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백선엽의 6·25 징비록
by Silla on 2023-12-18
ᐥ1979년 12.12 사태 직후 당시 미 8군을 이끌고 있던 사령관 존 위컴은 아주 흥분한 표정으로 육두문자를 사용하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쿠데타 주역 2명을 거론하며 “□□□은 그냥 나쁜 X이고 가장 나쁜 X은 ○○○다”라고 말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할 군부대를 쿠데타를 위해 이동시킨 것을 미국적 관점에서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국가 내의 정변 수준을 뛰어넘어 국가의 명운을 담보로 군을 움직였다는 것이다.ᐥ

총을 잡은 쪽은 군대가 아니었다. 경찰이 시위에 나선 대학생들과 시민에게 총격을 가했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거대한 혼란의 전주곡(前奏曲)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시위에 나선 시민들 덕분에 허정 내각에 이어 장면 총리의 정부가 들어선 점은 다행이었으나, 국가와 사회의 근간을 수호하기 위해 경찰 병력에 쥐어진 총이 마침내 불을 뿜었다는 점은 여간 우려스러운 게 아니었다.

평화적으로 정권을 교체할 방법은 없는가에 대한 고민은 이제 끝이었다. 정국은 더 큰 소용돌이에 빠질 가능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 과정이야 여기에서 새삼 다시 적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1년 여 뒤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5.16이 벌어졌다는 점도 마찬가지다.

4.19로부터 1주일 뒤, 12년 동안 집권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있었다. 나는 경무대에서 물러나온 이 대통령이 하와이로 출국할 때 그의 거처였던 이화장을 찾아가 배웅했다. 이화장에서 걸음을 옮겨 내려오던 대통령은 길에 서 있던 나를 보자 “자네, 어디 있었단 말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4.19가 벌어진 지 꽤 지난 뒤였다. 박찬일이라는 인물이 나를 남산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이기붕의 사람’이었다. 이기붕이 발탁해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 비서로 기용했던 사람이다. 이기붕의 후원을 받아 그는 자유당 말기에는 이 대통령의 최고 실세 측근 비서라는 평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4.19로 인해 사형대에 올랐던 경무대 경호책임자 곽영주와 쌍벽을 이루는 권력의 실세였다.

나보다 몇 살 정도 아래였던 그가 대통령이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 차 떠난 뒤에 사무실로 찾아온 이유야 별 게 없었다. 권력의 정점 근처에 머물다가 졸지에 그 위상을 잃은 사람이었다. 정국의 전개에 민감했으니, 평소 알던 사람들을 한 둘 찾아다니며 이런 저런 사정을 탐문하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리를 뜨기 전에 내게 이런 말을 꺼냈다. “백 장군님, 왜 가만히 있었습니까. 이승만 대통령께서 하야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십디다. ‘백선엽 장군 형제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이야’라고 말입니다. 그 때 동생 백인엽 장군이 포천에 있지 않았습니까. 왜 나서지 않았던 겁니까.”

박찬일 비서관이 ‘그 때’라고 언급한 시기는 4.19 전의 대한민국 정치와 사회적 상황이 큰 혼란으로 치닫던 때였으리라. 그러나 동생 인엽은 1959년 말에 이미 포천의 6군단장 직에서 떠나 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이승만 대통령이 나를 찾았다는 사실도 그 때 처음 들었다. 그래서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기 위해 이화장 길을 내려오던 이 대통령이 나를 보자 “자네, 어디 있었단 말인가”라고 했던 모양이다.

박 비서관이 내 동생을 함께 언급했던 대목도 눈길을 끈다. 나와 내 동생 인엽은 6.25 이후 줄곧 ‘형제 장군’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나는 대한민국 최초의 별 넷 대장, 동생 역시 화려한 이력으로 별 셋의 중장에 올라 4.19 무렵에는 포천에 주둔하는 6군단의 군단장을 맡고 있었다.

박 비서관의 발언에는 ‘사태가 혼란으로 치달을 때 왜 동생인 백인엽 장군의 6군단 병력을 이끌고 사태 정리에 나서지 않았느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서울 인근인 포천에 동생이 이끄는 6군단이 있었는데, 왜 개입을 피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이는 나름대로 음미해 볼 대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말기에 이르면서 주변에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정치적 바람을 타기 시작한 군대의 일부 장성들도 엉뚱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 극히 일부는 쿠데타의 조짐까지 보이면서 정치적인 행동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군부의 실력자’로 자신을 내세우며 권력에의 의지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박 비서관은 그 점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성명을 발표하던 날 나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에게 “부정부패가 심하면 학생들이 당연히 일어나야지. 애들이 죽었다면 내가 물러나야지”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측근들의 장벽에 둘러싸여 눈과 귀가 멀어 있었고, 사태가 벌어지자 재집권 욕심을 버린 것으로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하루 빨리 정국을 안정시키려면 강력한 군 부대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정치권력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권력을 손에 거머쥘 마음도 없고, 그를 뒤에서 조종할 만한 배포도 없다. 나는 겁이 많다. 적이 내 앞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내가 지닌 몫 이상의 자리와 힘을 먼저 탐내거나 바라지 않는 스타일이다. 따라서 피어 드 실바 지국장의 제안을 들었을 때도 그저 ‘혼란스러운 정국만 수습한 뒤 빠지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만 했을 뿐이다.

