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on 2023-12-18
ᐥ나는 그에게 실바의 제안을 말했던 모양이다. 비서실장은 내 말을 듣더니, “각하, 실바의 제안을 받아들이시죠”라고 했다. 나는 비서실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좀 더 기다려 보자. 3일만 더 기다려 보자….” 그 3일의 대답이 어떻게 나왔던 것일까. 나도 어느새 실바의 제안에 기울었던 것인가. 뚜렷한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그 때 어떤 결심을 했을까.ᐥ

전쟁의 총소리는 1953년 7월 이 땅에서 멈췄다. 나는 1952년 육군 참모총장에 올랐다가 이듬해 7월 27일 휴전 협정이 맺어진 뒤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이어 1957년 5월 다시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내용이다.

흔히 군대를 국가의 간성(干城)이라고 부른다. 적이 들이미는 날카로운 창과 칼끝을 막아내는 방패(干), 그리고 대규모의 적이 우리를 치며 몰려왔을 때 그를 막아내는 견고한 성채(城砦)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의 간성은 그 당시 어떤 모습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군대였다. 적이 어떤 모습인지, 그들이 어떤 힘을 갖췄는지를 우선 몰랐다. 아울러 적의 정체를 알았더라도 제대로 그들을 막아 세울 힘이 우리에게는 부족했다. 군 병력의 일부가 새로 상륙한 미군으로부터 M1 개런드와 카빈 소총을 받아 무장을 했을 뿐이지, 나머지는 일본군이 남기고 갔던 38식과 99식 소총에 그들이 종아리에 맸던 ‘각반(脚絆)’을 두르고 출범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군은 몰라볼 정도로 성장했다. 특히 전쟁 중에 시작한 전력 증강 사업으로 미군의 무기를 대량으로 넘겨받아 강력한 화력을 지닌 60만 대군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물질적 토대를 갖춘다고 해서 강군(强軍)의 꿈은 절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195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우리 군대는 이미 불과 몇 년 전에 벌어진 참혹한 전쟁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었다. 내가 두 번째로 육군참모총장을 맡았을 때 집권 자유당은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무대의 이승만 대통령과는 별도로 이기붕 당시 민정의원 의장(지금의 국회의장)이 권력의 핵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기붕 의장이 살고 있던 서울의 서대문은 그런 권력의 향기를 맡으며 몰려든 여러 타입의 사람들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정치는 정치인이 한다. 그 정치인이 어떤 행태를 보이든 나와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거기에 내가 무어라 말을 보탠다면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군이 그런 권력의 향배를 좇는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

나라와 민족, 사회를 지키는 방패는 그런 부나비와 같은 정치적 군인들에 의해 좀이 슨다. 아울러 나라를 적의 공격으로부터 지키는 성채는 그 틈새를 파고든 정치적인 군인의 준동으로 인해 조금씩 틈을 넓히다가 무너지고 만다. 그런 점에서 보면 1957년 이후의 대한민국 군대의 움직임은 불길했다.

서대문 이기붕 의장의 집 부엌에는 군 고위 장성 마나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도 그러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한동안 우리 군대의 고위 장교 부인들은 상급 장교의 부인을 따라 다녔다. ‘남편의 진급은 그 아내가 하기에 달렸다’는 말은 거저 흘려들을 말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 원조의 모습은 1957년 이후 서대문 권력 2인자의 주방으로 모여든 부인네들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밴드 오브 브러더스(Band of Brothers)’라는 미국 TV 드라마가 있다. 몇 년 전에 한국에서도 방영해 큰 인기를 모았던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을 다룬 드라마였다. 그 드라마의 주연급 부대로 등장하는 군대가 미 101 공수사단이다. 노르망디 작전에서 101 공수사단을 이끌었던 사단장이 바로 맥스웰 테일러(Maxwell Davenport Taylor)다.

그는 1953년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그해 테일러는 미 8군 사령관으로 한국에 부임했다. 일어와 중국어 등 7개 국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갖춘 군정가(軍政家) 스타일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한국에 주둔하면서 몇 마디 한국어를 익혔다. 그 가운데 한국군 장교들을 모아놓고 늘 그가 강조하던 한국어가 있다. “여러분, 군대는 절대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됩니다”였다.

테일러 이후 부임한 미 8군 사령관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라이만 렘니처(Lyman L. Lemnitzer)는 테일러 직후에 한국 주둔 사령관으로 있던 인물이었다. 그 역시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 고위 장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치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강조하곤 했다.

