ᐥ피어 드 실바. 그는 1959년 한국에 부임한 미 중앙정보국의 지국 책임자였다. 사무실을 찾아온 피어 드 실바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4.19가 벌어지기 며칠 전쯤으로 기억한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의표를 찔렀다. “백 장군…, 나서지 않으시겠느냐?” 나는 즉답을 피했다.ᐥ
일찍 피어났던 꽃은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보다 늦게 피어난 꽃들은 혹심했던 겨울을 견뎌낸 남산의 북사면 자락을 조금씩 채워가고 있었다. 나는 4.19가 벌어지던 1960년 4월의 봄을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다.
6.25전쟁 3년 동안 분주히 야전의 싸움터를 오갔고, 그 이후 줄곧 대한민국 육군의 전력 증강에 쉴 틈이 없었던 나는 1960년에 접어들어서는 이미 ‘현장’으로부터 비켜 서있던 군인이었다. 지금의 합동참모본부 격이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던 연합참모본부의 총장이었다. 내가 출근하던 연합참모본부의 사무실은 1970년대 중앙정보부가 들어섰던 자리에 있었다. 당시에는 높은 건물이 거의 없어서 남산 북녘 자락의 내 4층 사무실에서는 경무대 쪽의 광경이 눈에 잘 들어왔다. 학생들의 데모는 늘 이어졌고, 그를 막으려는 경찰들 역시 분주히 시내를 오갔다.
‘서브 로자(Sub Rosa)’라는 단어가 있다. 라틴어라고 한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under the rose’, 즉 ‘장미 밑에서’라는 뜻이다. 한국어로 옮기자면 ‘은밀하게’, ‘비밀스럽게’다. 그 라틴어를 직접 제목으로 사용해 1978년에 출간한 책이 있다.
저자는 피어 드 실바(Peer de Silva). 그는 1959년 한국에 부임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지국 책임자였다. 강인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길고 넓은 이마에 움푹 들어가 있는 눈매가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냉정한 정보통’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한국에 부임한 뒤 꽤 열심히 한국의 정가를 누비고 다녔다.
나중에 드러난 여러 기록들에 따르면, 피어 드 실바는 요동치는 한국의 정계 판도에서 이승만의 반대편에 서 있었으나 당시 정국에선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장면(張勉) 부통령에 크게 주목했던 인물이다.
그는 장면 부통령과 자주 만나면서 깊은 관계를 맺기도 했다. 장면 부통령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이승만 대통령 말년에 거대한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있던 한국의 정치판을 안정시키려는 의도를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듬해 벌어진 5.16의 여러 과정에도 깊숙이 개입했다고 알려져 있다. 거사를 주도한 5.16 진영의 의도를 미국에 전달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이는 그로부터 한참 세월이 지난 뒤 조금씩 알려진 내용들이다.
그는 어쨌든 1960년 3.15 선거가 부정의 의혹에 휩싸이다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떠오르자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들던 한국 정가의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누비고 다녔다.
저 산 멀리에 조금씩 모여들던 구름은 이제 점점 짙은 색깔을 띠어가면서 거센 비를 내릴 먹구름으로 변했다. 그에 앞서 거대한 소나기를 예고하던 바람은 이미 경무대와 남산 자락을 넘어 서울, 아니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을 가득 채우던 무렵이었다. 나는 ‘이 혼란이 언제 막을 내릴까’라는 우려 때문에 연합참모본부 내 사무실의 창가와 책상 사이를 서성이고 있었다.
피어 드 실바 지국장은 그런 무렵 나를 몇 차례 찾아왔다. 그는 여러 소식을 정탐하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연합참모본부에 부임한 이래 한국의 정가와 군부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워낙 한직이었던데다가, 정국(政局)이 일으키는 소용돌이 자체가 내 호기심을 생래적으로 자극하는 주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속히 안정을 되찾아야 한다는 우려만을 품고 있었을 뿐이었다.
피어 드 실바는 그런 내게 정국의 동향과 주변에 관한 소식을 자주 묻곤 했지만 나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몇 차례 내 사무실의 문을 노크했다. 오는 사람 굳이 막을 필요는 없는 법이다. 나도 그를 맞아 여러 가지 주제의 대화를 나누면서 정국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사무실을 찾아온 피어 드 실바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4.19가 벌어지기 며칠 전쯤으로 기억한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의표를 찔렀다. “백 장군…, 나서지 않으시겠느냐?”
나는 즉답을 피했다. 그는 분명히 의미심장한 제안을 내게 꺼냈던 것이다. 창군의 멤버로서 미증유의 동족상잔이었던 6.25전쟁을 치르며 군문(軍門)에서만 14년의 풍상을 겪어왔던 나는 그 의미를 잘 알았다. 그의 발언은 ‘군사적 개입’을 통해 난국을 풀어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 미군이 한국 군대의 작전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던 때였다.
그런 미군이 한국군의 누군가를 내세워 정국에 개입하려 마음을 먹는다면 그 일의 성사는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미군은 당시 서울 북방의 의정부 라인을 포함해 수도권 일원을 모두 통제하고 있었다. 병력의 이동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라 전선 또는 후방의 한국 군대가 서울에 드나드는 길목을 마음껏 막거나 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겨냥한 것은 ‘군사 개입’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나는 거부감이 앞섰다. 한국의 정치에 군부가 파고든다는 점을 나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군은 정치의 바람을 타서는 안 된다’는 내 평소의 원칙도 그에 한몫했다. 그러나 나는 착잡하기만 했다.
내가 그의 말이 ‘의표를 찔렀다’고 표현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는 1기 육군참모총장 때 전쟁을 휴전으로 마감한 뒤 1954년 병력 40만 명을 거느리는 제1 야전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어 다시 육군참모총장에 오른 때는 1957년이었다. 당시의 집권 자유당은 말기적 증세를 아주 짙게 드리웠다.
나는 군복을 몸에 걸친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 어떻게 부패하고, 부정을 저지르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자유당 말기의 증상은 매우 심각했다. 누구라도 ‘이대로 가다가는…’ 식의 우려를 품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 또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런 걱정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육군을 이끄는 참모총장으로서 그런 생각을 구체화한다면 군의 정치 개입이라는 선례를 남기는, 그래서 대한민국 안보의 초석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머릿속으로 그저 스쳐 지나갔던 상념은 있었다. ‘군대가 나서서 장택상 박사, 조병옥 박사 등 명망 있는 분들로 하여금 이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한 다음 물러나면 좋지 않을까’라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사라진 가느다란 생각의 한 줄기를 피어 드 실바라는 미 CIA의 지국장이 건드리며 다가선 것이다.
봄날의 따사로운 햇볕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이제 곧 흘러지나갈 1960년의 봄이었다. 남산 북사면의 응달 깊숙한 곳 여기저기에 자줏빛 진달래는 마치 산속의 복병(伏兵)처럼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1960년의 어지러운 봄은 그 진달래의 자줏빛 그늘 깊은 곳 어딘가에 제 진짜 모습을 숨기고 있는 듯했다. 나는 어느덧 피어 드 실바가 불쑥 건넨 “나서지 않겠느냐”는 그 말을 곰곰이 되씹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