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경상도(慶尙道)
자료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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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목(尙州牧)
동쪽으로 비안현(比安縣) 경계까지 67리, 남쪽으로 선산부(善山府) 경계까지 39리, 동부(同府) 경계까지 40리, 금산군(金山郡) 경계까지 47리, 서쪽으로 충청도(忠淸道) 보은현(報恩縣) 경계까지 70리, 북쪽으로 함창현(咸昌縣) 경계까지 29리, 서울까지 4백리다.
【건치연혁】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 하나는 사불(沙弗)이라고도 한다. 신라 점해왕(沾解王)이 빼앗아서 주(州)로 만들었다. 법흥왕(法興王)이 상주(上州)로 고쳐 군주(軍主)를 두고, 진흥왕(眞興王)이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치고 신문왕(神文王)이 다시 주(州)로 만들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혜공왕(惠恭王)이 다시 사벌주(沙伐州)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다시 상주(尙州)로 고치고, 뒤에 안동도독부(安東都督府)로 고치고, 성종(成宗) 2년에 상주목(尙州牧)으로 고치고, 뒤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귀덕군(貴德軍)이라 이름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이 절도사를 폐지하여 다시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만들고, 뒤에 상주안무사(尙州安撫使)로 고쳤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정하였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하였다. 세종(世宗) 때에 관찰사(觀察使)로서 목사(牧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혁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목사로서 우도병마절도부사(右道兵馬節度副使)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고 진(鎭)으로 만들었다.
【속현】 화령현(化寧縣) 본래 신라 답달비군(荅達匕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쳤고, 고려(高麗)에서 그대로 하였다가 뒤에 현(縣)으로 고쳐 내속(來屬)시켰다. 주(州) 서쪽 51리에 있다. 중모현(中牟縣) 본래 신라 도량현(刀良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도안(道安)으로 고쳐 화령군(化寧郡)에 예속시켰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예속시켰으며 주(州) 서쪽 57리에 있다. 단밀현(丹密縣) 단(丹)은 단(單)이라고도 한다. 본래 신라 무동미지현(武冬彌知縣)인데 달리 갈동미지(曷冬彌知)라고도 한다.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문소군(聞韶郡)에 예속시켰는데, 고려에서 그대로 하였다가 뒤에 와서 붙이었다. 주(州) 동쪽 57리에 있다. 산양현(山陽縣) 본래 신라 근품현(近品縣)이다. 달리는 근암(近巖)이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이름을 가유(嘉猷)로 고쳐 예천군(醴泉郡)에 예속시켰는데, 고려(高麗)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 예속하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명종(明宗)이 혁파하고 전대로 예속시켰으며 주(州) 북쪽 63리에 있다. 장천부곡(長川部曲) 주 남쪽 25리에 있다.
【진관】 목(牧) 1 성주(星州). 부(府) 1 선산(善山). 군(郡) 1 금산(金山). 현(縣) 5 개령(開寧)ㆍ지례(知禮)ㆍ고령(高靈)ㆍ문경(聞慶)ㆍ함창(咸昌).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상주(上州)ㆍ상락(上洛)ㆍ사량벌(沙梁伐)ㆍ사벌(沙伐)ㆍ상산(商山)ㆍ타아(陁阿)ㆍ귀덕군(貴德軍).
【성씨】 본주(本州) 김(金)ㆍ박(朴)ㆍ주(周), 황(黃), 고(高)ㆍ이(李)ㆍ형(荊)ㆍ나(羅) 모두 내성(來姓)이다. 이(李) 하간부(河間府) 인물(人物) 아래에 자세히 하였다. 윤(尹) 촌성(村姓)이다. 임(林) 속성(續姓)이다.단밀(丹密) 나(羅)ㆍ손(孫). 산양(山陽) 유(庾)ㆍ신(申)ㆍ채(蔡)ㆍ방(方). 화령(化寧) 임(任)ㆍ고(高)ㆍ방(方)ㆍ장(張)ㆍ전(全)ㆍ신(申). 공성(功城) 성(成)ㆍ손(孫)ㆍ장(張)ㆍ전(全). 청리(靑里) 장(張)ㆍ박(朴)ㆍ방(方)ㆍ심(沈). 중모(中牟) 전(全)ㆍ김(金)ㆍ강(姜)ㆍ박(朴)ㆍ방(方), 심(沈) 내성(來姓)이다.영순(永順) 태(太). 장천(長川)ㆍ윤(尹)ㆍ박(朴). 연산(連山)ㆍ윤(尹) 백원(白原)ㆍ하해(河海)ㆍ양녕(壤寧)ㆍ보량(保良)도 같다.주선(主善) 신(申) 단곡(丹谷) 생물(生物)도 같다.양보(陽寶)ㆍ진(陳). 관제(灌濟) 임(任)ㆍ전(全)ㆍ고(高). 평안(平安) 방(方)ㆍ심(沈)ㆍ구(仇). 평산(平山) 방(方). 무림(茂林) 손(孫), 김(金)ㆍ심(沈) 모두 속성(續姓)이다.선은(鐥銀)ㆍ임(任)ㆍ전(全). 해상이(海上伊)ㆍ방(方)ㆍ김(金)ㆍ박.
【풍속】 습속(習俗)이 간소하고 인색한 것을 숭상한다. 백성의 풍기가 순고하고 질박하다. 모두 권근(權近)의 기(記)에 있다.
【형승】 동남방 일백 고을 중 첫째다. 최자(崔滋)의 전(傳)에 있다. 팔방으로 통한 거리이다. 안축(安軸)의 기에 있다. 신라(新羅) 때부터 큰 부(府)가 되었다. 이색(李穡)의 기에 있다.
【산천】 왕산(王山) 성안의 작은 산이다. 천봉산(天峯山) 주(州) 북쪽 7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구봉산(九峯山) 화령현(化寧縣) 서쪽에 있는데 봉만이 창을 벌여 세운 것 같아서 대단히 높고 험하다. 속리산(俗離山) 화령현 서쪽 30리에 있다. 산 서쪽 15리 가량 되는 곳에 용화솔면촌(龍華率面村)이 있는데 황장(黃腸)과 궁실(宮室)의 재목이 나온다. 나머지는 보은현(報恩縣) 편을 보라. 사불산(四佛山)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있는데, 주(州)와의 거리가 99리다. ○ 고려(高麗) 중 진정(眞靜)의 유산기(遊山記)에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산이 있는데 동쪽으로 죽령(竹嶺)에 연하고 남쪽으로 화장(華藏)을 끌어 당긴다. 이 산의 이름이 사불(四佛)인데 공덕(功德)이라고도 한다. 산에 사방 십척 쯤 되는 돌이 있는데, 사면에 사방불(四方佛)을 새기어 별봉(別峯)에 안치되어 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이 그 산을 순행하여 구경하고 그 옆에 절을 창건하여 이름을 대승(大乘)이라 하였다. 산의 곤방(坤方)에 절이 있는데 이름은 백련사(白蓮社)다. 뜰 좌우에 미면정(米麪井)이 있고 의상(義湘)이 설법(說法)하던 대(臺)가 있는데, 종려(椶櫚) 삿갓과 주석 지팡이가 있다. 고종(高宗) 29년 소경(少卿) 최자(崔滋)가 상주(尙州) 목사(牧使)로 있을 때 찾아보니, 옛 궁전에 원효(元曉) 의상(義湘)의 진용(眞容)이 있고 소위 삿갓과 지팡이도 아직 탈이 없었다. 문 밖 50보쯤 되는 곳에 높이가 석 자나 되는 돌 하나가 있는데, 전하기를 금호석(禁虎石)이라 한다. 20보쯤 되는 곳에 샘이 있는데, 바위 틈 사이로 졸졸 솟아 나오고, 소나무ㆍ가래나무가 울창하며 아래에 반석이 있어 30명은 앉을 만하다. 이 이름이 냉천정(冷泉亭)이다. 최공이 법조(法曹) 왕공(王公)에게 명하여 공사를 감독하여 불우(佛宇)ㆍ조당(祖堂)ㆍ승료(僧寮)ㆍ객실(客室)로부터 허백루(虛白樓)에 이르게 하고, 또 냉천정(冷泉亭) 아래에 누교(樓橋)를 만들어 이름을 신청교(神淸橋)라 하였다. 조계산인(曹溪山人) 탁연(卓然)에게 명하여 써 부치게 하였다.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가 호남(湖南)에 있고, 공덕산(功德山)은 강동(江東)에 있으므로 동백련(東白蓮)이라 불러서 구별하였다. 병풍산(屛風山) 주(州) 동쪽 10리에 있다. 왜유현(倭踰峴) 주 남쪽 47리 금산군(金山郡) 경계에 있다. 대조현(大鳥峴) 산양현(山陽縣) 북쪽에 있는데 주(州)에서 88리다. 갑장산(甲長山) 주 남쪽 13리에 있는데 일명 연악(淵岳)이라 한다. 석악산(石嶽山) 주 북쪽 6리에 있다. 만악산(萬嶽山) 단밀현(丹密縣) 남쪽에 있으며 주(州) 북쪽 47리에 있다. 백화산(白華山) 중모현(中牟縣) 서쪽에 있으며, 주에서 72리다. 노음산(露陰山) 주 서쪽 10리에 있다. 서로악(西露岳)이라고도 일컫는다. 북석악(北石岳) 남연악(南淵岳)과 함께 상산삼악(商山三岳)이라고 일컫는다. 죽현(竹峴) 주 남쪽 38리 선산부(善山府) 경계에 있다. 송현(松峴) 주 북쪽 28리 함창현(咸昌縣) 경계에 있다. 북천(北川) 주 북쪽 2리에 있다. 근원이 주 서쪽 가전현(加田峴)으로부터 동으로 흘러 남천(南川)과 합한다. 남천(南川) 주 남쪽 5리에 있다. 근원이 왜유현(倭踰縣)으로부터 주 동쪽 5리에 이르러 북천(北川)과 합하여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낙동강(洛東江) 주 동쪽 36리에 있다. 문경(聞慶)의 용연(龍淵)과 군위(軍威)의 병천(竝川) 등 여러 물이 주의 동북쪽에 이르러 용궁(龍宮) 하풍진(河豐津)에 합하여 남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어, 선산부(善山府) 경계로 들어간다. 여기로부터 바다에 들어가기까지 비록 땅에 따라 이름은 다르나 총칭 낙동강이라 하고 가야진(伽倻津)이라고 일컫는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백 번이나 구부려진 푸른 산 속에 한가하게 낙동을 지난다. 풀이 깊으니 아직도 이슬이 있고 솔이 고요하니 자연 바람 없다. 가을 물은 오리 머리 같이 푸르고, 새벽 놀은 성성의 피같이 붉구나. 게을리 노는 손이 사해(四海)로 떠도는 한 시옹(詩翁)인 줄 누가 알까.” 하였다. ○ 안축(安軸)의 시에, “비 뒤의 산빛은 쪽물 들인 듯 푸르고, 십리의 기이한 바위는 수묵(水墨)으로 그린 병풍이다. 자사(刺史)가 새 안부(按部 감사)를 기꺼이 맞아, 목란(木蘭) 배 위에 초가 정자를 얹었다.” 하였다.
