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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전국시대를 거쳐 진(秦)의 시황제 때 몽염이 흉노를 쳐서 하남 땅을 모두 차지함

  • 국가
    흉노(匈奴)
그 이후로 백여 년이 지나주 001
각주 001)
秦이 西戎을 차지하게 된 것은 穆公 37년(전623)이었다. 그리고 魏絳이 화친 사절로 戎에 간 것이 晉 悼公 4년(전569)이니 약 앞뒤로 대략 54년 정도이다. 따라서 백여 년이라고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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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나라도공(悼公) 주 002
각주 002)
晉 悼公(재위 전572 ~ 전558) : 이름은 周이고 襄公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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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강(魏絳) 주 003
각주 003)
魏絳 : 魏의 長子로 晉나라의 大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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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사신으로 보내어 융적과 화친하자 융적[의 군장]이 진(晉)나라에 입조했다. 그 후 백여 년이 지나주 004
각주 004)
여기에서 “백여 년”이라고 한 것은 魏絳이 晉 悼公 4년(전569)에 戎에 사신으로 가서 그와 화친한 이후 晉 出公 18년(전457) 趙襄子가 代를 격파할 때까지 약 117년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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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자(趙襄子) 주 005
각주 005)
趙襄子 : 이름은 趙毋恤로, 晉나라의 執政大臣이었다. 趙簡子의 아들이다. 韓, 魏의 두 집안과 함께 智伯을 무찌르고 부단히 봉읍을 확장시켰다(주1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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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산](句注山) 주 006
각주 006)
句注山 : 雁門에 있는 산 명칭이다. ‘陘嶺’ 또는 ‘西陘山’이라고도 불리는데, 古代 9塞 중의 하나이다. 山西省 代縣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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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넘어 대(代) 주 007
각주 007)
代 : 나라 명칭으로 지금의 內蒙古 自治區 興和와 山西省 靈丘, 그리고 河北省 懷安과 淶源 지역에 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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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땅]을 격파하여 병합해서주 008
각주 008)
幷을 동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이해하여 나라 명칭으로 해석할 경우 이곳은 지금의 内蒙古와 山西省 北部, 그리고 河北 일대이다. 『漢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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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胡)주 009
각주 009)
胡 : 일반적으로 匈奴 이전에는 북방의 異民族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범용되었다. 이후 匈奴帝國이 등장하게 되면서 주로 匈奴를 지칭한다(陳勇, 2005 : 60). 여기에서는 匈奴와 東胡 등을 모두 일컫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隋唐代에는 북방에 거주하는 유목민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중앙아시아아의 소그드인[粟特人]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모리야스, 2006 : 108). 이 단어의 어원은 비중국어 계통인 것으로 보이는데, 현대 몽골어에서 ‘아들’을 뜻하는 ‘kö'ü’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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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맥(貉)주 010
각주 010)
貉 : 고대 퉁구스계통 종족의 하나이다. 이들은 濊·韓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주된 구성체로서, 『詩經』, 『書經』 등을 보면 周나라의 동북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뒤 북중국의 遼東·만주지역으로 이동해 高句麗·夫餘 등의 國名이 나타나기 전까지 濊와 貉으로 중국측 기록에 보인다. 그 이후 이들은 북방 정세의 변화 또는 다른 요인으로 한반도 내로 이주한 高句麗와 계통을 같이 한다. ‘貉’은 ‘貊’과 통한다. (주2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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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맞붙게 되었다. 그 이후 [조양자가] 이미주 011
각주 011)
『漢書』에는 “旣”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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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韓)나라 주 012
