고 전한다.

이 수(隋)나라 때 고구려와 돌궐의 친선관계는 이후에도 지속됐다. 앞서 [구당서]에서 확인했듯 고구려가 망하자 보장왕의 가문 일부와 그 속민이 동돌궐로 간 데서 확인할 수 있다.

또 동돌궐의 마지막 카간인 힐리카간(頡利可汗)은 보장왕과 손자, 손녀를 혼인시킨 사돈관계였다. 힐리카간은 계민카간(啓民可汗)의 셋째 아들로, 당나라 정관 4년(630) 이정의 공격을 받아 항복한다.

당나라의 두우(杜佑)가 편찬한 정치서인 [통전(通典)]은 ‘고려왕 막리지 고문간(高麗王 莫離支 高文簡)’이 계민카간의 아들인 힐리카간의 증손녀 아시나 부인(阿史那 夫人)과 혼인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고문간은 당시 고구려 땅인 요서(遼西, 오늘날 요녕성)로 돌아와 ‘요서고려국왕(遼西高麗國王)’ 관직을 받았다고 한다.

고(高)씨 성을 쓰고 “고려왕 막리지”라는 관칭을 쓰며, 그가 활동한 연대가 발해 초대왕인 대조영(698년~ 719년 6월)이 죽기 4년 전인 715년임을 보아 고문간은 고장의 손자로 추정할 수 있다.

고문간의 부인 아시나는 동돌궐 묵철카간(默啜可汗, 바가투르카간)의 딸이고, 묵철은 오늘날 몽골에 그 비문이 남아 있어 유명한 빌게카간(Bilge Kağan)과 퀼테긴(Kül Tigin, 684~731)의 작은 아버지이다. 아시나 부인은 이 둘과 4촌 형제자매다.

이 [통전] 기록은 [구당서]에 나오는 “고려의 옛 왕가와 유민은 돌궐로 들어갔다. 이리하여 고씨군장은 사라졌다”는 기록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고구려 왕가와 그 유민들은 돌궐에만 정착한 것이 아니다. 그들 중 일부는 몽골, 카자흐스탄,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유럽의 문턱인 동로마제국은 물론, 서남으로 이란과 사우디를 거쳐 심지어 시리아와 이라크를 지나 이집트에 이르렀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로 [구당서]가 “돌궐로 간 고구려 왕가와 유민”이라고 한 사람들의 후손들이 남긴 자신들의 선조에 관한 족보(族譜, 페르시아어: Shejere-name, 곧 ‘나뭇가지 책’)이다. 곧 서방 사서가 “튀르크인”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남긴 자신의 선조들에 관한 기록이다.

‘돌궐로 간 고구려 왕가와 유민’의 후손들은 서쪽으로 이동해 간 350년간 중앙아시아 일대에 여러 왕조를 남겼다. 이때 자신들이 편찬한 역사서에 통치자(‘칸’ ‘술탄’ ‘샤’)의 족보 형태로 기록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튀르크사’로 알려진 여러 왕조 군왕들의 족보이다.

“모든 튀르크인의 선조” 오구즈 칸


▎소론바이 제엔베코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앞줄 왼쪽 둘째)이 ‘가스프롬 학교’ 개교식에 참석하고 있다. / 사진:TASS/연합뉴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 각각 서로 다른 왕조 가문의 족보가 모두 공통적으로 오늘날 “모든 튀르크와 모골(몽골)의 선조 오구즈 칸(Oguz Han)”이라고 불리는 한 전설적인 인물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구즈 칸의 출신 배경을 그 가문의 족보들을 통해 보면, 그는 놀랍게도 고구려 왕가 출신이다. 그가 고구려 왕가의 일원이라는 점을 알려주는 여러 기록이 있다.

히바칸국의 왕 ‘아불 가지 바하두르 칸’(1603~1663년)이 쓴 [튀르크멘의 계보(Shejere-i-tarokime)]는 다음의 말을 전한다. 히바칸국은 칭기즈 칸의 손자 샤이반의 후손들이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일대에 세운 나라다.

“오구즈 칸은 자신의 종족인 타타르와 모골을 복속시키고 멀리 서방으로 원정을 가서 롬(동로마제국 비잔틴)과 사이람(카자흐스탄) 등지를 정복하고 자신의 유르트(Yurt, 고향)로 돌아왔다.”

