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회고록에 담긴 33가지 허위 내용은 무엇인가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7.06.12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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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기념재단 등 전두환 회고록 출판금지가처분소송 제기

  

4월 출간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대해 5·18기념재단과 5월 단체가 법적 대응에 나섰다. 5∙18기념재단과 5월 관련 3단체(민주유공자유족회∙구속부상자회∙부상자회)는 6월12일 전두환 회고록에 대한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을 광주지방법원에 제기했다. 

 

가처분 신청서는 총 67페이지 분량으로, 회고록 속 허위 내용을 입증하기 위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한 각종 자료와 전 전 대통령에 대한 판결문 등이 포함돼 있다. 전 전 대통령의 대법원 유죄 확정 판결문과 5·18 백서로 불리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지난 5월 발간된 전남대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의 증언록 ‘5·18 10일간의 야전병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전일빌딩 헬기사격 탄흔 감정결과’ 등도 가처분신청서에 반영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출간한 자신의 책 ‘전두환 회고록’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광주 사태’나 ‘북한군 개입에 의한 폭동’으로 기술했다. 자신을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전두환 회고록에 대한 출판 및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의 법률대리를 맡은 김정호 변호사에 따르면 이들 단체는 ‘전두환 회고록’ 내에 있는 33가지 내용을 허위 주장으로 판단했다. 이 내용들은 크게 5가지 챕터로 나뉜다. 

 

4월3일 광화문의 한 서점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비치돼 있다. ⓒ 사진=연합뉴스


 

5∙18은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다(535쪽 외 18곳)

 

1950년 북한의 남침 때 수백만 명의 인명피해를 무릅쓰며 싸웠던 것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이었듯이 5.18사태 당시 정부와 계엄군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무장혁명 세력과 맞섰던 일도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정당하고도 불가피한 조치였음이 오래지 않아 명백히 밝혀질 거라 믿는다.(535쪽)

지만원박사는 5.18때 북한의 특수공작원으로 침투했다가 돌아가 그 뒤 북한의 정부와 군부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는 수백 명의 인물을 사진분석을 통해 실명으로 밝히고 있고 그 내용이 특정 보도매체와 출판물, 인터넷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있지만 주요 언론매체들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 독자나 시청자들의 정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언론매체들, 여론의 향배를 좇을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 하더라도 학계에서조차 ‘민주화운동’이라는 정통적 역사 인식에 대한 어떠한 ‘수정주의적’접근도 금기되어 있는 것 같다. 광주가 계속 신화의 영역에 있기를 원하며 불편할 수도 있을 진실이 더 이상 드러나길 바라지 않는 세력이 엄존한다는 것은 뚜렷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541쪽)

5·18사태 때에는 북한의 특수요원들 다수가 무장하고 있는 시위대 속에서 시민으로 위장해 있을 터였다.(531쪽)  

가장 악의적인 역사왜곡으로 꼽힌 것이 바로 ‘북한군 개입설’이다. 북한군 특수부대원 600명이 항쟁기간 중 광주에 잠입한 뒤, 시민들 사이에 섞여 시위를 자극하는 등 폭동으로 이끌었고, 당시 북한 특수부대가 공수부대와 광주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고 잔학행위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1980년 사건 직후 계엄사 발표, 1985년 국방부 재조사, 1988년 국회 광주청문회, 1995년의 검찰 및 국방부 조사, 1996~97년의 5․18재판,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2012년 국정원의 비공개 조사까지 7차례의 국가적 조사가 이뤄졌다. 그러나 북한군이 대대적으로 국내에 들어왔다는 증거나 정황은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었다. 

 

2013년 6월 정홍원 전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라고 발언했고, 국방부도 2013년 5월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는 입장을 밝힌바 있다. 미국 정부 보고서에도 이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미국 CIA가 2017년 비밀해제문서로 공개한 ‘미국국가안전보장회의 비밀문건’ 내용(1980년 5월~6월)에는 “현재 북한은 한국의 정치 불안 상황을 빌미로 어떤 군사행동도 취할 기미가 없다(1980년 5월9일)”, “북한은 남한의 사태에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북한의 특정 행동이 자칫 전두환의 합리화를 위한 빌미를 제공하게 되고, 결국 전두환을 돕는 행위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김 변호사는 “전 전 대통령은 2016년 4월27일 월간 신동아와 가진 인터뷰에서 ‘5․18당시의 북한군 개입설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다’는 취지로 이미 답했다”며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북한군 개입설을 자서전에서 자세히 다뤘다. 지만원 등 역사왜곡세력이 주장했던 허위사실을 대부분 옮겨오면서 대표저자가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전 전 대통령이 인터뷰를 포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던 북한군 개입설을 번복하면서까지 자서전에 해당 내용을 기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5∙18 당시 국군은 양민을 학살한 적이 없다는 논리를 완성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이고, 광주시민들을 불순분자로 취급해 살상해도 무관한 대상으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김 변호사는 추정하고 있다. 