각주 012)
韓 : 戰國七雄의 하나이다. 그의 조상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晉나라를 섬기던 유력한 世族으로 春秋時代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韓武子의 3대손 韓厥(獻子) 및 아들 韓起(宣子)가 함께 晉나라의 6卿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이후 전453년에 韓康子가 趙氏, 魏氏와 함께 晉나라의 知伯을 내쫓고 영토를 삼분하였다. 그리고 전403년에 周나라의 威列王으로부터 諸侯로 승인받았다. 도읍은 平陽이었으나 이후 宜陽으로 옮겼다고, 전375년에 哀侯가 鄭國을 멸한 뒤 다시 新鄭으로 천도하였다. 전 355년 昭侯가 申不害를 재상으로 삼아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富國强兵策을 취하여 중원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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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魏)나라 주 013
각주 013)
魏 : 戰國七雄의 하나이다. 그의 조상은 周나라 왕실과 동족인 畢公高인데, 그의 자손 畢萬이 晉나라의 獻公에게서 魏(山西省) 땅을 받고 大夫가 되었다. 이후 魏絳은 卿에 임명되어 晉나라 6경의 한 사람으로 정권을 쥐었다. 전453년 魏의 桓子가 韓, 趙와 더불어 실질적으로 晉나라를 3분하였다. 그리고 전403년에는 周나라 威烈王에게서 諸侯로 인정받았다. 魏는 安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지금의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에 걸친 영역을 지배했다. 초대 文侯(斯)는 李悝, 魏成子, 翟璜 등을 재상으로 삼아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이고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 관개사업을 크게 벌였다. 또한 명장 吳起를 등용해 秦나라의 河西 지방을 빼앗고 中山과 大梁(河南省 開封)을 차지했다. 그리고 楚나라를 공격하는 등 戰國 初期에 최강국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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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함께 지백(智伯) 주 014
각주 014)
智伯 : 晉나라의 大夫로 이름은 瑤인데, 智襄子라고도 불렸다. 晉나라 내부에서 異姓 世族 간에 갈등이 심화되어 전497년에 智伯이 韓康子, 魏桓子, 趙襄子 등과 함께 定公을 받들고 范氏, 中行氏 등을 제거하였다. 이후 국정을 장악한 智伯이 范氏, 中行氏로부터 빼앗은 토지 배분을 두고 여타 世族과 갈등을 벌이는 과정에서 趙襄子를 공격했다. 하지만 趙襄子는 오히려 韓康子, 魏桓子와 결탁하여 智伯을 무찌르고 그의 후사를 단절시켰다. 이로 인해 전453년에 晉나라는 三分되었다. 趙襄子는 그를 원수로 여겨 그의 두개골에 칠을 해서 그릇으로 사용했다(주1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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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멸망시키고 진나라 땅을 나누어 갖게 되니주 015
각주 015)
韓, 魏, 趙는 春秋時代와 戰國時代 초기까지 晉나라의 귀족이었으나 후에 나라를 쪼개어 각자 독립하였다. 周나라 威烈王 23년(전403)에 이 三家를 諸侯로 정식 승인하였다. 이를 ‘三晉’이라 하는데, 이로부터 전221년 秦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戰國時代’라고 한다(『史記』 권5 「秦本纪」 :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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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趙)나라대(代)구주[산]의 북쪽을 차지하였고, 위나라하서(河西) 주 016
각주 016)
河西 : 黃河의 서쪽을 의미한다. 『漢書』에는 郡의 명칭인 “西河”로 되어 있다(주1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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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군(上郡) 주 017
각주 017)
上郡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魏 文侯가 설치했다. 秦代에는 治所가 肤施縣(지금의 陝西省 楡林市 동남 魚河堡 부근)이고 前漢시대 관할 구역은 지금의 陝西省 북부와 內蒙古 自治區 烏審旗 등지였다. 後漢 建安 20년(215)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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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차지하게 되어 [모두] 융과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 그 후 의거(義渠)의 융이 성곽을 쌓고 스스로 지켰으나 진(秦)나라가 [이를] 점점 먹어 들어갔다. 혜왕(惠王) 주 018
각주 018)
惠王(재위 전337 ~ 전311) : 惠文王이라고 하는데, 秦나라의 嬴駟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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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러서는 의거의 25개 성을 차지하였다.주 019
각주 019)
『史記』 권5 「秦本纪」에는 이 사건을 秦 惠文王 初更 10년(전315)에 일어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史記』 권15 「六國年表」에는 이 사건을 惠文王 初更 11년(전314)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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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왕이 [또] 위(魏)나라까지 공격하여주 020