그런데 [튀르크멘의 계보]는 오구즈 칸의 고향이 “캉글리(큰고려, 고구려), 키타이(거란), 주르체(Jurche, 여진)에 가까운 모골(Mogol) 땅”이라고 한다. 여기서 ‘모골’이란 오늘날 몽골을 포함한 지역이었던 고구려 때 ‘말갈(靺鞨) 칠부(七部)’로 오늘날 한반도와 만주, 몽골지역이라는 해석이 있다.

또 몽골 4칸국 중 하나인 일칸국(伊利汗國, 1256~1357년) 재상 라시드 웃딘이 페르시아어로 쓴 [오구즈 역사(Tarikh-i-Oguz)]는 “모골은 오구즈 칸의 숙부들인 우르 칸, 구르 칸, 쿠르 칸의 후손들”이라고 전한다.

티무르제국을 세운 아미르 티무르의 손자인 타르가이 울룩 벡(1393~1449년)이 쓴 페르시아어 사서 [사국사(Tarikh-i-Arba’ Ulus)]는 이 오구즈 칸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옛날에 알라일리 칸(Alaili Han)이 있었다. 이 알라일리 칸으로부터 타타르 칸(Tatar Han, 대대로 왕)과 모골 칸(Mogol Han, 말갈왕) 두 쌍둥이 형제가 태어났다. 이중 아우 모골 칸에게는 아들 카라 칸이 태어났고, 또 이 카라 칸의 아들로 오구즈 칸(Oguz Han)이 태어났다.”

알라일리 칸은 을지문덕?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2019년 대통령 선거 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있다. / 사진:TASS/연합뉴스
이 ‘알라일리 칸(Alaili Han)’은 고구려 국상(國相) 을지문덕(乙支文德)과 반드시 같은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와 같은 칭호를 쓰는 ‘을지왕(乙支王)’의 수(隋)·당(唐) 때 소리인 ‘알라이왕(乙支文, Alai Vong)’의 튀르크식 이름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왕(王)을 대리하던 “국상(國相)”은 오직 고구려 왕가 인물만이 맡았다. 초대 국상인 명림답부(明臨答夫)를 비롯, 을파소(乙巴素), 창조리(倉助利) 등이 모두 고구려 왕가의 방계였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알라이왕/을지문(乙支文)’은 고구려 왕가 출신이었을 공산이 크다.

또 알라일리 칸(Alaili Han)에게서 태어났다는 쌍둥이 아들의 튀르크식 이름 타타르 칸(Tatar Han)과 모골 칸(Mogol Han)은 우리말로 ‘대대로 왕(大對盧 王)’과 ‘몰골 왕(靺鞨 王, 말갈 군왕/말고을 수령, 장관)’과 유사성을 가진다.

[튀르크멘 계보]에는 ‘타타르 8칸’의 이름들(타타르 칸-보코 칸-알린자 칸-아달리 칸-아드시즈 칸-오르두 칸-수윤지 칸)이 나오는데, 이는 고구려 ‘대대로 개소문(蓋蘇文)’ 가문의 후손 8명의 계보와 대칭을 이룬다.

타타르 칸과 모골 칸 두 형제 가운데 모골 칸의 아들이 ‘카라 칸(Kara Han)’이고, 그의 아들이 바로 ‘오구즈 칸’이다.

그런데 오늘날 튀르크어로 ‘-오-’는 고대에 ‘-코/호(kho)-’ 소리였고, ‘-즈(z)-’는 옛날에 ‘-르(r)-’였음을 고려하면, ‘오구즈 칸’은 ‘코구르 칸’, 곧 ‘커구려(고구려) 칸’이라는 이름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계보만 보아도 오구즈 칸이 고구려 국상(國相)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같은 칭호를 쓰는 인물의 3대손일 가능성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오구즈 칸이 “모든 튀르크인과 모골인의 선조”로 불리는 이유를 보자. [역사모음] [사국사] [튀르크멘의 계보]는 오구즈 칸에게 6명의 아들이 있었고 이 아들들에게는 각각 4명의 아들이 태어나 모두 24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각자 부족의 선조가 돼 모두 24개의 튀르크 부족을 이뤘다. 이들은 오늘날 모든 튀르크 민족·종족들의 선조 부족인 ‘오구즈인들(Oguzlar)’이라고 불렸다고 공통적으로 말한다. 알라일리 칸(Alaili Han, 乙支文), 그 아들 타타르 칸(Tatar Han, 대대로 왕, 大對盧 王)과 모골 칸(Mogol Han, 몰골왕(靺鞨 王), 그리고 카라 칸(고려 칸)이 모두 고구려인 왕가 계보에 들어 있으므로 그렇다면 ‘오구즈인들’은 곧 ‘고구려 부족인들’이라는 말이 된다.

