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전사-3화

상부 지시로 광주역서 첫 발포…신군부 핵심이 증언 ‘물증’

2018.10.11 06:00 입력 2018.10.11 10:21 수정 강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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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0일 광주역 난사 관련
“드디어 자위권 발동” 묘사

3공수 상위 조직 ‘2군사령부’
발포 금지 지시 내렸지만
다음날 오전까지 발포 계속
공식 아닌 ‘별도 지휘’ 받은 듯

“데모 군중 앞에서 겁내지 말고 과감히 행동하라.”

경향신문이 국방부와 소송을 통해 확보한 <제5공화국 전사>는 1980년 5월20일 광주역에 도착한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이 작전 투입을 앞두고 있던 부하 장병들에게 이렇게 훈시했다고 적었다.

3공수는 이날 오후 11시쯤 광주역 앞에서 시민들에게 M16 소총을 쐈다. 5·18 2년 뒤 편찬된 <5공 전사>는 최세창의 증언을 토대로 당시 상황에 대해 “자위권 발동의 지시가 있었으나 인내와 극기로 버티어 왔던 계엄군들은 드디어 자위권을 발동하였다”면서 “이날 밤 11시경 광주소요의 발발 이래 최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고 기록했다.

광주역 앞 발포가 ‘자위권 발동 지시’에 의해 이뤄졌다는 것이다. 모두 10명의 총상 사상자(사망 4명·부상 6명)가 발생한 이날의 발포는 사실상 광주에서의 첫 집단발포였다. 5월21일 오후 1시쯤 이뤄진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보다도 14시간 빠르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에게 자위권 발동을 지시한 사람을 찾는 일은 학살 책임자를 밝히는 일에 닿아 있다. 1996년 검찰 수사와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에서 5·18 당시 발포 경위를 조사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당시 조사는 5월21일 발포 경위를 조사하는 데 집중됐지만 발포 지시자나 동의한 책임자를 밝혀내지 못했다.

신군부는 “자위권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으로 발동됐다”는 주장을 되풀이해 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도 지난해 발간한 회고록에서 “계엄사령관 지시 이전에 3공수 등이 발포한 것은 정당방위권 행사였으며 상부나 어느 누구의 발포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계엄군이 밝힌 당시 자위권 발동 경위는 이렇다. 도청 앞 집단발포 이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21일 오후 7시30분 ‘자위권을 보유하고 있다’고 천명했으며 1시간 뒤 자위권을 발동했다. 전국의 계엄군들에게는 5월22일 낮 12시를 기해 자위권 발동 지시가 하달됐다.

자위권 발동에 대해 <5공 전사>는 “계엄당국의 자위권 발동 결심은 현지 계엄군들에게 참으로 시의적절하고 유효한 조치였다. 이는 계엄군의 자위권 행사가 그 뒤 여러 번의 중요한 고비에서 계엄군으로 하여금 광주사태의 더 이상의 확대와 악화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발동 지시가 있기 하루 전 공수부대는 이미 자위권을 발동하며 발포를 시작했다. <5공 전사>는 5월20일 3공수의 발포 상황에 대해 “계엄군 대대장은 메가폰을 들고 ‘우리는 이 자리에서 목숨을 바쳐야 한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간결하고도 비장한 훈시를 하였다. 선량한 시민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인내와 극기로 버티어 왔던 계엄군들은 드디어 자위권을 발동했다”고 묘사했다.

최세창(왼쪽)과 1980년 5월27일 옛 전남도청을 무력진압한 당일 도청을 방문해 웃고 있는 당시 전교사령관 소준열.

3공수여단장이던 최세창도 1994년부터 지속된 검찰의 12·12 군사반란 및 5·18 수사에서 자위권을 발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1995년 4월 두 번째 검찰 심문에서 “5월20일 22시30분경 여단 정보참모에게 11대대에 경계용 실탄을 전달해 주도록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실탄 전달은 발포해도 좋다는 것이냐”는 검사의 심문에 최세창은 “자위권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경우라면 발포를 해도 좋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당시 3공수에 실탄이 분배되고 발포 명령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보안사의 문건에서도 드러난다. 지난해 5·18기념재단이 공개한 505보안대의 기밀문서에는 ‘(20일) 23시15분 전남대 부근 병력에 실탄 분배 및 유사시 발포 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고 적혀 있다. 전남대 부근에 있던 병력은 3공수였다. <5공 전사>나 검찰 조사 내용, 시간과 상황이 거의 일치하는 기록이다.

결국 5월20일 3공수에 발포 명령을 지시 또는 하달한 상부가 있었다는 증거다. 하지만 최세창은 “발포 명령을 받았느냐”는 검찰의 심문에는 “당시 다른 사람과 상의할 겨를도 없었고 시간도 없어 혼자 결정한 것”이라며 “사전에 보고하거나 승인을 받은 바 없다”고 답했다.

단독 결정이었다는 주장이지만 믿기 어렵다. <5공 전사>는 ‘자위권’은 계엄군 최고 지휘관도 혼자 결정할 수 없는 문제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5공 전사>는 5월21일 계엄당국의 자위권 결정 과정을 설명하면서 “2군사에서는 참모총장을 뵙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 참모총장 이희성 장군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에게 보고하자고 했다”고 적었다.

당시 3공수가 공식적인 지휘계통을 따르지 않고 별도 지휘를 받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정황도 있다. 3공수를 작전통제하고 있던 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2군 지시 및 조치사항’ 문건에는 5월20일 오후 11시20분 ‘군 작전지침 추가 지시’를 통해 ‘발포 금지, 실탄 통제’를 지시한 것으로 기록됐다. 3공수는 이를 따르지 않고 다음날 오전까지 발포를 계속했다. 최세창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제1공수여단장일 때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5공 전사>가 기록하고 있는 ‘5월20일 자위권 발동’에 대해 5·18 연구자들은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추천된 이성춘 송원대 국방경찰학과 교수는 “3공수는 5월20일 상부로부터 이미 자위권 발동 지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 만큼 지시를 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면서 “5월20일 3공수가 발포를 했기 때문에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도 공수부대가 또다시 집단발포를 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3공수가 자위권을 통해 발포를 했다는 사실은 ‘발포 명령자’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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