각주 020)
『漢書』에서 “伐”로 되어 있는데, 이는 “정벌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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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나라서하[군](西河郡) 주 021
각주 021)
西河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魏나라에서 설치되었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陝西省 동부 黃河 西岸 지역이다. 전330년에 秦나라에 병합되면서 폐지되었다. 前漢 元朔 4년(전125)에 다시 설치되었다. 治所는 平定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伊金霍洛旗 동남)인데, 일설에는 治所가 富昌縣에 있었다고도 한다. 관할 구역은 지금 內蒙古自治區 伊克昭盟 동부, 山西省 呂梁山·蘆芽山 이서, 石樓 이북과 陝西省 宜川의 黃河 연안 지대이다. 後漢時代에 治所를 離石縣(지금 山西省 離石縣)으로 옮겼다(주1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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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군을 모두 진나라로 집어넣었다.주 022
각주 022)
秦나라가 秦 惠文王 8年(전330)에 魏나라로부터 西河를, 그리고 10년 뒤에 다시 上郡의 15개 현을 넘겨받아 河西 濱洛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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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소왕(昭王) 주 023
각주 023)
秦 昭襄王(재위 전306 ~ 전251) : 嬴稷(또는 則)을 말한다. 秦 武王의 배다른 동생이다(『史記』 권5 「秦本紀」 : 209 ~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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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시기에 의거의 융왕과 모친 선태후(宣太后) 주 024
각주 024)
宣太后 : 昭王의 모친으로 楚나라 사람이었다. 姓은 芈이다(『史記』 권5 「秦本紀」 :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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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사통하여 두 아들을 낳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선태후는 감천궁(甘泉宮)주 025
각주 025)
甘泉宮 : 秦나라가 세운 離宮의 명칭으로 陝西省 淳化縣 서북쪽에 위치하였다. (주4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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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의거 융왕을 속여 죽이고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의거를 쳐서 죽여 버렸다.주 026
각주 026)
『漢書』에는 “滅”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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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진(秦)나라농서[군] 주 027
각주 027)
隴西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秦나라 襄王 28년(전279)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赤道縣(지금의 甘肅省 臨洮縣 남쪽)이다. 隴山의 서쪽이라는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관할은 지금의 甘肅省 隴山 이서, 黃河 이동, 西漢水와 白龍姜 상류 이북, 祖歷河와 六盤山 이남의 땅이다. 後漢시대에는 점차 영역이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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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지[군] 주 028
각주 028)
北地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秦나라에서 설치하였다. 治所는 義渠縣(지금의 甘肅省 西峰市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西漢시대에는 治所를 馬領縣(지금의 甘肅省 慶陽縣 서북)으로 이전하였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甘肅省 環江, 馬蓮河 유역과 寧夏回族自治區 賀蘭山, 靑銅峽, 山水河 동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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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군을 차지하게 되었고 장성까지 쌓아 흉노[胡]를 막았다. 그리고 조나라 무령왕(武靈王) 주 029
각주 029)