놀라운 사실은 이 사서들은 튀르크 24부족인 ‘오구즈인들(Oguzlar)’을 형성한 인물들이 점차 서쪽으로 가서 14개 튀르크 왕조의 시조가 됐다고 기록한다는 점이다.

라시드 웃딘의 다른 사서 [살죽역사(Tarikh-i-Saljoukiyan)],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세워졌던 구르왕조의 대재판장(kādılkudât) 민하지주즈자니(Minhâc-ı Sirâc el Cûzcânî, 1193~1266년)가 쓴 [승리의 계층( aba āt-ı Nâ ırî’)] 등 여러 사서가 이 각각의 왕조의 시조를 기록한다. 이 중 잘 알려진 6개만 우선 들자면 아래의 계보도와 같다:

1) 오구즈 칸의 여섯째 아들 팅기즈 칸(Tinghiz Han)의 네 아들 중 하나인 크닉(Kynik)은 당시의 동로마 ‘롬’ 땅에서 지어진 셀주크 튀르크(Saljuk Turk, 1037~1153년)왕조의 시조가 됐다. 고려 중말기이다.

오구즈 칸과 24명의 손자


▎6~8세기경 몽골 지역 말갈인들이 새긴 암각화. / 사진:위키피디아
2) 오구즈 칸의 셋째 아들 율두즈 칸의 네 아들 중 하나인 빅딜리(Bigdili)는 훗날 우즈베키스탄을 중심으로 한 호라즘샤제국(1077~1231년) 왕가의 선조다. 빅딜리의 후손인 쿠틉웃딘 무함마드가 호라즘샤가 된 이래 이 가문 부자들은 대대로 제국의 마지막 왕 잘랄 웃딘(Jal atDin)까지 이어졌다.

이 호라즘샤 제국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오구즈 칸의 둘째 아들인 아이 칸(Ai Han)의 후손 칭기스 칸한테 멸망당했다.

3) 호라즘샤 제국의 마지막 왕 잘랄 웃딘의 조카 쿠투즈(Kutuz, ?~1260)는 이 때문에 이집트로 가서 이집트 술탄의 맘루크(왕 집안의 노예)로 일하다가 오히려 이집트 맘루크 왕조(1250~1517년)의 태조가 됐다. 그러나 이 왕조도 같은 오구즈 칸의 후손으로 나온 오스만제국 셀림 1세의 정복으로 1517년 오스만제국 속주가 됐다.

4) 오구즈 칸의 넷째 아들 괵 칸(Ko’k Han)의 네 아들 중 바얀다르(Bayandar)는 훗날 역시 오구즈 칸의 후손인 칭기스 칸의 방계 5대손인 아미르 티무르 제국 때에 일어난 튀르크 악 코윤루(Ak Koyunlu, 백양조, 1378~1501년) 왕조의 태조가 됐다.

5) 오구즈 칸의 여섯째 아들 팅기즈 칸(Tinghiz Han)의 네 아들 중 이바(Iva)는 역시 아미르 티무르 제국 때에 일어난 튀르크 카라코윤루(Kara Koyunlu, 흑양조, 1374~1468년) 왕조의 태조가 됐다.

6) 오구즈 칸의 첫째 아들 쿤 칸(Kun Han)의 아들로 태어난 카이(Kai)는 오늘날 터키의 전신인 오스만 튀르크 왕조(1299~1922년)의 시조가 됐다.

