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무차별 총격 만행’ ‘오인 사격’ 부록에 실토 [5공 전사-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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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8.10.18. 오전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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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 사격에 사망한 임병철씨, 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제5공화국 전사> 본문 4편에 부록으로 첨부된 ‘광주사태 민간인 사망자 검시결과’ 중 22쪽. 109번 임병철씨 부분의 ‘비고’란에 ‘오인 사격’이라고 적혀 있다. 국방부가 희생자 이름을 ‘임○○’으로 공개한 것을 경향신문이 취재를 통해 임병철씨로 확인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기록한 <제5공화국 전사>에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한 시민들의 이야기가 없다. 그저 ‘폭도 사살’이라는 단어 아래 20여명의 죽음을 ‘작전 성과물’로 언급할 뿐이다. 그러나 완전한 ‘삭제’는 하지 못했다. 부록으로 실린 ‘광주사태 민간인 사망자 검시결과’ 문건은 <5공 전사>가 의도적으로 감춘 시민들의 죽음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왜곡된 기술 뒤에 무차별적인 양민학살 증거를 스스로 붙여놓은 셈이다.

경향신문이 확보한 <5공 전사> 제4편에는 5·18 당시 사망자들의 검시결과가 실려 있다. 당시까지 확인된 민간인 사망자 164명 중 사인이 확실히 밝혀진 5명을 뺀 159명의 기록이다. 사망자별로 표를 만들어 인적사항 외에 직업, 사망일시 및 장소, 연고자, 검시결과와 함께 비고란에 사망경위·유품 등 특이사항을 적었다. 사인을 집중적으로 다룬 1980년 6월 광주지방검찰청의 검시조서보다 더 자세하다. 이는 보안사가 광주지검 검시조서와 현장 출동 계엄군의 진술 등을 종합한 ‘완성본’을 축약해 실은 자료로 추정된다. 노영기 조선대 교수는 “광주지검 것은 눈으로 시신 상태를 보고 법의학자가 아닌 의사와 검사가 ‘검안’ 정도를 한 자료”라며 “<5공 전사> 속의 검시결과는 보상 문제를 위해 관계기관의 이후 조사까지 종합작성해 앞선 기록들보다 훨씬 세세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비고란에 ‘군 처리분 22명 중 포함’ ‘성명미상-무연고, 보상금 미지급’ 등의 표기도 있다.

검시결과 문건은 당시 참상과 더불어 <5공 전사> 본문 기록의 왜곡을 입증한다. 그해 5월23일 광주 지원동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이 대표적이다. 계엄군의 무차별 총기난사로 승객 대부분이 사망한 사건이다. <5공 전사> 본문 1586쪽에는 “광주-화순 간 도로상인 지원동 부근에서는 무장폭도들이 계엄군의 봉쇄선을 돌파하려다가 3~4명이 사살되었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는 승객 18명 중 17명이 사망했다. 검시결과 문건도 ‘3~4명 사살’이라는 본문 내용을 뒤집는다. 신군부 스스로 ‘지원동 시내버스 종점 부근 마이크로 버스 내에서 사망’이라고 적어놓은 이만 10명이다. 이외에 지원동 야산골짜기에서 사망했다고 돼 있는 성명 미상자도 버스에서 끌려가 사살당한 뒤 암매장된 이들이다. 지원동 시내버스 종점에서 총상으로 사망했다고 적힌 1명까지 포함하면, 이 사건 관련 사망자로 검시결과에 나타나있는 희생자만 13명이다. 유일한 생존자인 홍금숙씨(당시 여고 1년)는 “살아남아 끌려가면서 계엄군이 무전으로 ‘3명 부상, 15명 사망’이라고 보고하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며 “계엄군 지시에 따라 무기를 지닌 남자들은 무기를 머리 위로 들고, 여자 승객들은 손수건과 두 손을 흔들며 ‘제발 쏘지 말라’고 외쳤는데도 무차별 난사가 계속됐다”고 밝혔다.