趙 武靈王(재위 전325 ~ 전299) : 이름은 趙雍이다. 戰國 중기에 강대해지기 시작한 秦나라가 遠交近攻策이라는 외교술을 통해 주변 나라들을 압박하자 趙나라가 이에 대응하였다. 趙나라의 원래 위치가 북방민족에 가까웠으므로 그들과 싸워 북방으로 국토를 확대시켜 갔고, 그들과의 교류 역시 빈번했다. 이런 과정에 武靈王은 군제를 개혁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19년(전307) 북방민족 고유의 ‘胡服騎射’를 전격적으로 도입하였다. 武靈王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기 위해 본인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胡服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면서 활쏘기를 익혔다. 이것은 북방 유목민들의 탁월한 군사기술을 수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이런 새로운 군사기술의 도입을 기초로 발전을 도모하였고, 이후 秦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왕위를 惠文王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다음 스스로 主父라 불렀다. 그리고 군대를 지휘하여 이민족의 땅을 지나 秦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다(『史記』 권43 「趙世家」 : 1803 ~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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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또한 풍속을 바꾸어 호복(胡服)주 030
각주 030)
胡服 : 말을 타기에 편한 질긴 바지와 버선 모양의 부츠형 신발, 그리고 馬上에서 활쏘기에 편하게 옷고름이 왼쪽에 있는 저고리[左袵]를 말한다. 그에 비해 中國의 복장은 바지를 입지 않고 고름이 오른쪽에 있었다는 점[右衽]에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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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입고 말을 타며 활 쏘는 것을 익혀 북쪽으로 임호와 누번을 격파한 다음 장성을 구축한주 031
각주 031)
趙 武靈王은 朔州 善陽縣 북쪽에 長城을 쌓았는데, 趙나라의 長城 축조는 趙 肅侯 17년(전332)에 이미 시작되었다(『史記』 권43 『趙世家」 :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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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代)음산(陰山)[산맥] 주 032
각주 032)
陰山山脈 :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중부에 위치한 산맥이다. 지금은 大靑山이라 불리는데, 고비 남부에 있는 일련의 산지를 부르는 명칭이다. 徐廣은 五原의 서쪽 安陽縣의 북쪽에 위치한다고 했고, 『括地志』에서는 “朔州의 북쪽 塞外에 있는데, 突厥과의 경계가 된다.”고 했다. 이곳은 遊牧民들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로 역할했고, 중국 역시 이 지역을 유목민족이 차지하고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吉田順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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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슭으로부터 고궐(高闕) 주 033
각주 033)
高闕 :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杭錦後旗 동북쪽에 위치한 험준한 산 계곡의 명칭이다. 陰山山脈이 여기에서 중단되는데, 그 사이에 생긴 협곡이다. 그 입구가 마치 대궐문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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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기까지 요새를 만들어 운중[군](雲中郡) 주 034
각주 034)
雲中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趙 武靈王이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의 治所는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縣 東北 古城鄕 古城村 서쪽에 있는 古城이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土黙特右旗 이동, 大靑山 이남, 卓資縣 이서, 黃河 南岸과 長城 이북의 땅이었다. 前漢시기에 관할 구역이 축소되어 後漢시대에는 幷州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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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문[군](雁門郡) 주 035
각주 035)
雁門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趙 武靈王이 설치하였다. 秦, 前漢 때의 治所는 善無縣(지금의 山西省 右玉縣 남쪽)이다. 관할 구역은 山西省 河曲, 五寨, 靈武 등의 縣 이북, 恒山 이서. 內蒙古自治區 黃旗海, 岱海 이남의 땅이다. 後漢時代에는 治所를 陰館縣(지금의 山西省 朔州市 東南 夏關城)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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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군(代郡) 주 036
각주 036)
代郡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趙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 前漢 때의 治所는 代縣(지금의 河北省 蔚縣 서남)이었다. 前漢시대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懷安, 蔚縣 이서, 山西省 陽高, 渾源 이동에 있는 장성 안팎의 땅과 함께 장성 밖에 있는 東洋河 유역이었다. 後漢時代에 高柳縣(지금 陽高縣 서남)으로 治所를 옮겼다가 西晉時代 말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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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두었다. 그 이후에 연나라에는 진개(秦開) 주 037
각주 037)