송라탄(松羅灘) 주 북쪽 37리에 있는데 곧 낙동강(洛東江) 상류다. 공검지(恭檢池) 주 북쪽 27리에 있다. 고려(高麗) 명종(明宗) 때에 사록(司錄) 최정분(崔正份)이 옛터를 따라서 쌓았는데, 둑의 길이가 8백60보이고 둘레가 1만6천6백47척이다. 그 못이 실상은 함창(咸昌)에 있는데, 상주 백성들이 관개(灌漑)의 이익을 독차지한다. 불암지(佛巖池) 주 북쪽 4리에 있다. 둘레가 1천9백31척이다. 대제지(大堤池) 단밀현(丹密縣) 북쪽에 있으며 주에서 68리다. 기지(機池) 주 남쪽 6리에 있으며 둘레가 4천1백81척이다.
【토산】 옥석(玉石) 갑장산(甲長山)에서 난다. 옥등석(玉燈石) 대조현(大鳥峴)에서 난다. 철(鐵) 송라탄(松蘿灘)에서 난다. 호두[胡桃]ㆍ감[柹]ㆍ밤ㆍ은어[銀口魚]ㆍ송이[松蕈]ㆍ왕골[莞草]ㆍ인삼ㆍ안식향(安息香)ㆍ산무애뱀[白花蛇]ㆍ석이버섯[石蕈].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백 49척 높이가 9척이며 안에 21개의 우물과 두 못이 있다.
【봉수】 회룡산봉수(回龍山烽燧) 공성현(功城縣)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금산군(金山郡) 소산(所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청리현(靑里縣) 서산(西山)에 응한다. 소산봉수(所山烽燧) 주 동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 청리현 서산에 응하고 북쪽으로 함창현(咸昌縣) 성산(城山)에 응한다. 서산봉수(西山烽燧) 청리현 서쪽에 있다. 서쪽으로 공성현(功城縣) 회룡산(回龍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소산(所山)에 응한다. 국사당산봉수(國師堂山烽燧) 화령현(化寧縣) 서쪽에 있다. 동쪽으로 중모현(中牟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산양현 소산봉수(山陽縣所山烽燧) 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문경(聞慶) 호계현(虎溪縣) 선암산(禪巖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궁현(龍宮縣) 용비산(龍飛山)에 응한다. 중모현 소산 봉수(中牟縣所山烽燧) 현 북쪽에 있다. 남쪽으로 충청도(忠淸道) 황간현(黃澗縣) 소산(所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화령현(化寧縣) 국사당산(國師堂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안축(安軸)의 기에 “지정(至正) 3년 계미(癸未)년에 내가 상주(尙州) 목사의 명을 받아 이해 여름 4월 고을에 부임하여 일을 보았다. 근년 이래로 가혹한 정치 때문에 백성들이 흩어지고 마을 골목이 쓸쓸하며 옛날의 공해(公廨)ㆍ학교(學校)ㆍ신사(神祠)ㆍ불사(佛寺)라고는 모두 기울어 무너지고, 오직 객사(客舍)만이 온전히 갖추어져 고대(高大)하고 화려한 것이 남방에 으뜸이고, 그 청당(廳堂)과 기초의 규모와 배치(排置)가 크고 장려하며 여유가 있어 각각 그 마땅함을 얻었다. 내가 생각하기를, ‘이것은 시속 사람의 상례에 따른 제도가 아니라’ 하여 고을 사람에게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지금의 정동성랑(征東省郞) 김상국(金相國) 영후(永煦)가 영건(營建)한 것입니다. 이 고을이 팔방으로 통한 거리에 있어서 역마를 타고 사명을 받든 자가 빈 날이 없는데, 옛날의 객관이 비습하고 좁고 낮고 더러우며, 또 오래되어 기둥이 이미 흔들렸으므로 항상 손님의 꾸지람을 받았었습니다. 지난 정묘(丁卯)년 4월에 공이 이 고을 목사로 부임하여 곧 새롭게 할 생각이 있었으나 생민의 지치고 곤함을 민망히 여기어 차마 공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다만 인애(仁愛)로써 백성을 사랑하고 엄중하게 부하를 경계할 뿐이었는데, 돌이 지나자 고을 사람들이 덕스러운 정사에 편안하여 비로소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겨 공의 은혜를 갚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공이 백성을 부릴 수 있는 것을 알고 재목을 모으고 역사를 시작하여 기한을 정하였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이 발로 뛰고 손으로 춤추며 기쁨으로 수고로움을 잊으므로 억센 무리들도 두려워서 머리를 숙이고 귀를 늘어뜨리고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일이 백성을 상하지 않게 하고 공사가 농업을 방해하지 않아서, 며칠이 안 되어 이루어졌습니다. 객관이 준공되자, 또 객관의 서쪽을 개척하고 따로 작은 관사를 영건하니, 비록 사빈(使賓)이 겹쳐 이르러도 기숙하는 것이 여유가 있어 고을 사람이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아, 공(公)이 저와 같이 얼마 안 되는 백성을 써서 이와 같은 큰 집을 지었으나 힘은 실로 넉넉[恢恢]하였으니, 비록 백성의 힘을 쓰긴 하였으나 실상은 공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라 백성이 지금까지 칭송한다. 대개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시경(詩經)》에, ‘창과 지게문을 얽고 손질한다[綢繆牖戶]’는 비유가 있고, 《서경(書經)》에는 ‘긍당긍구(肯堂肯構)’의 비유가 있으니, 공이 묘당(廟堂)에 앉아서 경기(經紀)를 세우고 방략(方略)을 베풀어서 다시 왕가를 번영하게 한 것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하였다.
『신증』 가정(嘉靖) 병술년에 불에 탔는데, 목사(牧使) 윤탕(尹宕)이 고쳐 지었다.
【누정】 풍영루(風詠樓) 이색(李穡)의 기에, “상주 목사(尙州牧使) 김공(金公)이 공관 동편에 이미 정자를 짓고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름과 기(記)를 청하고 말하기를,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 물에 가서 씻지 않으리오[誰能執熱逝不以濯].’하였으니 상주의 곤란한 것을 내가 능히 없앴으므로 그대는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내가 생각하건대 신축(辛丑)년 겨울에 임금께서 남쪽으로 행하시어 이듬해 봄에 상주에 거둥하였는데, 색(穡)이 그때에 승선(承宣)으로서 조석으로 시종하였고, 가을에 이르러 거가(車駕)가 청주(淸州)로 옮겼다. 참으로 더위에 곤란을 겪었다. 그때에 깊이 한하기를, ‘이 고을이 신라(新羅) 때로부터 큰 부(府)였는데, 어째서 유관(遊觀)할 만한 정사(亭榭)가 이렇게 없는가’ 하였던 것을, 오늘날 이르기까지 대개 잊지 못하였다. 지금 나의 동년(同年) 박헌납(朴獻納)이 말한 것과 문인(門人) 김남우(金南遇)의 일가 사람 김계(金桂)가 칭도하여 말한 것을 보면 이 정자가 시원스러워서 바람에 씻는 의상(意想)이 있다 하였으니, 그 기쁘고 다행함이 어떠하겠는가. 대개 사시의 기운이 천지 사이에 유행하여 춥고 덥고 따스하고 서늘함의 당연함이 다른데, 사람이 응하는 것도 각각 그 도(道)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송석(松石)ㆍ수천(水泉)의 홍치와 사죽(絲竹)ㆍ배상(杯觴)의 즐거움에도 내 마음에 주장됨이 있으면, 눈앞에 유행하는 차고 더운 것이 넉넉히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마음을 잃게 하는 것은 바깥 물건이니 이 두 가지를 내놓고 천시(天時)에 순응하고, 내 뜻을 펼 수 있는 것은 오직 바람 쐬고 읊는 것이다. 무우(舞雩)에 바람 쐬고 읊고 돌아오매 가슴속이 유연(悠然)하여 조그만 꾸밈도 없거늘, 하물며 장마비나 혹한에 대한 원망이 이것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절(節)을 짚고 병부를 나누어 가지고, 이 고을을 지나가는 자로[지방장관으로] 하여금 춘복(春服)이 이루어진 즈음에 화기(和氣)가 넘쳐 흐르는 것과 같아지기만 한다면 상주 백성은 다행한 일이니, 감히 풍영(風詠)으로 이름짓기를 청한다. 담을 둘러서 동산을 만들고 물을 끌어서 못을 만들며 씨를 심고 나무를 심어서 둘러보고 바라보는데 탁 트이고, 여러 봉우리가 둘러 호위한 것 같은 따위는 이 정자의 보조[羽翼]니 생략하여도 좋을 것이다. 뒤에 여기에서 바람 쐬고 읊어서, 오여점야(吾與點也)의 대의(大意)를 얻는 자는 무엇으로 우리 김공에게 갚을 것인가. 아울러 여기에서 고하노라. 김공의 이름은 남득(南得)인데 경진년(庚辰年) 진사에 합격하고 안팎에 들락날락하여 중한 이름이 있어 내가 아끼고 공경하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고 기를 짓는다 하였다.” 하였다.