실제 버스 탑승자들의 검시결과는 무차별 난사를 증명하듯 ‘다발성 전신총상’ ‘다발성 관통총상’ 등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19세인 손옥례씨의 경우 자상이 있었지만 <5공 전사>에 실린 검시결과엔 삭제돼 있다. 검찰 검시조서엔 세 발의 관통총상 외에 ‘좌유방부 자창’(왼쪽 가슴부 칼로 찔린 상처)이라 나온다. 홍씨는 “지금도 숨이 차고 가슴이 저려 그 근처를 가지 못한다”며 “이 사건은 내가 생존해 있으니까 부인하지 못하지만, 이외에도 버스 2대가 총격을 받고 희생자들이 근처에 암매장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5공 전사>는 첫 시민 희생자인 김경철씨의 사망 원인도 왜곡해 실었다. 본문 4편 1545쪽에는 “19일 새벽 3시 광주시 백운동에 거주하던 ‘농아’ 김경철이 타박상으로 사망한 기록이 있으나 당시 진압봉조차도 사용이 금지되었던 계엄군의 진압작전으로 미루어 볼 때 계엄군과의 충돌에 의한 사망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적혀 있다. 24세였던 김씨는 5월18일 금남로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 강경진압을 하던 계엄군의 곤봉에 맞아 타박상으로 숨졌다. 계엄군은 김씨가 진압과정에서 숨진 것을 당시에도 알았지만 <5공 전사>는 이를 숨겼다.

검시결과 중 4건의 ‘비고’란에는 신군부 스스로 ‘오인 사격’이라고 표기해 뒀다. 5월27일 다발성 총상과 파편상으로 사망한 김성근씨(당시 24세)란에는 ‘무진중학 우체통 골목에서 오인 사살됨’, 같은 날 회사에서 숙직 중 베란다 위로 날아온 총알에 맞아 사망한 오세현씨(당시 25세)도 ‘오인 사격당함’이라고 기록돼 있다. 같은 날 전남대 정문을 지나던 여중생 김명숙양(당시 15세)을 사살한 데도 “전대 정문 앞에서 수하를 당하자 당황하여 도망가다 오인 사격”이라고 적었다. 그는 당시 친구집에 책을 빌리러 가던 길이었다. 5월24일 친구 2명과 함께 계엄군에 끌려가 사살당한 임병철씨(당시 24세)도 ‘오인 사격’이었다. 당시 11공수여단과 보병학교 전교대가 서로 오인해 벌인 전투에서 병사 9명이 사망한 뒤, 11공수여단이 화풀이로 끌고 가 죽인 이들이다.

<5공 전사>는 5·18을 다루는 내내 “계엄군에 대한 적의를 자아내게 하는 각종 악성유언비어(가 퍼졌다)”라고 썼다. 하지만 검시결과 표는 다른 말을 한다.

임신부와 초등학생, 출근길 시민들도 계엄군 총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검시표에 나오는 159명 중 128명의 사인이 총상이다. 군부대 간 오인 사격이 있었던 5월24일 11공수여단은 무차별 사격을 했다. 전재수군(당시 11세)은 벗어진 신발을 주우려다 날아든 총알에 죽었다. 검시기록엔 ‘효덕동 소재 묘지 부근에서 놀다가 피격당함’이라고 적혀 있다. 방광범군(당시 14세) 기록엔 ‘효덕동 소재 저수지 둑에서 놀다가 사망(총상)’, 최미애씨(당시 23세)란에는 ‘임신 7개월. 주소지 앞 길에 서 있다가 유탄에 의해 사망’이라고 돼 있다. 고등학생 박금희양(당시 19세)은 헌혈을 하고 귀가하던 길에, 이금제씨(당시 29세)는 약국으로 출근하는 길에 뒤에서 쏜 계엄군 총탄을 맞고 숨졌다.

그날을 증언하는 버스정류장 1980년 5월23일 광주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 정류장에서 계엄군은 미니버스에 무차별 총을 난사해 시민들을 학살했다. <제5공화국 전사>에는 ‘폭도 3~4명 사살’이라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사망자는 17명으로 알려져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전남 수협에서 일하던 김재평씨(당시 29세)는 5월18일 딸이 태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계엄군이 봉쇄한 광주로 20일 들어왔다. 아내와 갓 태어난 딸을 만난 뒤 21일 계엄군 총에 희생됐다. 지난해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김씨 딸 소형씨는 “철 없었을 때는 이런 생각도 했다. 때로는 내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빠와 엄마는 지금 참 행복하게 살아계셨을 텐데…”라며 눈물을 흘렸다.

주남마을 총격 사건 생존자 홍씨는 38년째 책임자들의 사과를 기다리고 있다. “더 이상 거짓말을 보탠다고 진실이 달라지겠어요. 전두환 등 책임자들이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면 이제 본인들도, 우리도 편해질 텐데 왜 그걸 안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끔찍했던 당시를 잊을 수는 없겠지만, 진심으로 사죄한다면 저는 용서할 마음이 있어요.”