秦開 : 燕 昭王(재위 전311 ~ 전279) 때의 사람이다. 동쪽으로 東胡를 경략하고, 朝鮮을 侵入하여 滿潘汗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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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현명한 장군이 있어 흉노[胡]주 038
각주 038)
“胡”는 원래 ‘北狄’의 총칭으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는 匈奴를 지칭한다(주1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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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볼모가 된 적이 있었는데, 흉노[胡]가 [그를] 매우 믿었다. [진개는 그때에 정세를 잘 파악해 두었다가] 귀국하자마자 동호를 격파해 도망가게 만들었다. 동호주 039
각주 039)
『漢書』에는 “東胡”라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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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때 천 리나 물러났다. 형가(荊軻)와 함께 진나라의 왕 정(政)을 암살하러 떠났던 진무양(秦舞陽)이 바로 [진]개의 손자였다.주 040
각주 040)
荊軻 : 衛나라 사람으로 秦나라가 衛나라를 멸한 후에 燕나라로 도피하였다. 전227년에 燕 太子 丹의 명을 받고 秦나라에 들어가 秦王 嬴政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피살되었다. 秦舞陽은 그의 부하였다(『史記』 권86 「刺客列傳」 : 2527 ~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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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나라는 또한 장성을 조양(造陽) 주 041
각주 041)
造陽 : 읍의 명칭으로 지금의 河北省 獨石口 부근이다. 일설에는 河北省 懷來縣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燕나라 長城의 서쪽 기점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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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양평(襄平) 주 042
각주 042)
襄平 : 읍의 명칭으로 지금의 遼寧省 遼陽 북쪽 70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燕나라 장성의 동쪽 기점이다. 현재의 赤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두 줄의 長城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장성은 赤峰 남쪽의 美麗河 공사에서 동서로 횡단하여 赤峰 북쪽에 있는 장성과 대체로 약 50㎞ 거리를 두고 평행하게 존재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昭盟 喀喇沁旗, 赤峰縣 남쪽, 建平縣 북쪽, 敖漢旗 중부에 분포되어 있으며 老哈河, 蹦河, 盟克河, 敎來河 등을 통과한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魚骨盆, 明刀, 繩紋板瓦, 山字紋·獸紋 半瓦當 등의 출토를 통해 이 장성이 燕代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燕나라가 설치한 5군이 모두 이 장성 이내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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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쌓았고, 상곡[군](上谷郡) 주 043
각주 043)
上谷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에는 治所가 沮陽縣(지금의 河北省 懷來縣 동남 20리 떨어진 廳水庫 남안에 있는 古城)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張家口市, 小五臺山 이동, 赤城縣, 北京市 延慶縣 이서, 內長城과 昌平縣 이북의 지역이었다. 上谷郡이 지금의 嬀州라고 한 것은 唐代의 지명을 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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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양[군](漁陽郡) 주 044
각주 044)
漁陽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의 燕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의 治所는 漁陽郡인데, 지금의 위치 를 北京市 密雲縣 혹은 그 서남, 懷柔縣, 더욱 구체적으로 懷柔의 梨園莊으로 보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灤河 상류 이남, 薊運河 이서, 天津市 海河 이북, 北京市 懷柔縣, 通縣 이동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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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북평[군](右北平郡) 주 045
각주 045)
右北平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 治所는 無終縣(지금의 天津市 薊縣)이고, 前漢시대 治所를 平剛縣(지금의 遼寧省 凌源市 서남)으로 옮겼다. 하지만 燕代의 治所는 河北省 平泉, 遼寧省 凌源縣 安杖子村 古城, 內蒙古自治區 寧城縣 甸子鄕 黑城 古城, 寶坻 古城 등의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에 따르면, 黑城 내지는 寶坻 古城에서 燕나라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를 戰國時代, 그리고 후자를 말기의 治所로 보기도 한다. 관할 구역은 지금 河北省 承德, 天津市 薊縣 이동(長成 남부 灤河 유역과 그 이동은 제외), 六股河 이남지역이다. 後漢시대에는 治所가 土峎縣(지금의 河北省 豊潤縣 동남)으로 옮겼다. 현재는 점차 영역이 축소되어 長城 이남으로 경계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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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서[군](遼西郡) 주 046