○ 권근(權近)의 기에, “상주(尙州)는 본래 사벌국(沙伐國)인데 신라에 속하여 큰 부(府)가 된 지 천여 년이 되었다. 산천의 수려한 것과 인물의 번성함이 도내(道內) 여러 고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누대 정사(亭榭)가 없었으니 백성의 풍속이 순박한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홍무(洪武) 경술(庚戌)년에 목사(牧使) 김남득(金南得) 공이 거듭 해우(廨宇)를 영건(營建)하고 비로소 과원(菓園)을 동북쪽에 설치하고 그 가운데에 정자를 지었는데, 우리 좌주(座主) 한산(韓山) 목은(牧隱 이색) 상국(相國)이 풍영(風詠)으로 이름짓고 기(記)를 지었으며, 과거에 장원[解元]한 성산(星山) 도은(陶隱 이숭인)이 시(詩)를 남겼으니, 두 공은 모두 세상의 문장(文章) 대가라 이 고을의 성가(聲價)가 실로 그 무게를 더한 것이다. 경신(庚申)년에 왜구(倭寇)가 침범하여 관사와 민가가 모두 병화(兵禍)를 당했다. 이듬해 신유년에 반자(半刺 목사를 돕는 통판(通判)) 전군 리(田君理)가 비로소 고을 성을 쌓아 남은 백성들을 불러 모으고 옛터에 별관을 창건하여 사명(使命 사신)을 접대하였으며, 경오년에 목사(牧使) 이복시(李復始) 공이 또 해사(廨舍)를 창건하였으나, 정사(亭榭)는 미처 지을 겨를이 없었다. 지금의 목사 송공(宋公)이 판관(判官) 한공(韓公) 암(巖)과 더불어 다스려 폐단이 없어지고, 이익되는 것을 일으켜서 풍교(風敎)가 진흥되어 백성들이 편안하여졌다. 그리고 정자의 옛터를 개척하고 넓혀서, 그 위에 다락을 일으키고 목은의 기와 도은의 시를 써서 옛날의 관첨(觀瞻)을 모두 회복하니, 고을의 좋은 경치가 더욱 증가되었다. 고을 사람 전 대호군(前大護軍) 김겸(金謙) 공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이 풍영정(風詠亭)이 생긴 후로 큰 두 선비의 거필(巨筆)을 얻어 그 빛을 빛내었는데, 중간에 화재를 만나고 미처 다시 세우지 못하여 오랫동안 고을 사람의 수치가 되었었다. 이제 우리 목백(牧伯) 목사의 정치 성적이 탁월하여 여러 고을의 으뜸이 되고, 다락을 짓는 것도 백성에게 폐가 미치지 않게 며칠 안에 준공되었고, 사명(使命)을 받든 신하가 가고 오는 길에 구경할 곳이 있으므로 고을의 늙은이ㆍ어린이가 서로 경하(慶賀)하며 기뻐한다. 목은(牧隱)과 도은(陶隱)은 그대의 스승과 벗이니, 어찌 한마디 말로 그 뒤를 잇는 것을 아끼는가.’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풍영(風詠)에 대한 뜻은 정자의 기(記)에 다 말하였으니, 내가 무엇을 덧붙일 것이 있는가. 그 말에 절(節)을 짚고 병부를 나누어 가지고, 이 고을을 지나가는 자로[지방장관으로] 하여금 봄옷이 이루어진 즈음에 화한 기운이 넘쳐 흐르는 것과 같아지기만 한다면 상주(尙州) 백성은 다행할 일이다.’ 하였는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매우 크다. 내가 감히 이것을 가지고 부연하여 말하겠노라. 공자 문하의 여러 사람[諸子]들이 각각 그 뜻을 말함에 있어서, 모두가 무슨 일을 한다는 말단적인 생각에 얽매여 있는데, 증점(曾點)만이 목욕하고 바람 쐬고 읊조리며 돌아오겠다고 말함으로써 공자께서 찬탄하고 인정하였는데, 이를 두고 말하기를, ‘요순(堯舜)의 기상이 있다.’ 하였다. 아마도 가슴을 넓게 열어 대허(大虛 허공)와 동체(同體)가 되어, 대상에 따라 형체를 부여하여 모두 제자리를 얻게 한다면, 이를 실천, 조치(措置)할 때 젊은이를 품어주고[少者懷之], 늙은이를 편안하게 해주며[老者安之], 편안하게 해주어 오게 하고[綏之斯來], 고무시켜 화하게 하는[動之斯和] 묘(妙)가 있게 된다. 화한 기운이 흘러 행하여 백성이 사는 데[耕鑿] 편하기가 봄바람 가운데에 있는 것 같아서, 다스려진 효과가 곧 큰 조화와 더불어 함께 운행될 것이니, 요순(堯舜)의 정치도 또한 여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 쫓아온 곳을 찾아 보면 다만 가슴 가운데에 한 점의 사심[私累] 없는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만일 절(節)을 짚고 병부를 나누어 가진 사신으로 하여금 올라 구경할 적에, 진루(塵樓)의 번잡한 것을 깨끗이 씻어 버리고, 세상 생각을 소화해 보내어 뜨거운 것을 잡았어도[執熱] 샘에 빠는 것을 기다림 없이 맑아지고, 맑은 정치가 재야의 도움을 얻지 않고도 이룩되며, 짧은 시간[俯仰] 수작(酬酌)하는 사이에도 묵묵히 보고, 읊조리며 마음에 즐거움을 얻음으로써 물과 내가 같다는 이치[物我同然之望]를 넓힌다면, 그 정치와 교화의 효험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그 누대의 좋은 경치를 구경하기엔 내가 늙었으나 혹시 한 번 가서 보기라도 한다면 마땅히 도은의 뒤를 이어 읊을 텐데.” 하였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오래 손 노릇하여 몸이 바야흐로 피곤한데, 처음으로 오르니 눈이 번쩍 밝아진다. 경영하여 지은 이는 김 태수(金太守)요, 풍영(風詠)으로 이름한 이는 이 선생(李先生)이다. 대 그림자에는 지당(池塘)이 고요하고, 소나무 소리에는 원우(院宇)가 맑다. 좋은 말 없는 것이 스스로 부끄럽구나. 현판 위에 다만 이름만 썼네.” 하였다.
『신증』 김종직(金宗直)의 중수기(重修記)에, “상주(尙州)가 낙수(洛水)의 상류에 있어서 감사(監司)의 본영(本營)이 되었으니, 실로 동남방의 큰 도회이다. 사명을 받고 정사를 반포하는 손님과 조공을 바치는 일본 사신이 오고 가는 것이 줄처럼 연속하여, 죽령(竹嶺)을 경유하는 것은 3분의 1도 못 되고 대개는 관현(冠縣)을 경유하는데 상주가 그 폭주하는 중심지에 있으니, 체모[儀刑]에 맞게 마땅히 높은 다락과 웅장한 집이 있어 관첨(觀瞻)을 장엄하게 하며, 고명(高明)과 겨루어 염열(炎熱)과 습기를 제거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은 풍영루(風詠樓)를 중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전하(殿下) 18년 정미(丁未) 봄에 순창(淳昌) 설순조(薛順祖)공이 좌도(左道)의 책임을 지고 이 고을에 왔을 때, 이 다락의 지붕ㆍ마루와 서까래는 흔들려 기울어지고 난간이 깨어져 닫히고, 기와는 처마에서 벗어나 비는 벽에 새어 붉고, 흰 것의 장식은 흐려지고 벗겨져서, 오르는 자가 관현(管絃)을 베풀기 전 주춤해서 꺼리는 빛이 많은 것을 보고 개연히 중수하고자 하였는데, 그 해 가을에 통판(通判) 고양(高陽) 신후(申侯) 현(礥)이 잇따라 이르렀다. 의논이 서로 합하여 이듬해 봄에 농사가 시작되기 전에, 재목 수집을 명하여 성안에 실어들이고 가을 8월에 이르러 비로소 묵은 집을 헐고 그 제도를 넓히고 키워서, 겨우 30여 일 만에 자귀와 흙손의 사용이 끝이 났다. 누각의 화려함ㆍ장려함ㆍ훌륭함이 더불어 대적할 것이 없어서, 성지(城池)와 여항(閭巷)이 모두 덕스럽게 여기는 빛이 있고, 무릇 지경 안의 산천의 진산(鎭山)이 되고 소택(沼澤)이 된 것이 마치 높고 깊은 것을 증가시킨 것 같았다. 공이 그래서 우리 친구, 고을의 교수(敎授) 주윤창(周允昌)군을 중개하여 편지를 보내 나에게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고을의 옛일을 상고하건대, 원(元) 나라 태정(泰定) 정묘년에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위치를 적당하게 한 자는 목사(牧使) 김영후(金永煦)이고, 기를 지은 이는 근재(謹齋)이다. 황명(皇明) 홍무(洪武) 경술년엔 관사의 동평을 개척하고 그 땅에 새 정자를 지은 이는 목사 김득남(金得南)이고, 풍영(風詠)으로 이름하고 또 기를 지은 이는 목은(牧隱)이며, 시를 지은 이는 도은(陶隱)이다. 경신(庚申)년 병화에 정자도 불타버렸는데, 얼마 안 되어 묵은 터에 정자를 바꿔 다락으로 지은 자는 목사 송인(宋因)이고 기를 지은 이는 양촌(陽村)이다. 지금 공이 이 다락을 중수함에 있어서 그 제도의 모획(謨劃)과 공정(功程)이 족히 두 김씨와 송씨에 좇아 필적(匹敵)할 수가 있는데, 기를 짓는 촉탁을 받은 자는 네 선생의 제자 축에도 들지 못하니 어찌하랴. 옛적에 한퇴지(韓退之)는 등왕각(滕王閣)의 기를 지으면서 글이 세 왕씨의 다음에 나열함으로써 영광을 삼았으나 나는 뻔뻔스럽게 네 선생의 뒤에 초(貂)를 속(續)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세상 사람들이 배를 부둥켜 웃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장차 움츠리고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을 텐데 어찌 소위 영광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공이 명령하여 감히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아직 그 대강을 기술하고 또 노래하기를, ‘배와 수레가 모여드니 사방으로 통한 요충(要衝)이로다. 관과 일산이 수레 자국을 열했으니 다른 나라가 하풍(下風)에 따르는도다. 이 집이 있지 않으면 연향(宴饗)과 호군(犒軍)을 어디 의탁하랴. 누가 뜨거운 것을 잡고서 물에 씻지 않으리오, 상산(商山)은 푸르고 푸르러 낙수(洛水)는 구불구불 흐른다. 옛것을 계승함이 있으니, 층층 집이 구름에 닿았도다. 둘러 있는 것이 맑은 낙수요, 높은 상안(商顔)이로다. 순창(淳昌)의 후계함이 영구히 깎이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한다.