군대는 나라와 사회에 어떤 존재일까. 동양에서는 그에 대해 ‘사느냐 죽느냐를 가르는 갈림길’이라고 했다. 병법의 대가인 손자(孫子)의 표현대로라면 ‘사생지지, 존망지도(死生之地, 存亡之道)’다. 군대가 내뿜는 살기(殺氣)는 본질이 흉(凶)하지만, 그런 점 때문에 살의(殺意)를 품고 다가서는 적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군대가 정치에 개입하는 일은 극도로 삼가야 할 일이다. 나는 그 점을 우려했기 때문에 4.19의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고민을 거듭했다. 피어 드 실바라는 인물이 내게 의미심장한 제안을 꺼냈지만, 그는 나에게만 그리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는 정보공작의 일환으로 나 외의 다른 군인에게도 같은 말을 던지며 의중을 탐색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복잡한 생각 때문에 결국 4.19의 봄 정국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정국은 아주 빠른 속도로 소용돌이의 한복판으로 빠져 들어갔다. 결국 이듬해에 5.16이 왔다. 당시의 대한민국 사람 중 아주 많은 사람들은 그를 두고 ‘올 것이 결국 오고야 말았구나’라고 여기는 분위기였다.

박정희 소장이 이끌었던 5.16과 그 이후의 여러 전개 과정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건군에 참여한 뒤 6.25 전쟁의 주요 국면을 대부분 이끌었던 나로서는 그런 군의 정치개입이 왜 성공할 수 있었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대한민국 군은 6.25 전쟁 때 연 병력 150만 명이 상륙한 미군으로부터 행정을 배워 효율성으로 무장한 집단이었다. 당시 대한민국 수준에서는 최첨단의 행정적 능력을 지닌 곳이 군대였다.

5.16은 그런 대한민국 군대의 약진(躍進)이었다. 더구나 박정희 소장은 5.16에 성공한 뒤 대한민국을 세계적인 산업국가로 도약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 점을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아울러 강병(强兵)의 토대는 부국(富國)이다. 경제적인 실력을 쌓아야 나라의 군대를 튼튼히 키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로는 결코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늘이 드리워지는 법이다. 역시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군대, 그를 키우며 함께 성장했던 창군의 주역으로서 볼 때는 아쉬움으로 남는 대목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을 엄정하게 정치적인 중립으로 육성했느냐는 점이다.

4.19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다. 나는 1960년 군문을 나와 중화민국(대만) 대사를 역임한 뒤 5.16이 벌어지고서는 다시 주 프랑스 대사를 지낸다. 이어 캐나다 대사를 거쳐 박정희 대통령 정부의 교통부장관을 맡았다가, 역시 박 대통령의 배려로 한국종합화학 사장을 지낸다.

1970년대의 우리 군대는 어느덧 다시 정치적인 기운에 휩싸이고 있었다. 마치 내가 두 번째의 참모총장을 맡았을 때 목격했던 군의 ‘정치 바람’이 다시 불고 있는 듯했다. 군 내부에 ‘하나회’라는 모임이 들어서고, 이에 속한 고위 장교들은 정치적 움직임에 분주했다.

하나회라는 군대의 사적인 조직이 들어선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적인 조직이 군의 기강을 흔든다는 점은 반드시 고려해야 했던 대목이다. 군의 기강이 흔들리면 유사시에 제대로 적을 맞아 싸울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이 흉탄에 서거했다. 그 사건이 10.26이다. 이어 그해 12.12사태가 벌어졌다. 군의 하나회를 통해 성장한 고위 장성 그룹이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일이다. 그 상황 역시 잘 알려져 있어 여기서 새삼 적지 않기로 한다. 이어 이듬해인 1980년에는 소위 ‘신군부’가 등장했다.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이끌었던 그룹이다.

군부가 다시 정치 일선에 화려하게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김종필과 김대중, 김영삼 등 이른바 ‘3김(金)’은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생긴 정치적 공백을 향해 열심히 뛰고 있었고, 대학가는 그런 분위기 때문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12.12 사태 때 잠시 모습을 보였던 군부의 동향은 심상치 않았다.

나는 이미 퇴직한 군의 원로였다. 그럼에도 한국 주둔 미군과의 교류는 지속적으로 이어갔다. 전쟁 때 쌓은 미군과의 우정 때문이었다. 1979년 12.12 사태 직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미 8군을 이끌고 있던 사령관은 존 위컴이었다. 그 무렵 개인적으로 그를 만날 일이 있었다. 위컴은 아주 흥분한 표정으로 ‘육두문자’를 사용하면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쿠데타 주역 2명을 거론하며 “000은 그냥 나쁜 X이고, 가장 나쁜 X은 △△△다”라고 말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할 군부대를 쿠데타를 위해 이동시킨 것을 미국적 관점에서는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 국가 내의 정변(政變) 수준을 뛰어넘어 국가의 명운을 담보로 군을 움직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