각주 046)
遼西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했다. 秦나라 때 治所는 陽樂縣(지금의 遼寧省 義縣 서쪽)이었다. 前漢시대에는 柳城이라고 불렸는데, 이곳을 遼寧省 朝陽市 十二臺營子 袁臺子 유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遷西縣, 唐山市 이동, 遼寧省 醫巫閭山, 大凌河 하류 이서와 長城 이남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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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요동[군](遼東郡) 주 047
각주 047)
遼東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했다. 治所는 襄平(지금의 遼寧省 丹東市 老城)이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遼寧省 大凌河 이동, 開原市 이남, 淸川江 하류 이북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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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설치해 흉노[胡]를 막았다. 이 무렵 의관(衣冠)과 속대(束帶)주 048
각주 048)
冠帶 : 본래 帽子와 腰帶를 지칭하는 것으로 文明의 나라, 즉 中國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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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할 줄 아는 [예제(禮制)의 문명국이] 전국[시대]에 일곱주 049
각주 049)
이른바 戰國七雄, 곧 秦, 楚, 齊, 燕, 韓, 魏, 趙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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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었는데, [그 중에서] 세 나라주 050
각주 050)
세 나라는 秦, 趙, 燕나라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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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흉노와 경계를 맞대고 있었다. 그 이후 조나라 장군 이목(李牧) 주 051
각주 051)
李牧 : 代郡과 雁門郡 등지에서 오랫동안 匈奴에 대비하여 趙나라의 변경을 수비하였다. 匈奴가 도발을 하자 군대를 일으켜 單于를 쫓아내고 東胡를 격파하고, 澹林을 없애 匈奴를 물리쳤다. 그 이후 匈奴는 10여 년 이상 함부로 趙나라를 범하지 못하였다. 이후에 秦나라 군대를 대파하여 그 공으로 武安君에 봉해졌다. 전229년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史記』 권102 「張釋之馮唐列傳」 : 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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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키고 있는] 시기에는 흉노가 감히 조나라의 변경을 넘볼 수가 없었다.
이후에 진(秦)나라가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몽염(蒙恬) 주 052
각주 052)
蒙恬 : 秦나라의 장수로 始皇帝의 명을 받아 匈奴를 북방으로 내쫓은 다음에 장성을 수축하는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에 2世 皇帝의 핍박을 받아 자살하였다(『史記』 권88 「蒙恬列傳」 : 2565 ~ 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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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십만의 군사를 주어주 053
각주 053)
秦 始皇帝 32년(전215)에 北巡하던 始皇帝는 “亡秦者胡也”라는 盧生의 말을 듣고 匈奴를 막기 위해 蒙恬에게 명령하여 匈奴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가 인솔한 군대의 숫자를 저본에서는 “十萬”이라고 하였으나 『漢書』에는 “數十萬之物衆”이라고 되어 있다. 그와 달리 「蒙恬列傳」과 「秦始皇本紀」에서는 이것을 모두 “三十萬衆”이라고 다르게 기록했다. 『鹽鐵論』 「伐功篇」의 기록(“蒙公爲秦擊走匈奴, 若鷙鳥之追群雀. 匈奴勢慴, 不敢南面而望者十餘年.” : 316)을 보아도 “三十萬衆”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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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흉노[胡]를 치게 해 하남(河南) 주 054
각주 054)
河南 : 지명으로 內蒙古 河套(오르도스), 즉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伊克昭盟 일대이다. 秦나라의 蒙恬이 匈奴를 몰아내고 黄河 이남의 땅을 회복한 다음에 성곽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킨 다음에 이곳을 ‘新秦’이라고 했다. 漢 武帝시대에도 이곳을 ‘新秦中’이라 불렀다(주5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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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을 모조리 손에 넣었다.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황하를 따라 44개의 현에 성을 쌓고 죄수[適]주 055
각주 055)