관수루(觀水樓) 낙동강 동쪽 언덕에 있다. 응신루(凝神樓) 풍영루(風詠樓) 서쪽에 있으며, 판관(判官) 민녕(閔寧)이 세웠다.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기(記)에 “고을 객헌(客軒) 동쪽에 ‘풍영’이라는 다락이 있는데 목은(牧隱) 이 선생(李先生)이 이름과 기를 지었고, 그 서북 모퉁이에 또 지붕마루를 연하여 새로 일어난 것이 있으니 이름하여 응신(凝神)인데, 지금의 통판(通判) 민녕(閔寧) 후가 세운 것이고 함종(咸從) 어자익(魚子益) 선생이 이름한 것이다. 홍치(弘治) 기미(己未)년 봄에 겸선(兼善)이 명령을 받아 《성종실록(成宗實錄)》을 성주사각(星州史閣)에 봉안(奉安)하는 길에 상주(尙州)로 지나게 되었으니 상주는 우리 시골이다. 시골 사람들이 풍영루(風詠樓) 위에서 내게 술을 주는데 목사 신종지(申宗之) 공과 민후(閔侯)가 함께 자리에 있었다. 술이 취하고 날이 저물 때 민후가 일어나서 고하기를, ‘작은 다락은 우리가 사객(使客)을 편안하게 하자는 것인데, 왜 오늘 여기에서 자지 않겠는가.’ 하고 또 말하기를, ‘이 누각이 기(記)가 없으니 한 말을 남기기를 원한다.’ 하였다. 내가 사양할 수 없어서 말하기를, ‘재주없는 내가 다행히 여기에서 마시고 읊는데 마침 봄옷이 이루어짐을 만나[春服之成] 손과 벗이 자리에 가득하고 또 사죽(絲竹)과 관현(管絃)의 성대함이 있으니, 어른과 아이 7ㆍ8명이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읊고 돌아오는 것에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조금 뒤에 작은 다락에 자리를 까니 그 제도가 극히 깨끗하고 시원스러웠다. 다락 중심에 방을 만들었는데, 창은 비고 발은 성기어 더울 때에 거처하기가 대단히 좋게 되어 있다. 또 바로 다락 머리에 목욕하는 집이 있어 깨끗하고 편리하였다. 술이 깬 뒤에 내려가 목욕하니 심신(心神)이 맑고 명랑하여 한 점의 진구(塵垢)도 없었다. 끝낸 뒤에 다시 오르니 때는 이미 사람의 소리가 없는 고요한 밤인데 오직 작은 바람이 휘장을 움직이고 등롱 촛불이 그림자를 흔드니, 참으로 인간의 둘도 없는 정취였다. 이에 단정히 ‘함이 없이[無爲]’ 눈을 감고 보는 것을 거두니, 마음이 엉기고 형상이 풀리며 천기(天機)가 움직이지 않아서 만물과 더불어 가만히 합하였다. 그래서 몽롱하게 잠이 드니 꿈에 신선이 내게 읍하며 말하기를, ‘괴로운 티끌 세상에 만 가지 일이 한 몸에 집중되어 그럭저럭 늙는 것이 이르러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내가 한 가지 비결이 있는데 말이 간단하고 긴요하다. 만물이 수없이 많은데 마음은 오직 고요하다. 물건마다 생각해 처리한다면 날마다 하여도 부족하고 정신을 어리어 고요하게 보면 백 가지 생각이 일치된다.’ 하였다. 말이 끝나자 보이지 않았다. 이에 꿈이 활짝 깨어 마음으로 가만히 스스로 말하기를, ‘신선은 누각에 사는 것을 좋아한다 하였는데, 아까 꿈에 보인 것이 이 다락의 주인이 아닌가. 그가 나를 가르쳤도다.’ 하였다. 얼마 뒤에 계인(鷄人 관직명)이 새벽을 알리고 민후가 벌써 와서 문안하였다. 꿈에 신선에게 들은 것을 말하니 후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허어 이것이 누의 기가 될 만하다.’ 하였다. 내가 생각건대 ‘함종(咸從)이 이름을 지은 뜻도 나타내어 밝혀야 하겠고 또 목은(牧隱)의 기가 있어 옛 다락 사이에 있으니, 새 다락은 나의 일이 아닌가 하고 이에 신선의 말을 써서 민후에게 주어 돌려 보내었다.’ 하였다.
『신증』 청량각(淸涼閣) 객관 북쪽에 있어 작은 못에 굽어 임하고 있다. 추월당(秋月堂) 서헌(西軒) 북쪽에 있다. 목사 정종보(鄭宗輔)가 세웠다. 한연당(閒燕堂) 주 동쪽 40리에 있다. 이항(李沆)의 별장이다. 남곤(南袞)의 기에, “이호숙(李浩叔)이 낙동강(洛東江) 서쪽 언덕에 땅을 잡아 밭 두어 이랑을 사서 집 3칸을 짓고 당에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니 긴 강은 시야(視野)에 미만(彌滿)하고 흰 모래는 자리를 펼친 것 같고 강 밖의 석벽은 수십 리를 두르고 청동산(靑銅山)은 연기와 구름, 아득한 아지랑이 밖에 숨었다 나타났다 하니 참으로 좋은 경치였다. 호숙이 즐거워서 돌아가기를 잊고 그 당에 편액(扁額)하기를 ‘한연(閒燕)’이라 하고 그 뒤에 내게 기(記)를 구하였다. 내가 한(恨)하기를 ‘낙수(洛水)가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남해로 들어가는데 그 중간이 수백 리뿐이 안 되나 저 영호(映湖)ㆍ월파(月波)ㆍ관수(觀水) 등의 여러 누각과 정자가 모두 국가의 소유가 되었으니, 망천(輞川)의 왕마힐(王摩詰)과 보리(甫里)의 육구몽(陸龜蒙)은 어찌 그렇게 사람이 없는가. 사람이 그 지경을 만나지 못한 것인가. 또한 기다림이 있는 것인가 한갓 붉은 단장과 푸른 눈섬은 보내고 맞는 사이에 떠들어대고 운산(雲山)과 풍월(風月)은 적막(寂寞)한 물가에 길이 한가하니 이것은 어찌 유감스러운 일이 아닌가.’ 하였는데 지금 호숙의 청함에 비로소 낙동강이 기다림을 알았고 나의 유감도 풀렸다. 한연(閒燕)의 뜻에 내가 무엇을 부연하여 말하리오. 군의 부친이 바야흐로 인의(仁義)의 말로 임금에게 진달하고 군이 또 인의의 정사로 영천(榮川) 백성에 임하니 이것이 평소에 한연(閒燕) 사이에서 얻어지지 않은 것이 없어서 당의 이루어짐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남은 온축이 없다. 그러나 한연의 도(道)가 어찌 여기에 그칠 뿐이랴. 현달하고도 행하지 못하면 조정에서도 한연할 것이요, 만일 어그러짐이 있으면 호산(湖山) 사이에서 한연할 것이니, 그러면 나오는 것도 인의로 하고 물러가는 것도 인의로 하여 일생의 쓰는 것이 모두 그 인의 속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호숙의 깊은 뜻이고 다른 사람은 엿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비록 무상(無狀)하나 이공 부자의 사이에서 교유함을 얻었으니 감히 이것으로 당 위의 기를 삼는다.” 하였다.
【학교】 향교(鄕校) 주 남쪽 5리에 있고 남루(南樓)가 있다. 선덕(宣德) 초년에 판목(判牧) 조치(曺致)가 세웠다. 홍여방(洪汝方)이 기를 지었다.
