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개입 ‘가정법’ 기술…전두환 회고록 ‘거짓’ 다시 확인 [5공 전사-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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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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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가장 큰 원인 꼽은 건

“박정희 정권에서 기인한

호남인들의 소외의식”

북한 개입 근거로 드는 건

고정간첩·불순분자 표현뿐


‘5·18민주화운동 북한군 개입설’은 5·18 폄훼 중 가장 악의적이다. 2013년 박근혜 정부가 공식적으로 “5·18 북한군 개입설은 허위”라는 입장을 밝혔고 법원 역시 “사실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는데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5·18 폄훼세력은 멀쩡한 시민들을 ‘북한군 특수부대원(일명 광수)’이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 9월14일 공포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의 진상규명 범위에는 ‘북한군 개입 여부 및 북한군 침투조작사건’이 포함돼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87) 역시 지난해 출간한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했다. 무려 18군데에 이른다. 그는 “북한 특수군이 아세아자동차에 집결해 장갑차를 끌고 나갔다”거나 “대검을 사용해 시민을 살해한 것은 계엄군이 아닌 북한 특수군”이라고 주장했다. 또 “북한 특수군이 교도소 습격에 개입했고 5월22일 수백을 헤아리는 정체불명의 청년들이 나타났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 2년 뒤인 1982년 5월 전 전 대통령의 지시로 신군부의 손으로 완성된 <제5공화국 전사>는 5·18 당시 북한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경향신문이 확보한 <5공 전사>에는 5·18 당시 북한이 개입했거나 무장공비 등이 침투했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이를 부정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

<5공 전사>는 무장공비 등 북한군 특수부대도 5·18 기간 침투한 사실이 없음을 명확히 하고 있다. <5공 전사>는 ‘광주사태의 교훈’을 서술하면서 “만일 광주사태 기간 중 무장공비들이 대거 침투하여 폭동사태에 가세했었다면 광주사태는 더욱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을 것임은 물론 국가의 생존마저 위협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형태의 사회적 소요나 폭력사태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5공 전사>는 5·18로 인해 북괴가 남침 준비를 하는 등 하마터면 더 큰일로 번질 수 있었다는 불안감만 조장하고 있다. “북괴는 광주사태를 그들이 말하는 소위 ‘결정적인 시기’가 도래하였다고 보고 전 인민에 대한 동원령을 선포하고 휴가 장병 귀대 명령을 내리는 한편, 근래에 없던 최고 군사회의를 계속하면서 광주사태를 악화시켜 전국적인 확대를 획책하기에 급급했다”고 서술하는 식이다.

<5공 전사>는 “광주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고 수일 만에 평정되고 정국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하자 북괴는 매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적었다. <5공 전사>에 나오는 ‘북한 개입’ 근거는 ‘고정간첩이나 일부 불순분자의 선동’이라는 표현이 거의 유일하다. 5·18과 북한을 엮은 것은 국민들에게 ‘사회 혼란’이 초래할 수 있는 최대의 위기를 부각시키기 위한 협박용이었던 셈이다.

통일부 남북회담 대화록엔

5·18 나흘 뒤 접촉 때 북측

“남측이 우리를 이용했다

대화상대방에 대한 도발”


<5공 전사>는 5월22일 판문점에서 남북 총리회담을 위한 제8차 실무자접촉회의가 열렸다고도 설명하고 있다. 통일부 남북회담본부에는 당시 회담 대화록이 남아 있다. 남측은 어수선한 정국 상황에서도 1980년 2월부터 8월까지 무려 10차례에 걸쳐 북한과 남북 총리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대표 접촉을 이어갔다. 제8차 실무접촉은 5월22일 오전 10시부터 낮 12시24분까지 판문점 북측지역인 ‘판문각’에서 종전의 비공개회의와는 달리 쌍방 합의에 따라 공개회의로 개최됐다. 이날 총리회담 준비를 위한 쌍방 대표들은 의제 문제에 대해 협의할 예정이었으나 북측이 남측이 학원소요 및 5·17 비상계엄 확대 문제에 자신들을 이용했다며 항의해 토의에 들어가지 못했다.

회담 대화록에 따르면 당시 북측 수석대표 현준극은 “의제 문제만 타결되면 남북 간 총리 접촉이 이루어질 수 있는 시기에 북과 남의 관계를 격화시키고 실무대표 접촉 앞에 난관을 조성하여 이 접촉을 위태롭게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면서 “남조선 당국은 최근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북의 대남적화 책동이 격증했다. 남침의 결정적인 시기를 노린다’는 등 우리를 걸고 들어가 북의 위협 때문에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있는데 이것은 대화 상대방인 우리에 대한 도발”이라고 했다.

이날의 회담은 5월6일 판문점 남측 자유의집에서 열린 7차 접촉에서 이미 합의된 일정이기도 했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는 “5·18 당시 광주에 북한군이 투입됐다면 예정됐던 남북회담이 취소됐거나 열렸다고 해도 남측 대표가 북한에 강력하게 항의했어야 한다”면서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는 오히려 북측이 ‘남한이 자신들을 이용한다’며 비난했다. 5·18에 북한 개입이 없었다는 명확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신군부는 5·18의 가장 큰 원인으로 ‘북한군 개입’이 아닌 “박정희 정권에서 기인한 ‘지역감정’ ”을 꼽았다. <5공 전사>는 “가장 큰 요소로는 호남인들의 소외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소외의식이란 5·16 이후 박 대통령이 주도한 제3공화국 당시 주로 경제정책의 시행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난 영호남의 지역차별설, 호남 푸대접설 등 호남주민들이 느껴왔던 일종의 피해의식”이라고 기록했다. 또 “광주유혈소요사태의 주요 발단 동기는 다년간 누적되었던 지역감정이고 5·17조치로 김대중이 연행되자 호남인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판단하였고 이러한 상황을 악용한 김대중 추종세력의 사태악화 유도 및 배후조정 탓”이라고 서술했다.

아무도 믿지 않던 ‘5·18 북한 개입설’은 2006년 탈북자 단체인 ‘자유북한군인연합’의 주장으로 확산됐다. 이 단체는 2009년 탈북자 16명의 증언을 엮은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에서 “북한에 있을 당시 광주에 투입됐다는 특수부대에 대해 들었다”는 식의 확인되지 않는 내용을 담았다. 일부 세력은 이를 근거로 “5·18에 북한군 특수부대가 투입됐다”며 멀쩡한 시민들을 ‘북한 특수부대원’이라 지목하며 확산시키고 있다. 전 전 대통령도 그중 하나다.

김희송 전남대 교수

“북한군 실제 투입됐다면

남북 만남 취소되거나

남측이 강력 항의했을 것”


김 교수는 “ ‘5·18 북한군 개입설’은 5·18 폄훼세력에 의해 기획된 것으로 역사적 정의와 과거사 청산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이라며 “당초 북한군 개입을 부정했던 전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갑자기 이를 인용한 것은 ‘5·18 유혈진압은 북한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것이었지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게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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