건국 이래 쉴 틈 없이 전쟁을 벌여온 군대가 미군이다. 테일러는 한국에서 이임한 뒤 미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을 두루 거치고 주 베트남 대사로까지 활동했다. 렘니처 또한 이력이 화려하다. 대장 출신으로 테일러와 비슷한 직위를 거쳤던 미군의 최고위 장성이다.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한 미군, 그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 과정을 거쳤던 그들이 왜 한국 군대에게 늘 ‘정치 개입 불가’를 강조했던 것일까.

우리 한국군의 민감한 정치적 성향에 주목했던 것일까. 우리의 어떤 면모가 그들에게 불안감을 안겼던 것일까. 우리는 실제 그런 움직임을 보였던 것일까. 그 대답은 내가 다 할 수 없는 의문들이다. 그러나 적어도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우리 군대의 고위 장성들이 정치권력에 휩쓸리는 장면은 자주 드러났다.
군령(軍令)은 제대로 먹히지 않았고, 적지 않은 군 고위 장성들과 그 부인들은 권력자의 저택과 주방을 아슬아슬할 정도로 넘나들었다. 연로한 이승만 대통령 주변을 에워싼 권력 그룹은 그의 어두워진 청력(聽力)과 시력(視力)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군대의 인사는 그 몇몇의 권력자들이 좌지우지했다.

전쟁은 잊혀진 게 아니라 우리가 잊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4.19를 앞둔 당시의 정치와 사회적 상황은 기어코 무슨 일을 내고서야 막을 내릴 것 같은 혼란의 극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남산 연합참모본부 4층 창가로 내다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말이 아니었다. 1960년의 봄은 서울 남산의 북사면에 피어난 진달래의 모습처럼 그렇게 가련하면서도 어두웠다.

『서브 로자』의 저자이자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 지부장이었던 피어 드 실바가 던진 말, “나서지 않겠느냐”는 제언은 날카로운 비수와 같았다. 그의 발언은 6.25전쟁 3년, 40만 병력의 첫 1야전군 사령관으로 4년을 보냈던 내 마음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아무것도 없이 맞았던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간신히 적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군대를 육성하는 데 청춘을 다 바친 나로서는 이 상황이 아주 심상찮게 보였기 때문이다.

연합참모본부 내 4층 사무실의 창은 그 무렵 내가 자주 서성이던 곳이다. 참모본부 총장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부하 장군이 문을 두드렸다. 피어 드 실바가 그 말을 던지고 돌아간 직후였다. 그는 내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몇 마디 말이 오갔고, 어떤 경위에서인지는 잘 기억할 수 없지만 나는 그에게 실바의 제안을 말했던 모양이다.

비서실장은 내 말을 듣더니, “각하, 실바의 제안을 받아들이시죠”라고 했다. 그 역시 당시의 상황을 우려했던 점에서 나와 입장이 같았으리라. 나는 다시 창가를 서성였다. 군이 개입을 한다면 어떨까. 명망 있는 인사들을 정국 혼란의 수습 책임자로 자리 잡게 한 뒤 빠지는 것은 어떨까. 미군이 돕는다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게 최선일까. 군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창밖을 바라보는 내 뒤에서 비서실장은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내 시원한 답을 그는 기다렸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머릿속으로는 군의 정치개입을 경고했던 미군 사령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군은 국가의 간성, 아울러 국가가 지닌 모든 것의 가장 견고한 토대여야 한다. 안보는 군의 엄정한 중립으로 인해 제 틀을 튼튼하게 갖출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떠오르면서도 나는 비서실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 “좀 더 기다려 보자. 3일만 더 기다려 보자….” 그 3일의 대답이 어떻게 나왔던 것일까. 나도 어느새 실바의 제안에 기울었던 것인가. 뚜렷한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3일이 지나도 혼란스러운 상황이 멈추지 않는다면, 나는 그 때 어떤 결심을 했을까.

그 날짜를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실바가 그런 제안을 건넨 게 4월19일로부터 하루, 또는 이틀 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던 모양이다. 4.19는 그렇게 내 앞에 왔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남산 사무실로 출근했다. 일도 별로 없었지만,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나는 버릇처럼 사무실 사이를 왔다 갔다 했고, 또 그 며칠 사이의 버릇처럼 창가를 자주 서성였다.

책상의 의자에 앉았는가 싶었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창이 조금 흔들렸다. “따다당, 땅, 땅…” 그 소리는 경무대로부터 들려왔다. 이 땅에 동족상잔의 참혹한 비바람을 몰고 왔던 6.25 전쟁의 총소리가 다시 내 귀를 울리고 있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시 다가섰다. 총소리는 계속 울려댔다. 분명한 발포 소리였다. 장미의 숲을 헤치듯 은밀하게 다가섰던 실바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비서실장에게 무심코 뱉듯이 던졌던 “3일만 기다려보자…”던 내 말도 생각이 났다.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아, 모든 것이 끝났구나”라는 탄식이 내 입속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