【역원】 낙양역(洛陽驛) 주 서쪽 3리에 있다. 낙동역(洛東驛) 낙동강 동쪽 1리에 있다. 낙원역(洛源驛) 주 북쪽 16리에 있다. 낙서역(洛西驛) 주 서쪽 19리에 있다. 낙평역(洛平驛) 주 남쪽 26리에 있다. 장림역(長林驛) 화령현(化寧縣) 동쪽에 있으며 주에서 51리다. 남원(南院) 주 남쪽 2리에 있다. 안빈원(安賓院) 주 동쪽 11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주 동쪽 19리에 있다. 이두등원(泥豆等院) 주 동쪽 36리에 있다. 요제원(要濟院) 주 동쪽 37리에 있다. 양산지원(陽山旨院) 주 남쪽 15리에 있다. 흥옥원(興玉院) 주 남쪽 9리에 있다. 서원(西院) 주 서쪽 3리에 있다. 어암원(於巖院) 주 서쪽 15리에 있다. 율원(栗院) 주 서쪽 33리에 있다. 부원(釜院) 주 북쪽 8리에 있다. 북원(北院) 주 북쪽 2리에 있다. 송원(松院) 주 북쪽 26리에 있다. 당제원(唐梯院) 주 북쪽 15리에 있다. 퇴산원(退山院) 주 북쪽 42리에 있다. 유등원(柳等院) 주 남쪽 24리에 있다. 죽현원(竹峴院) 죽현(竹峴) 아래에 있다. 대두원(大豆院) 주 남쪽 24리에 있다. 중생원(重生院) 중모현 남쪽에 있는데 주까지 65리다. 장혜원(長惠院) 중모현 서쪽에 있는데 주까지 72리다. 동원(東院) 중모현 동쪽에 있는데 주까지 56리다. 반암원(班巖院) 산양현(山陽縣) 서쪽에 있으며 주까지 57리다. 공성원(功城院) 주 남쪽 43리에 있다.
『신증』 【교량】 북천판교(北川板橋) 주 북쪽 5리에 있다. 남대교(南大橋) 주 남쪽 5리에 있다. 동술교(東述橋) 주 동쪽 5리에 있다. 양산지교(陽山旨橋) 주 남쪽 13리에 있다.
【불우】 용암사(龍巖寺) 만악산(萬嶽山)에 있다. ○ 고려(高麗) 황보탁(黃甫倬)의 기에, “만악산(萬嶽山)이 단밀현(丹密縣) 서남방 30여 리에 있는데, 태백산(太白山)으로부터 서리서리 연하여 일어났다 엎드렸다 하고 널브러져 모여드는 것이 얼마이지 알지 못하지마는 오직 이 산만은 영기를 품고 바탕을 온축(蘊蓄)하여 홀연(屹然)히 진산(鎭山)이 되었으니 상락(上洛) 사람들이 덕산이라 지목한다. 용암사(龍巖寺)가 위로는 뾰족한 산에 의지하고 아래로는 질펀한 물에 임하였으니 이것은 만악산이 미(美)를 모은 것이다. 옛날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통합(統合)한 처음에 이 산 동남 모퉁이에 좋은 땅을 정하여 절을 세우고 밭 6백 묘(畝)를 주고 나무할 땅을 붙여서 화엄(華嚴) 원교(圓敎)를 천양(闡揚)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 후에 해이(解弛)하고 폐한 지가 오래라 무너진 담과 깨어진 주추가 바위 언덕에 끼어 있고, 금병(金餠) 같은 땅은 변하여 기와쪽과 조약돌이 되었고, 연화(蓮花)의 지경이 모두 가시밭이 되어서 공허한 곳으로 도피하는 자가 혹 때때로 이르나 머무를 수가 없었다. 지난 갑오(甲午)년에 임금께서 친히 쓴 조서를 내리어 절의 주지(住持) 운미(雲美)에게 이르기를, ‘근래에 서쪽 사람들이 험고(險固)한 것을 믿고 우리에게 항거하여 변방 사람을 모아서 반역을 꾀하므로, 이에 원수를 명하여 성을 쳐서 토죄(討罪)하였는데 흉한 무리가 스스로 그물에 몸을 던질 뿐 아니라 우리 평민들도 화살과 돌에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부처의 힘에 의지하여 간난(艱難)한 것을 구제하려 하니, 바라건대 그대는 나의 불쌍히 여기는 뜻을 생각하여 부처께 기도하라.’ 하였다. 그리하여 주지 운미가 여러 종들과 함께 예전에 지나본 곳으로써 진(眞)을 서식(棲息)하고 법(法)을 강연(講演)하여 국가에 복리가 되게 할 만한 곳을 찾아다녔는데 그윽한 곳을 더듬고 좋은 곳을 가리어 이 절에 이르렀다. 측연(測然)히 흥복(興復)할 뜻이 있어 기계를 날카롭게 하고 재목과 기와를 수집하여 무술(戊戌)년 봄 3월에 시작하여 기해(己亥)년 11월에 준공하였으니, 모두 87일간이었다. 임금이 의정왕후(懿靜王后)의 명복을 비는 곳으로 만들어 밭 40경(頃)을 붙이고 또 내탕(內帑)의 재물로 벼 2천 석을 팔아들이어 학업을 권하는 것과 기름과 향의 비용에 충당하게 하고 고승(高僧) 지영(知英)을 명하여 주지(住持)하게 하였다. 슬프다! 석씨(釋氏)의 교가 가리고 몽매하여 거꾸로 놓여진 풍속으로 하여금 착한 데에 옮기어 죄를 멀리하고 순진한 데로 돌아가고 소박한 데로 돌아오게 하니, 실로 다스리는 도(道)에 도움이 있는 것이다. 저 서쪽 사람들이 성(城)을 바쳐 항복하여 피를 흘리지 않고 평정된 까닭과 그 공[陰功]과 묘한 힘이 대개 여기에 힘입음인지 어찌 알랴. 이제 이 용암사의 이루어짐에 있어서 역사가 너무 번거롭지 않고 제도가 지나치게 사치하지 않아서 앞사람의 기업을 변함이 없고 뒷사람의 보는 것을 폐함이 없었으니, 다만 능히 불사(佛事)를 크게 천양(闡揚)하기를 저렇듯 탁연(卓然)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주상(主上)께서 백성을 근심하고 폐단을 구제하는 뜻에 응부(應副)하기를 이렇듯 지극하게 한 것이다. 미사(美師)의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인데 명주(溟州) 사람이다. 젊었을 때에 깨끗하게 진세(塵世)에 뛰어날 뜻이 있어 치악산(雉岳山) 개선사(開善寺)의 윤공(胤公)의 강연 아래에 들어가 수업하여 넓은 학문과 높은 행실로 위로는 임금의 의지하고 공경하는 바가 되고 아래로는 배우는 자들의 쳐다보고 우러르는 바가 되었으니, 비록 도안(道安)의 예장(豫章) 기재(杞梓)와 규기(窺基)의 유단(流檀) 천혜(闡蕙)라도 어찌 여기에 더하리오.” 하였다.
승장사(勝長寺) 장천부곡(長川部曲)에 있다. ○ 김상직(金尙直)의 중창기(重創記)에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이 중국 조정의 명령을 받아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을 명하여 동으로 왜구(倭寇)를 정벌하는데, 왕이 김해부(金海府)에 거둥하여 전송하고 돌아올 때 이 절에 유숙하고 드디어 천태종(天台宗)에 붙이었다.” 하였다. 용담사(龍潭寺) 장천부곡(長部曲)에 있다. ○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빈 골짜기에는 바람이 오히려 소리치고, 찬 시내에는 물이 절로 내려 씻는다. 기르는 것은 지둔(支遁)의 말을 어여삐 여기고, 주문은 섭공(葉公)의 용을 내린다. 작은 채전(菜田)에는 신령스러운 삽주[朮]에 물을 주고, 그윽한 뜰은 어린 소나무를 보호한다. 한 소리 맑은 밤 경쇠소리, 달을 짝지어 먼 봉우리에 떨어진다.” 하였다. ○ 고려 김양경(金良鏡)의 시에, “가는 길은 구불구불하여 푸른 산비탈로 들어가고, 위태한 다락은 우뚝하여 푸른 무지개를 굽어본다. 새벽이 서늘한데 누런 송아지는 평평한 들로 돌아가고, 한낮이 되니 그윽한 새는 얕은 시내에서 목욕한다. 집에 가득한 담쟁이덩굴은 벽에 얽히어 컴컴하고, 창에 늘어진 버들은 처마를 눌러서 나직하다. 문 밖의 진흙에 깊이 사슴의 발자국 박혀 있는 것은 땅이 궁벽하여 이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하였다.