適 : 음은 ‘적’이다. 그 의미는 ‘謫’과 통해 ‘譴責’ 또는 ‘懲罰’을 뜻한다. ‘適戍’는 죄가 있어 변방을 지키는 벌을 받는 사람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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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구성된 군사를] 이주시켜 [방어에] 충당하게 했다. 그리고 직도(直道)를 통하게 해 구원[군](九原郡) 주 056
각주 056)
九原 : 奏나라 때의 郡 명칭으로, 漢武帝 때에 ‘五原’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包頭市 兩五原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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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운양[현](雲陽縣) 주 057
각주 057)
雲陽 : 縣 명칭으로 지금의 陝西省 淳化縣 서북쪽이다. 이곳에는 秦나라 때의 林光宮, 漢나라 때의 甘泉宮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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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는데,주 058
각주 058)
直道 : 九原에서 雲陽까지 직선으로 북쪽으로 연결된 도로를 말한다. 秦 始皇帝 35년(전212)에 만들어졌는데 『史記索隱』에서는 그 거리가 8000여 리라고 했고, 『史記正義』에서는 1800리라고도 했다. 秦 始皇帝의 운구가 이 길을 통해 咸陽으로 운반되기도 했다(來村多加史, 2004 : 76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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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골짜기를 이용해 참호로 삼고 수선할 수 있는 것을 손보아주 059
각주 059)
『漢書』에는 “治”와 통하는 “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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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조[현](臨洮縣) 주 060
각주 060)
臨洮 : 縣 명칭으로 지금의 甘肅省 岷縣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서 秦나라 장성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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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요동[군](遼東郡)까지 만 여리에 이르렀다. 게다가 황하를 건너 양산(陽山) 주 061
각주 061)
陽山 : 산 명칭으로 河北과 高厥의 동쪽에 있는 산이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에 있는 狼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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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北假) 주 062
각주 062)
北假 : 지명으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河套(오르도스) 북쪽, 陽山 남쪽의 來山帶河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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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근거지를 두었다.

  • 각주 001)
    秦이 西戎을 차지하게 된 것은 穆公 37년(전623)이었다. 그리고 魏絳이 화친 사절로 戎에 간 것이 晉 悼公 4년(전569)이니 약 앞뒤로 대략 54년 정도이다. 따라서 백여 년이라고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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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晉 悼公(재위 전572 ~ 전558) : 이름은 周이고 襄公의 손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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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魏絳 : 魏의 長子로 晉나라의 大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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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여기에서 “백여 년”이라고 한 것은 魏絳이 晉 悼公 4년(전569)에 戎에 사신으로 가서 그와 화친한 이후 晉 出公 18년(전457) 趙襄子가 代를 격파할 때까지 약 117년까지의 시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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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趙襄子 : 이름은 趙毋恤로, 晉나라의 執政大臣이었다. 趙簡子의 아들이다. 韓, 魏의 두 집안과 함께 智伯을 무찌르고 부단히 봉읍을 확장시켰다(주13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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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句注山 : 雁門에 있는 산 명칭이다. ‘陘嶺’ 또는 ‘西陘山’이라고도 불리는데, 古代 9塞 중의 하나이다. 