 

 

 

헬기 사격은 없었다(379쪽 등 4곳)

 

헬기를 이용한 기총소사까지 감행했다는 등 차마 말로 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들이 더해져 전해지고 있다.(379쪽)

이러한 주장(피터슨 목사와 조비오 신부의 헬기기총소사 목격 주장)은 헬리콥터의 기체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이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진압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인 주장일 뿐이다.(480쪽)

12·12 및 5·18 관련 수사 및 재판 과정에서 조비오 신부 및 피터슨 목사 등은 “헬리콥터를 이용한 계엄군의 기총소사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실이 있다”고 진술했지만 관련 증거의 부족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과 육군항공대 관계자들도 그 동안 “5·18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헬기사격은 없었으며, 시민들이 헬기사격을 목격하였다고 증언하는 당시 광주에는 무장헬기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6년 전일빌딩 리모델링 과정에서 발견된 총탄흔적을 헬기 사격에 의한 탄흔으로 판정했다. 헬기 사격이 실재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36년 만에 확인된 것이다. 또 광주에 파견된 항공여단 부대 편제 및 일자별 파견장비표를 통해 1980년 5월21일 광주에 헬기사격이 가능한 무장헬기 3대가 배치돼 운영 중이었던 사실도 확인됐다. 5·18기념재단과 5월 단체는 이번 소장에 당시 군 지휘관들과 민간인의 증언도 증거로 첨부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그 동안 "5·18 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헬기사격은 없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국과수는 2016년 전일빌딩 리모델링 과정에서 발견된 총탄 흔적을 헬기 사격에 의한 탄흔으로 판정했다. ⓒ 5·18기념재단 제공

 

 

 

비무장한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없었다(382쪽 등 3곳)

 

우리 국군은 국민의 군대다. 결코 선량한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눌 일은 없다.(382쪽)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계엄군은 죽음 앞에 내몰리기 직전까지 결코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383쪽)

더욱이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27쪽)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광주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 5월21일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를 시작으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적인 사격이 벌어졌다는 증거나 증언이 적지 않다. 임산부 최미애(23)씨를 비롯해 10대 시민들도 총에 맞아 숨졌으며, 문을 뚫고 날아온 총알에 집 안에서 사망한 시민도 있었다. 완도수협직원 김재평(29)씨는 막 출산한 딸을 보기 위해 광주로 올라왔다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김씨의 사망은 지난 제37주년 5.18기념식에서 김씨의 딸이 ‘슬픈 생일’이라는 제목의 추모사를 통해 전국적으로 사연이 알려지기도 했다. 

 

무차별 사격으로 미니버스 승객들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생존자들이 야산에서 총살되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어린이와 학생들에게도 총격을 가해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총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5·18재단 등은 당시 전남대병원의 진료 기록지, 수술대장, 마취장부 등을 분석한 223명의 5․18민주화운동 사상자 분석 자료와 5·18민주화운동 의료 활동집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5∙18과 관련된 회의를 비롯해 어떤 과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27쪽 등 7곳)

 

나는 보안사령관으로서 재임 시 그 어떤 작전지휘모임에도 참석할 수 없었고, 참석한 일도 없다.(440쪽)

5.18사태의 발단에서부터 종결까지의 과정에서 내가 직접 관여할 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384쪽)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이 5∙18과 관련한 어떤 회의에도 참석한 적 없고,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임도 없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제물이었으며, 십자가를 졌다고도 표현했다. 1997년 4월 17일 확정된 대법원 판결과 항소심 판결에서 내란수괴죄와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유죄가 인정된 사실관계와 법률적 판단조차도 모두 부인하는 것이어서 합리성을 결여한 사실왜곡이라고 원고 측은 지적했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은 내란의 실행과정에서 폭동행위에 수반해 발생한 살상행위를 한 것으로 평가됐고, 그로 인해 내란수괴죄가 인정됐다.

 

 

집단발포 직전 시위대의 장갑차에 치여 계엄군이 사망했다(470쪽)

 

후 1시경 시위대는 장형태 지사가 약속했던 시간이 되었음에도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은데 항의하면서 공수부대 장갑차에 화염병을 던졌다.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 측 장갑차 한 대가 공수부대원원들을 향해 돌진했다. 순간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대원들은 돌진하는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지부 건물 등으로 흩어졌으나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대원 2명이 시위대 장갑차에 치여 1명은 즉사했고 1명은 중상을 입었다.(470쪽)

1980년 5월21일 오후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발포 직전에 장갑차에 치어 계엄군 병사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중상을 입은 사고가 있었다.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시위대의 장갑차에 치여 계엄군이 사망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당시 사고는 계엄군의 무한궤도 장갑차가 급히 퇴각을 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친 것이었다. 공수부대 장갑차의 ‘무한궤도’ 밑에 하반신이 깔린 그 병사의 사망순간을 같은 부대 소속 병사가 목격했다.

 

‘계엄군의 무한궤도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사고’를 ‘시위대의 장갑차에 의한 공격으로 사망’했다고 사실관계를 왜곡해 허위사실을 주장한 것이다. 김 변호사는 “1980년 5월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발포행위를 자위권 발동이라고 변명하기 위한 악의적이라고 의도적인 왜곡”이라며 “계엄군의 장갑차에 의한 사고라고 하면 집단발포행위를 자위권행사라고 주장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시위대의 장갑차에 의한 공격으로 사망했다고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변호사는 이어 “전두환 회고록이 대형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목록에 들어있는 뒤집힌 현실을 바로잡아야한다”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전두환이 주장한 표현의 자유도 보장돼야 한다는 인터넷 댓글을 봤다. 그러나 사실을 기재하고 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는 있지만 허위 사실로 왜곡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로 보장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허위 사실을 적시해 출판배포를 하는 행위는 사회통합을 저해하고 민주주의의 핵심가치를 침해할 위험이 현저해 헌법상의 표현의 자유 내의 행위로 볼 수 없다. 출판 및 배포금지가처분 신청이 인용돼야 할 당위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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