미륵암(彌勒庵) 사불산(四佛山)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에, “대원(大院)의 고개가 지맥(支脈)이 갈리어 동남쪽으로 둘러 갈라져 보주(甫州)ㆍ산양(山陽) 두 고을 경계에 이르러 불룩하게 높이 일어났는데, 산정(山頂)에 큰 돌이 있어 뿌리가 떠서 서있고 사면에 모두 부처의 몸을 새겼으니 그 때문에 사불산(四佛山)이라 이름하였다. 온 나라의 부처를 신봉하는 자들이 가장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봉우리는 법왕이고 그 남쪽 언덕 돌에 자씨(慈氏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얼굴을 새기고 옆에 작은 절을 지었는데 미륵암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에 창건(創建)한 것이고 암자 북쪽에 묘한 봉우리가 있어 멀리 사불(四佛)을 향하여 우뚝 서 있는데 신라 왕이 사불을 바라보고 예를 한 곳이라 한다. 세대가 멀어서 집이 무너져 풀숲이 되어버렸다. 전 판사(判事) 백진(白瑨) 공이 대대로 영해(寧海)에 살아오는데 계해(癸亥)년 봄에 왜구(倭寇)를 피하여 어머니를 엎고 자빠지고 미끄러지며 간신히 걸어서 두어 고을을 거쳐 이 산 아래로 왔다. 이듬해에 어머니가 병으로 죽으매 상사를 영위하고 복을 추원(追願)하여 있는 힘을 다하였다. 하루는 울며 산 중에게 고하기를, ‘내가 부모를 위해 정려(精廬)를 영건하여 명복을 빌어서 조금이라도 망극한 슬픔을 펴려 하는데 큰 상처의 아픔이 깊으므로 더욱 애통(哀痛)하다.’ 하였다. 중이 말하기를 ‘새 절을 창립하는 것은 나라에서 정한 법금(法禁)이 있다. 산에 미륵암이 있는데 신라 때 옛터가 폐하여 부흥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일으켜서 새롭게 하지 않는가.’ 하였다. 공이 눈물을 거두고 말하기를, ‘좋다’ 하고, 곧 가서 살펴보니, 샘과 구렁이 맑고 깊으며 지경과 땅이 시원하고 깨끗하며, 미륵보살[慈氏]의 상(像)이 완연하고 남은 터가 그대로 있었다. 마음에 맞는지라 곧 즐겁게 나가서 거칠고 가린 것을 베어내고, 자갈과 흙을 밀어버리고 집 칸을 세워 이중 처마를 붙이니, 당도 있고 부엌도 있고 반질반질하고 또 간단하며, 붉은 마룻대와 푸른 연목이 높고 크고 빛나고 아름다워 볼 만한데,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벽에 게시하고자 하나 아직 못하였다. 이때에 내가 일을 말하다가 성대(省臺)에게 거슬려서 영해(寧海)에 귀양와 있었다. 백공이 이미 고향에 돌아와서 두 번이나 청하므로 내가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이에 그 말을 써서 기록한다. 아, 세상 풍속이 부모를 섬김에 있어 겨우 상사와 장사를 영위할 뿐인데, 백공은 능히 예제(禮制)를 다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왜구를 피하여 떠돌아다닌 나머지 절을 창건하고 불경을 인출(印出)하여 유구 무궁한 복리와 신종 추원(愼終追遠)의 효도를 도모하니 남보다 한 등수가 높다 하겠다.”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천봉산(天峯山)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고적】 백화산(白華山) 옛날 석성(石城)이 있다. 둘레가 1천9백4척이고, 안에는 시내가 1개, 샘이 5개 있다. 지금은 폐하였다. 사벌국고성(沙伐國古城) 병풍산(屛風山) 아래에 있다. 성 옆에 높고 둥근 구릉(丘陵)이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사벌국의 왕릉(王陵)’이라 한다. ○ 신라(新羅) 말년에 견훤(甄萱)의 아비 아자개(阿慈介)가 이 성에 응거하였다. 화창현(化昌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지내미지현(知乃彌知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쳐 상주(尙州)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하였으나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공성폐현(功城廢縣) 본래 신라의 대병부곡(大幷部曲)이다.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에 붙이었다. 주 남쪽 30리에 있다. 영순폐현(永順廢縣) 본주(本州)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이다. 고려(高麗) 때에 촌 사람 태씨(太氏) 성을 가진 자가 도둑을 잡아 공이 있으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승격하여 현을 만들어서 그대로 붙이었다. 주 북쪽 35리에 있다. 청리폐현(靑里廢縣) 이(里)는 혹은 이(理)로 되었다. 본래 신라의 음리화현(音里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청효(靑驍)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붙였다. 주 남쪽 20리에 있다. 무림부곡(茂林部曲) 주 북쪽 30리에 있다. 예전 무흥촌(茂興村)이다. 연산부곡(連山部曲) 낙동강 동쪽 5리에 있다. 소금 창고가 있다. 백원부곡(白原部曲) 주 남쪽 15리에 있다. 양녕부곡(壤寧部曲)ㆍ하해부곡(河海部曲) 모두 본주에 있다. 양보부곡(陽寶部曲) 산양현(山陽縣)에 있다. 관제부곡(寬濟部曲)ㆍ선은소(鐥銀所) 모두 화령현(化寧縣)에 있다. 가량부곡(加良部曲) 주 남쪽 15리에 있다. 보량부곡(保良部曲) 주 동쪽 20리에 있다. 평안부곡(平安部曲)ㆍ평산부곡(平山部曲) 모두 공성현(功城縣)에 있다. 주선부곡(主善部曲)ㆍ단곡부곡(丹谷部曲)ㆍ생물부곡(生物部曲) 모두 단밀현(丹密縣)에 있다. 해상이소(海上伊所) 중모현(中牟縣)에 있다.
【명신】 신라 김유신(金庾信) 진덕왕(眞德王) 때에 백제(百濟)를 쳤는데, 공을 논하여 이찬(伊餐)으로 질(秩)을 더하고 상주행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 이등(伊登) 법흥왕(法興王) 12년에 대아손(大阿飡) 이등(伊登)을 군주(君主)로 삼았다.고려 이주좌(李周佐) 목종(穆宗) 때에 과거에 올라 상주목(尙州牧) 기실참군(記室叅軍)에 등용되었다. 김부일(金富佾) 숙종(肅宗) 때에 나가서 지키었다. 한충(韓冲) 사록(司錄). 정극영(鄭克永) 사록(司錄). 정항(鄭沆) 사록(司錄). 처음 고을에 이르매, 사람들이 젊어서 소홀히 여겼는데, 일에 임하여 잘 결단하매 모두 탄복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사록을 셀 때에는 두 정(鄭)과 한(韓)이라 하는데, 항(沆)과 극영(克永)과 충(冲)을 말함이었다. 양원준(梁元俊) 인종(仁宗) 때에 부사(副使)가 되었다. 정사가 청렴하고 근면하여 아전과 백성이 칭송하였다. 최유청(崔惟淸) 인종(仁宗) 때에 목이 되어 덕스러운 정사가 있었다. 최기우(崔奇遇) 과거에 합격하여 사록에 전보(塡補)되었다. 뒤에 목의 부사[牧副使]가 되었다. 최득평(崔得枰) 수(守)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그 은혜를 생각하였다. 최재(崔宰) 득평(得坪)의 아들인데 공민왕(恭愍王) 때에 목사로 나왔다. 신축(辛丑)년 겨울에 공민왕이 군사를 피해 남방으로 옮겨 이듬해 봄에 상주를 순행하매 재(宰)가 힘을 다하여 공봉(供奉)하고 판변[辦]하였다. 오직 털끝이라도 백성에게 상함이 있을까 두려워 먹이고 주는 것을 일삼지 않으매 구하다가 얻지 못한 자가 있어 조금 헐뜯었다. 윤해(尹諧) 사록이 되었다. 백성 중에 그 누이와 난행(亂行)한 자가 있었고, 이때에 극히 가물었다. 해가 장관과 다투어 극형에 그를 처하매 하늘이 과연 비를 내렸다. 김인경(金仁鏡) 좌천되어 목사가 되었는데 주위 벽에 쓰기를, “감히 하늘을 향하여 원망하는 생각이 있으랴. 귀양와도 오히려 성을 오로지함[專城 지방장관]을 얻었다. 어느 때에 영각(鈴閣 장수가 있는 곳)에서 황각(黃閣 정승이 있는 집)에 올라, 태수(太守)의 행차가 재상(宰相)의 행차로 될꼬.”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형부상서(刑部尙書) 좌복야(左僕射)가 되었다. 최자(崔滋) 강왕(康王) 임신(壬申)에 진사(進士) 과거에 뽑히어 예에 의하여, “상주사록참군사 겸장서기(尙州司錄參軍事兼掌書記)에 전보(塡補)되었다가 들어와 국학 학유(國學學諭)가 되었고, 뒤에 또 목사로 나갔다. 김지대(金之岱)가 시를 주기를, “일찍이 관기(管記)가 되었을 때는 얼굴이 옥 같았는데, 다시 오두(遨頭 태수(太守))가 되어도 살쩍이 아직 희지 않았다.” 하였다. 고사(故事)에 정월ㆍ동짓달 팔관회(八關會)와 탄신절(誕辰節)에 양계(兩界) 병마사(兵馬使)와 여러 목사 도호부사(都護府使)가 전(牋)을 올려 하례하면 중서문하(中書問下)에서 그 높고 낮은 차례를 정하여 방(牓)을 붙이는데, 상주(尙州)의 표전(表牋)이 반드시 일등을 차지하니, 문사(文士)들이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주는 도(道)의 으뜸이므로 옥 송사가 더욱 빈번하였는데, 최자가 이르는 날엔 판결하기를 귀신같이 하니, 아전과 백성이 아끼고 두려워하여 윤상(倫常)을 어지럽히고 강기(綱紀)를 범하는 자가 없어서, 얼마 안 되어 옥이 비어서 지경 안에 화한 기운이 돌아 태평하게 되었다. 기한이 차지 않아서 보문각 대제(寶文閣待制)로 소환하였으니, 대개 그 특수한 포장(褒獎)을 보인 것이다. 김부의(金富儀) 판관(判官)이 되었다. 안유(安裕) 판관이 되었다. 그때에 여자 무당 세 사람이 있어 요망한 귀신을 받들고 민중을 미혹하여 합주(陜州)로부터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는데, 가는 곳마다 사람의 소리를 지어 공중에서 불러서 은은하게 갈도(喝道)하는 소리 같으매, 듣는 자들이 서둘러 제사를 베풀어서 감히 뒤지는 자가 없고, 비록 수령(守令)이라도 또한 그러하였다. 상주에 이르매 안유가 곤장을 때려 칼을 씌웠다. 무당이 귀신의 말로써 화복(禍福)으로 유혹[怵]하니, 상주 사람이 모두 두려워하나 유가 움직이지 않았다. 두어 날이 지난 뒤에 무당이 애걸하므로 석방하였는데, 그 요괴(妖怪)가 드디어 없어졌다. 3년 만에 염사(廉使)가 그 맑은 정치를 포장하여 불러서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 삼았다. 정운경(鄭云敬)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올라 사록(司錄)에 전보되었다. 용궁감무(龍宮監務)가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하는 자가 있으매, 안렴사(按廉使)가 운경을 보내어 국문하게 하였다. 운경이 용궁에 이르러 물어 보지도 않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관리가 탐하고 더러운 것이 비록 악덕(惡德)이라고는 하지마는, 재주가 족히 법을 농간하고 위엄이 족히 사람을 두렵게 할 만한 자가 아니면 하지 못하는 법인데, 지금 감무가 늙고 또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니, 누가 뇌물을 주려 하겠는가.” 하였다. 안렴사가 과연 거짓인 것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근래에 관리들이 가혹한 것을 숭상하는데, 사록은 참으로 장자(長者)로다.” 하였다. 안축(安軸) 충혜왕(忠惠王) 때에 검교평리(檢校評理)로 나와서 목사가 되었다. 최중청(崔仲淸) 판관이 되었다.본조 권집경(權執經) 지신사(知申事)로 물러나와 고향에 살고 있었는데, 특별히 천거하여 목사로 삼았다. 박이창(朴以昌) 교수(敎授)가 되었다. 이인손(李仁孫) 관찰사(觀察使)로 목사를 겸하였다. 조오(趙峿) 판관이 되었다. 김구(金鉤) 목사가 되었다. 이전수(李全粹)ㆍ유문통(柳文通) 모두 목사가 되었다.