이처럼 [구당서]와 [튀르크멘의 계보] 또 오늘날 튀르크 왕가로 알려진 왕가들은 스스로 자신의 선조가 고구려 왕가 출신의 오구즈 칸이라는 계보를 남겼다. 이 서방 사서들의 족보에 따르면 고구려 왕가와 유민의 일부가 서쪽의 돌궐로 갔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들은 350년간의 세월에 걸쳐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들 자손의 외모가 점차 바뀌어 갔다는 사실도 기록했다. 앞선 시대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우선 이들이 서방으로 가기 전 고구려가 건재했던 서기 600년대 튀르크인들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이슬람의 2개의 성전(聖典) 중 하나인 [(무함마드) 행전(Hadith)] 43-1262 구절은 당시의 아랍인들이 본 튀르크인들의 외모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알라의 심부름꾼(Rasulullah, 570~632년)이 말씀하셨다… 튀르크인(al Turk)들의 눈은 작고 얼굴은 붉으며 코는 납작하며 그들의 얼굴은 가죽을 덮어쓴 방패처럼 보인다… (짐승) 머리칼로 만든 신발을 신었다.”

무함마드 시대인 1400년 전 이 [(무함마드) 행전]이 전하는 고대 “튀르크인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터키인·튀르크멘인·우즈벡인 등과는 매우 다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들의 선조의 외모는 오히려 우리 민족과 같은 모습이다.

‘고구려 루트’ 따르는 신북방정책 구상


▎2019년 4월 투르크메니스탄을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구르반굴리 베르디무하메도프 대통령과의 단독회담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두 정상 뒤로 오구즈 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 사진:뉴시스
그런데 이 [(무함마드) 행전]이 전하는 바가 사실임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자료가 있다. 오늘날의 몽골인 투르키스탄에 6~8세기경 그려진 괵 튀르크인 암벽 초상화 속의 인물들의 얼굴 생김새를 보자.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점차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겉모습이 바뀌어간다. 아불 가지 칸의 [튀르크멘의 족보]는 “오구즈인(Oguzlar)들이 서쪽으로 옮겨가자 (그들한테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코와 눈들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고 턱은 작아지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668년 이후 ‘돌궐로 들어간 고씨군장과 그 백성인 고구려 유민’들은 오늘날의 몽골과 카자흐스탄 등 돌궐, 곧 중앙아시아를 지나 약 350년에 걸쳐 이란, 아라비아, 동로마제국 영내 등 더욱 서쪽으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페르시아(이란)인 및 아랍인들과 통혼할 수도 있다. 그 결과 원래의 동방인들은 그 모습을 바꾸기 시작해 오늘날 유럽인 또는 페르시아-아랍인과도 비슷해 보이는 모습을 하게 된 건 아닐까.

또 현대 튀르크인들이라고 하더라도 동으로 올수록 우리와 비슷하고 서로 갈수록 유럽인 또는 페르시아-아랍인과 비슷하다. 가장 서쪽 유럽에 맞닿은 터키에서 점차 동쪽으로 이어지는 튀르크 여러 나라, 곧 투르크메니스탄, 타타리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러시아 학카시아 공화국의 코라이-콩고라이인들, 카자흐스탄과 몽골에 가까운 투바인들, 그리고 우리 땅으로 다가오면서 튀르크인들의 모습은 다음 사진처럼 서서히 달라진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는 가설도 해봄직하다. 다만 한 갈래는 동쪽의 고구려를 재건한 말갈(靺鞨), 곧 진국(震國), 달리 발해로 돌아와 오늘날 우리 ‘코리아(Korea)’로 이어지고 있다고 하겠다. 또 한 갈래는 머나먼 서방으로 가서 고구려계 튀르크 제국들을 세웠다면? 이 사실은 셀주크, 오스만 튀르크, 호라즘샤, 카라코윤루 등 바로 튀르크 왕가들 자신의 선조를 기록한 족보와 사서를 통해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유럽의 일부인 터키에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는 우리와 역사적으로 피를 나눈 형제, 친척민족의 국가들이다. 이 지역을 ‘범 코레아-튀르크 정치·경제·문화 권역’으로 묶어 우리가 러시아와 중국 사이를 가르는 ‘신북방정책’의 회랑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 전원철 - 법학박사이자 중앙아시아 및 북방민족 사학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법학을 공부했다.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며, 체첸전쟁 당시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현장주재관으로 일하는 등 유엔 전문 기관에서도 일했다. 역사 복원에 매력을 느껴 고구려발해학회·한국몽골학회 회원으로 활약하며 [몽골제국의 기원, 칭기즈 칸 선대의 비밀스런 역사] 등 다수의 역사 분야 저서와 글을 썼다.

202002호 (202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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