◆안종필 열사 교복 영수증·윤상원 열사 뉴욕타임스 기자 명함…유품도 자세히 기재

민간인 사망자 검시결과 표

‘그날 피 묻은 증거’ 남아 있어


몇 줄로 남은 ‘마지막’ <제5공화국 전사> 본문 4편 부록 ‘민간인 사망자 검시결과’ 12쪽에 실린 표(왼쪽)의 가장 마지막에는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씨가 사망 당시 지니고 있던 유품이 표기돼 있다. 31쪽(가운데) 표의 두번째에는 계엄군 총탄에 쓰러진 임신부, 13쪽(오른쪽) 표 세번째엔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안종필씨가 지녔던 ‘교복 영수증’이 적혀 있다. 안씨는 국방부가 비실명으로 공개한 것을 경향신문이 확인했다.


<제5공화국 전사>에 실린 ‘민간인 사망자 검시결과’ 표에는 5·18민주화운동 사망자들의 유품도 기록돼 있다. 계엄군의 총탄에 희생될 당시 갖고 있던 사소하지만 소중한 물건들이다. 이들 유품은 계엄군이 시신 확인을 위해 표기한 것이지만, 38년의 시간을 넘어 ‘그 열흘’간 스러진 사람들의 기억을 불러내는 단초다. 또한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피 묻은 증거물이다.

‘계엄군 진입 시 도청에서 사망. 유품: 광주시 서2동소재 광남사 양복점 옷의 영수증.’ 안종필씨(당시 16세)의 검시결과 비고란에는 이같이 짤막한 두 문장이 적혀 있다. 실제 그의 삶은 두 줄로 축약될 수 없다. 당시 거리에 나섰던 누군가의 가족과 이웃들의 울분과 눈물이 그 짧은 삶에 녹아 있다. 그는 집단발포가 있던 5월21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 가족들의 만류에도 “지금 포기하면 헛된 죽음밖에 되지 않는다”며 희생자들의 시신을 임시안치한 상무관 관리를 도왔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무력진압한 1980년 5월27일 새벽까지 도청에 남았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가 입고 있던 교련복에서 나온 양복점 영수증은 사망 며칠 전 맞춘 하복 교복 영수증이었다. 안씨 유족들은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그를 보냈다.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그의 시신을 매장했기 때문이다.

시민군 대변인으로 역시 27일 도청을 사수하다 사망한 윤상원씨(본명 윤개원·당시 30세)란에도 유품이 적혀 있다. ‘대변인 표찰. 뉴욕타임스 동경지국장 명함 2개.’ 전날까지도 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한 기자회견에 나서 상황을 알리려 했던 흔적이 생생하다. 동생 윤태원씨(60)는 경향신문과 통화하면서 “당시 아무도 유품을 건네주지 않았고 가족에게 통보도 없이 망월동 시립묘지에 형님을 묻는 바람에 그것도 모르고 1주일 정도를 찾아 헤맸다”며 “형님 사망 당시 ‘외신기자 명함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 있었지만 그게 뉴욕타임스 기자 명함이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사망 당일 윤씨의 마지막 연설문은 당시 도청에 남았던 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뭉쳐 싸워야 합니다.” 윤씨와 야학동료인 박기순씨의 영혼결혼식 때 헌정된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제 5·18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불리고 있다.

5월23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된 26세의 한 희생자에게는 ‘22일 13:23’으로 정지돼 있는 오리엔트 손목시계가 유품으로 적혀 있다. 또 전남대 1학년생으로 5곳에 총알을 맞아 사망한 이는 ‘오트론전자시계’와 바둑스크랩을 지니고 있었다. <5공 전사>에 실린 검시결과 표가 ‘성명미상’으로 기록한 10대 희생자의 목에는 십자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들이 쏘지 않았더라면 이들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시민 학살은 희생자는 물론 유족과 이웃들의 삶도 송두리째 파괴했다. 대부분의 사망자는 제대로 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옛 망월동 묘역에 묻히면서 유족들은 묘지 번호를 들고 찾아가 확인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5·18기념재단 제공


※특별취재팀 (기자)

배명재·강현석·유정인·조형국

자문위원단 (교수·가나다순)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노영기 (조선대 기초교육대학)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한정훈 (서울대 국제대학원)

유정인·강현석 기자 jeong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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