『신증』 정종보(鄭宗輔) 목사가 되었는데 백성이 복종하고 아전이 두려워하였다.
【인물】 고려 김득배(金得培) 고을 아전 김조(金祚)의 딸이 만궁(萬宮)인데, 나이 일곱 살에 부모가 거란(契丹)의 군사를 피하여 백화성(白華城)으로 가다가, 군사가 쫓아오자 길 옆에 버리고 달아났다. 사흘 뒤에 수풀 밑에서 찾았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밤이면 무슨 물건이 와서 안아주고 낮이면 갔다.”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는데 곧 호랑이였다. 15세가 된 뒤에 호장(戶長) 김밀(金謐)에게로 출가하여 록(祿)을 낳았고, 록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맏아들이 득배(得培)이다. 과거에 올라 예문 검열(藝文檢閱)이 되고, 전객 부령(典客副令)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원(元) 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하였는데, 왕이 즉위한 뒤에 우부대언(右副代言)을 제수하고, 6년에 서북면 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가 되고, 조금 뒤에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제수하고, 인하여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삼아, 서경윤 상만호(西京尹上萬戶)를 겸하였다. 7년에 홍두적(紅頭賊)의 위평장(僞平章) 모거경(毛居敬)의 무리가 의주(義州)를 함락시켜 부사(府使) 주영세(朱永世)와 고을 백성 천여 명을 죽이매, 득배가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군사를 거느려 진격하였는데, 모두 아홉 번 싸워서 개가(凱歌)를 아뢰고 돌아와서, 수충보절 정원공신 정당문학(輸忠保節定遠功臣政堂文學)을 제수하였다. 10년에 홍두적이 또 삭주(朔州)를 공격함에, 득배가 도병사(都兵使)가 되어 안우 이방실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쳤다. 적이 서울을 함락하매 군사를 내어 머리 10여 만을 베니, 적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김용(金鏞)이 득배의 무리가 큰 공을 이루어 왕이 총애할까 두려워하여 안우(安祐)의 무리를 시켜 정세운(鄭世雲)을 죽이고, 이로써 죄를 만들어 득배를 죽이니, 듣는 자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선치(金先致) 득배의 아우이다. 낭장(郞將)으로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유탁(柳濯)을 따라 왜적(倭賊)을 쳐서 손으로 수십 명을 죽였다. 여러 번 옮기어 호부 낭중(戶部郎中)이 되었고, 공민왕(恭愍王) 때에 원수 이암(李嵒)을 따라 적을 쳐서 일등으로 녹공(錄功)되어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뽑히었다. 홍두적이 서울을 함락하여 여러 장수를 따라 수복(收復)하였다. 여러 번 벼슬을 옮겨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나아가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고,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승진하였다. 신우(辛禑) 때에 낙성군(洛城君)으로 봉하여졌다. 김득제(金得齊) 득배(得培)의 아우이다. 벼슬이 삼사 우사(三司右使)에 이르렀다. 김수자(金守雌) 과거에 합격하여 금양현위(金壤縣尉)에 조용(調用)되었다. 인종(仁宗) 때에 사관(史館)을 맡았는데 ‘이자겸(李資謙)의 난’에 궁궐이 연소되자, 수자가 금중(禁中)에서 받들다가 국사(國史)를 지고 산호정(山呼亭) 북쪽에 땅을 파고 감추어서 불타지 않았다. 한림원(翰林院)으로 옮겼는데, 어머니가 늙었으므로 고을을 나가 예주 방어사(禮州防禦使)가 되었다가 죽었다. 의종(毅宗) 때에 이부(吏部)에서 아뢰기를, “수자가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국사를 옮겨 감추었는데, 현저한 포상을 받지 못하였으니 매우 아까운 일이라.” 하였다. 명령하여 이부 시랑(吏部侍郞)을 증직하였다. 이민도(李敏道) 원(元) 나라 하간부(河間府) 사람인데, 순제(順帝) 말년에 병란을 피하여 동쪽으로 왔다. 나라에 공이 있으므로 상산군(商山君)을 봉하고, 명하여 상주로 본관(本貫)을 삼았다.
본조 박안신(朴安臣) 과거에 올라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고,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태종(太宗) 때에 대관(臺官)이 되어 일을 말하다가 좌죄되어 목을 베이게 되었다. 얼굴빛이 변하지 않고 한 절구(絶句)를 읊조리기를, “수(數)가 천년을 당하였으니 황하수(黃河水)가 응당 맑아질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군왕께서 지극히 성명(聖明)하다 하였는데, 내 직책을 받들지 못하였으니 달게 죽음을 받지마는, 임금께서 간신(諫臣)을 죽였다는 이름을 얻을까 두려워하노라.” 하였다. 뾰족한 사금파리로 땅에 그어 글자를 만들고 눈을 부릅뜨고 옥(獄) 아전에게 말하기를, “이 시를 상감께 드리렸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악귀(惡鬼)가 되어서 너의 씨붙이를 남기지 않겠다.” 하였다. 태종이 듣고 위엄이 가라앉아서 용서하였다. 뒤에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해적을 만났다. 적이 칼을 빼들고 함부로 배 속에 뛰어들어 행구(行具)를 약탈하는데, 안신이 큰 상에 걸터앉아 꿈적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지휘하니, 적이 두려워서 감히 가까이하지 못하므로 일행들도 힘입어 안전하였다. 아들 이창(以昌)이 또한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항직(抗直)하여 사람에게 굽히지 않았다. 김사우(金師禹) 무과에 올라 벼슬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김상직(金尙直)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에 이르렀다. 황효원(黃孝源) 갑자(甲子)년 과거에 장원으로 뽑히었다. 좌익좌리공신(佐翼佐理功臣)에 참여하여 상산군(商山君)으로 봉해졌다.
【우거】 고려 조운흘(趙云仡) 전법 총랑(典法摠郞)으로서 관직을 사퇴하고 와서 노음산(露陰山) 밑에 살며 스스로 석간(石磵) 서하옹(棲霞翁)이라 이름하고, 거짓으로 미쳐 스스로 도회(韜晦)하여 출입할 때는 반드시 소를 탄다. 기우도찬(騎牛圖贊)와 석간가(石磵歌)를 지어서 뜻을 보였다. 자은사(慈恩寺) 중 종림(宗林)과 더불어 방외(方外) 친구가 되어서 초연(超然)히 세상 밖의 의상이 있었다. 양주(楊州)에 자세히 보였다.
【효자】 고려 신우(申祐) 벼슬이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그 아버지 판도판서(版圖判書) 원유(元濡)가 죽자, 우가 3년 동안 여막에서 지냈다. 무덤 앞에 대 두 그루가 나니 사람들이 효도의 감응(感應)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일이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신증』 본조 박세연(朴世延) 어버이를 효도로써 섬기고 돌아가시자 장사와 제사에 예를 다하여 3년 동안 여막에 있어 한 번도 집에 이르지 않았다. 상(喪)이 끝나도 배회하며 차마 가지 못하고 두어 날을 통곡하니, 동네 사람들이 감동하여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날마다 반드시 새벽에 사당에 뵙고 초하루 보름으로 제사를 그치지 않았다.
【열녀】 본조 김씨(金氏) 김심(金潯)의 아내이다. 나이 17세에 심이 죽자 머리를 깎고 신의를 지켜 그 몸을 마쳤다.
『신증』 정씨(鄭氏) 교리(校理) 권달수(權達手)의 아내이다. 연산(燕山) 갑자(甲子)년에 달수가 피살되었는데, 정씨가 그때 함창(咸昌) 촌집에 있었다. 먹고 마시는 것을 입에 넣지 않은 지 무릇 60여 일에 그 종에게 말하기를, “지금까지 참고 살아온 것은 남편의 유해가 돌아와 장사하기를 기다려서 뼈를 그 곁에 의탁하렸더니, 기력이 이미 다하였으니 내가 죽을 것이다.” 하고 통곡하다가 운절(殞絶)하였다. 지금 임금 2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지형진사호기복(地形眞似虎起伏)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상주는 옛날의 사벌국(沙伐國)이다. 왕후(王侯)의 제택(第宅)이 남은 터도 없다. 간과로(干戈)로 백 번 싸운 생사(生死)의 땅에 오직 강산만이 성쇠(盛衰)를 꺾어 왔다. 나라 깨어져 고을 되고 고을이 나라됨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때만이 아니리라. 땅 형세는 흡사 호랑이가 일어났다 엎드렸다 함과 같아서 어찌 그리 담 두르듯 천리를 에둘렀노. 가고 옴에 피곤하여 누웠으니 날은 저물어, 기관(寄觀)에 눈을 붙여 끝까지 찾을 겨를 없었다. 날 밝자 나가 놀아 시험삼아 고루 보니, 고기 비늘 같은 집에 용트림한 듯 보이도다. 나비 같은 눈썹(고을의 기생들) 나란히 절하는데 환패(環佩)가 운다. 자운(紫雲)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 누구인지 알겠는가.” 하였다. ○ 사벌구기유승경(沙伐舊畿猶勝景) 하륜(河崙)의 시에, “사벌의 옛 왕기는 아직도 좋은 경치이고, 서라(徐羅)의 남은 풍속은 스스로 순박한 풍토로다.” 하였다.
○ 불견구주낙수중(不見龜疇洛水中) 정발(鄭潑)의 시에, “완연히 자지곡(紫芝曲)을 상산(商山) 속에 듣겠는데, 귀주(龜疇)는 낙수 가운데에 보지 못하도다. 사벌(沙伐)의 유적을 물을 곳이 없으니, 수천 년의 일을 시공(詩工 시(詩)하는 사람)에게 부친다.” 하였다. 거읍고상락(巨邑跨商洛) 김조(金銚)의 시에, “큰 고을은 장산과 낙수에 걸쳐 앉았고, 위태한 다락은 조망이 멀고 밝다.” 하였다. 천년낙수서응출(千年洛水書應出) 박원형(朴元亨)의 시에, “천년 낙수에는 글이 응당 나올 것이요, 만고 상산은 골이 스스로 깊도다.” 하였다. 여정천구원(閭井千區遠) 권맹손(權孟孫)의 시에, “여항 우물은 물 천 구역이 멀고, 구름산은 만겹이 맑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선조(宣祖) 29년에 관찰사영(觀察使營)을 대구로 옮겼다.
【영아】 좌영(左營) 인조조에 설치하였다. ○ 좌영장 겸 토포사가 1명이다. ○ 속읍은 상주ㆍ개령(開寧)ㆍ금산(金山)ㆍ지례(知禮)ㆍ함창(咸昌)이다. ○ 감영(監營) 본조 태조 원년에 경주에서 관찰사영을 상주로 옮겼다. 세종 31년에 관찰사로서 목사(牧使)를 겸하였다가 얼마 안 있어 파하였고, 세조 때 목사로서 우도 병마절도부사(右道兵馬節度副使)를 겸하였다가 이윽고 파하였다. 선조 29년에 영(營)을 대구로 옮겼다. 대구편에 보라.
【토산】 수정석(水晶石)ㆍ송이[松蕈]ㆍ종이[楮]ㆍ꿀[蜂蜜].
【성지】 화령고현성(化寧古縣城) 서쪽으로 50리에 있는데, 견훤성(甄萱城)이라고 전해지나 잘못이다. 고성(古城) 서북쪽으로 50리에 있으며 성산(城山)이라 일컫는데, 곧 화창현성(化昌縣城)이며 남은 터가 있다.
【누정】 진남루(鎭南樓)ㆍ이향정(二香亭)ㆍ영빈관(迎賓館) 북쪽 5리에 있다.
【진도】 송라진(松羅津) 용궁(龍宮) 하풍진(河豐津) 아래다. 비만봉(飛鸞峯) 송라진 아래다. 죽암진(竹巖津) 비만진 아래다. 낙동진(洛東津) 죽암진 아래며, 동래 대로(大路)로 통한다.
【교량】 북천교(北川橋) 북쪽으로 5리에 있다. 남대교(南大橋) 남쪽으로 5리에 있다. 동미교(東迷橋) 동쪽으로 5리에 있다. 양산지교(陽山旨橋) 남쪽으로 13리에 있다.
【창고】 읍창 3ㆍ단밀창(丹密倉)ㆍ공성창(功成倉)ㆍ중모창(中牟倉)ㆍ산양창(山羊倉)ㆍ화령창(化寧倉)ㆍ청리창(靑理倉)ㆍ외서창(外西倉) 서북쪽으로 10리, 곧 화창(化昌)의 옛 현이다.
【사원】 도남서원(道南書院) 선조 병오년에 세우고, 숙종 정사년에 사액하였다. 정몽주ㆍ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 함께 문묘편에 보라. 노수신(盧守愼) 충주편에 보라. 유성룡(柳成龍) 안동편에 보라. 정경세(鄭經世)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며 진주 사람이다. 벼슬은 이조 판서 전문형 증좌찬성(吏曹判書典文衡贈左贊成)이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 옥동서원(玉洞書院) 선조조에 세우고 정조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황희(黃喜) 태묘(太廟) 편에 보라. 전식(全湜)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이며 옥천(沃川) 사람이다. 벼슬은 대사헌 증영의정이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흥암서원(興巖書院) 숙종 임오년에 세우고 영조 병진년에 어필(御筆)로 현판을 썼다. 송준길(宋浚吉) 문묘편에 보라.
○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 임진왜란 때 여러 의사들이 순절(殉節)한 곳이다. 정조 임자년에 이름을 내렸고, 상단(上壇)에는 4명의 종군자[從事]를 배향하고 하단에는 전사자를 배향하였다. 윤섬(尹暹) 자는 여진(汝津), 호는 과재(果齋)이며 남원(南原) 사람이다. 벼슬은 교리 증영의정이고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경류(李慶流) 자는 장원(長遠)이며 한산(韓山) 사람이다. 벼슬은 예조 좌랑 증도승지(禮曹佐郞贈都承旨)다. > 박호(朴箎) 자는 대건(大建)이며 밀양(密陽) 사람이다. 벼슬은 홍문 교리(弘文校理)다. 김준신(金俊臣).
[주-D001] 황장(黃腸) : 
임금의 관을 만드는 데 쓰던, 질이 좋은 소나무로, 황장목이라고도 한다.
[주-D002] 긍당긍구(肯堂肯構) : 
아비가 창업을 하면 자식이 이어서 성공하는 것을 말한다.
[주-D003] 춘복(春服)이……즈음 : 
증점(曾點)이 말하기를, “봄옷[春服]이 만들어지면 아이 6ㆍ7명과 관자(冠者) 5ㆍ6명과 더불어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쐬고 읊으며 돌아오겠다.[詠而歸]”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내가 증점을 허여한다.[吾與點也]” 하였다.
[주-D004] 젊은이를……묘(妙) : 
‘젊은이는 품어주고(少者懷之)……’는 《논어》 공야에, ‘편안하게(綏之斯來)……’는 《논어》 자장에 나온 말인데, 앞의 구절은 공자가 자기의 뜻을 말한 것이요, 뒤의 구절은 자공(子貢)이 공자의 덕을 칭호한 말이다.
[주-D005] 뜨거운……맑아지고 : 
《맹자》 이루에 “천하에 무적의 왕이 되기를 바라면서 인정(仁政)을 행하지 않는 모순은 ‘뜨거운 손을 빨리 물에 가서 담그지 않는[誰能執熱逝不以濯]것’과 같다.”는 《시경》 대아 상유의 구절을 인용한 것을 약간 변형해서 한 말이다.
[주-D006] 초(貂)를 속(續)한다 : 
초(貂)가 부족하여 개꼬리로 잇는다는 옛말이 있는데, 다른 이의 하던 사업을 자기가 잇는 것을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주-D007] 상안(商顔) : 
상안(商顔)은 곧 상산(商山)인데 한 고조(漢高祖) 때에 사호(四皓)가 숨어 있던 산이름이다.
[주-D008] 신선은……좋아한다 : 
선인(仙人)이 누거(樓居)를 좋아한다는 것은 공손경(公孫卿)의 말임. 황제(黃帝) 때에 누(樓)를 지어서 신인(神人)을 기다렸다 함.
[주-D009] 육구몽(陸龜蒙) : 
당 나라 사람인데 높고 소방(疏放)하여 송강(松江) 보리(甫里)에 살면서 강호산인(江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였음. 뒤에 고사(高士)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주-D010] 원교(圓敎) : 
불교의 한 종파 이름임.
[주-D011] 연화(蓮花) : 
불사(佛寺)를 말함. 불좌(佛座)를 연대(蓮坮)라 함.
[주-D012] 천태종(天台宗) : 
불교의 한 종파이다. 북제(北齊)의 혜문선사(慧文禪師)가 천태산(天台山)에 살았기 때문에 이름한 것임.
[주-D013] 지둔(支遁) : 
진(晉) 나라 임려(林慮) 사람인데, 여항산에서 도를 닦아 25세에 도에 들어갔다. 뒤에 낙양에서 죽었다.
[주-D014] 섭공(葉公) : 
《장자(莊子)》에 섭공(葉公)이 용을 좋아한다 하였고, 후진(後秦) 때의 중 섭(涉)이 바리[鉢] 가운데에 용이 내려오게 하였다.
[주-D015] 신종 추원(愼終追遠) : 
신종은 상사(喪事)에 예를 다하는 것을 말한 것이요, 추원은 제사에 예를 다하는 것을 말함.
[주-D016] 관기(管記) : 
문독(文牘)을 관리(管理)하는 직책.
[주-D017] 갈도(喝道) : 
고관(高官)이 행할 때에 앞잡이가 소리를 외치며 행인을 금지하는 것을 갈도(喝道)라 함.
[주-D018] 자운(紫雲) : 
두목(杜牧)이 어사(御史)가 되어서 이원(李愿)의 연회석에서 이원에게 묻기를, “들으니 자운(紫雲)이라는 기생이 있다는데 누구인가.” 하매, 이원이 가르쳐 주었다. 두목이 한참 주목하여 보더니, “명불허득(名不虛得)이로다.” 하였다.
[주-D019] 자지곡(紫芝曲)을……듣겠는데 : 
상산 사호(商山四皓)의 자지가(紫芝歌)를 말함.
[주-D020] 귀주(龜疇) : 
홍범 구주(洪範九疇)를 말함. 황제(黃帝) 때에 귀서(龜書)를 낙수에서 얻었는데, 귀주가 곧 그것임.
[주-D021] 박호(朴箎) : 
원문에는 박지(朴篪)로 되어있으나 《국조방목》과 《국조인물지》에 의거하여 박호(朴箎)로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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