山西省 代縣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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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代 : 나라 명칭으로 지금의 內蒙古 自治區 興和와 山西省 靈丘, 그리고 河北省 懷安과 淶源 지역에 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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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幷을 동사가 아니라 고유명사로 이해하여 나라 명칭으로 해석할 경우 이곳은 지금의 内蒙古와 山西省 北部, 그리고 河北 일대이다. 『漢書』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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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胡 : 일반적으로 匈奴 이전에는 북방의 異民族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범용되었다. 이후 匈奴帝國이 등장하게 되면서 주로 匈奴를 지칭한다(陳勇, 2005 : 60). 여기에서는 匈奴와 東胡 등을 모두 일컫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隋唐代에는 북방에 거주하는 유목민을 지칭하는 것보다는 중앙아시아아의 소그드인[粟特人]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모리야스, 2006 : 108). 이 단어의 어원은 비중국어 계통인 것으로 보이는데, 현대 몽골어에서 ‘아들’을 뜻하는 ‘kö'ü’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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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貉 : 고대 퉁구스계통 종족의 하나이다. 이들은 濊·韓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주된 구성체로서, 『詩經』, 『書經』 등을 보면 周나라의 동북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뒤 북중국의 遼東·만주지역으로 이동해 高句麗·夫餘 등의 國名이 나타나기 전까지 濊와 貉으로 중국측 기록에 보인다. 그 이후 이들은 북방 정세의 변화 또는 다른 요인으로 한반도 내로 이주한 高句麗와 계통을 같이 한다. ‘貉’은 ‘貊’과 통한다. (주2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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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漢書』에는 “旣”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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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韓 : 戰國七雄의 하나이다. 그의 조상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晉나라를 섬기던 유력한 世族으로 春秋時代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韓武子의 3대손 韓厥(獻子) 및 아들 韓起(宣子)가 함께 晉나라의 6卿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이후 전453년에 韓康子가 趙氏, 魏氏와 함께 晉나라의 知伯을 내쫓고 영토를 삼분하였다. 그리고 전403년에 周나라의 威列王으로부터 諸侯로 승인받았다. 도읍은 平陽이었으나 이후 宜陽으로 옮겼다고, 전375년에 哀侯가 鄭國을 멸한 뒤 다시 新鄭으로 천도하였다. 전 355년 昭侯가 申不害를 재상으로 삼아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富國强兵策을 취하여 중원의 강국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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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魏 : 戰國七雄의 하나이다. 그의 조상은 周나라 왕실과 동족인 畢公高인데, 그의 자손 畢萬이 晉나라의 獻公에게서 魏(山西省) 땅을 받고 大夫가 되었다. 이후 魏絳은 卿에 임명되어 晉나라 6경의 한 사람으로 정권을 쥐었다. 전453년 魏의 桓子가 韓, 趙와 더불어 실질적으로 晉나라를 3분하였다. 그리고 전403년에는 周나라 威烈王에게서 諸侯로 인정받았다. 魏는 安邑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지금의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에 걸친 영역을 지배했다. 초대 文侯(斯)는 李悝, 魏成子, 翟璜 등을 재상으로 삼아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부국강병에 힘을 기울이고 농업생산력의 증진을 위해 관개사업을 크게 벌였다. 또한 명장 吳起를 등용해 秦나라의 河西 지방을 빼앗고 中山과 大梁(河南省 開封)을 차지했다. 그리고 楚나라를 공격하는 등 戰國 初期에 최강국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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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智伯 : 晉나라의 大夫로 이름은 瑤인데, 智襄子라고도 불렸다. 晉나라 내부에서 異姓 世族 간에 갈등이 심화되어 전497년에 智伯이 韓康子, 魏桓子, 趙襄子 등과 함께 定公을 받들고 范氏, 中行氏 등을 제거하였다. 이후 국정을 장악한 智伯이 范氏, 中行氏로부터 빼앗은 토지 배분을 두고 여타 世族과 갈등을 벌이는 과정에서 趙襄子를 공격했다. 하지만 趙襄子는 오히려 韓康子, 魏桓子와 결탁하여 智伯을 무찌르고 그의 후사를 단절시켰다. 이로 인해 전453년에 晉나라는 三分되었다. 趙襄子는 그를 원수로 여겨 그의 두개골에 칠을 해서 그릇으로 사용했다(주1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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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韓, 魏, 趙는 春秋時代와 戰國時代 초기까지 晉나라의 귀족이었으나 후에 나라를 쪼개어 각자 독립하였다. 周나라 威烈王 23년(전403)에 이 三家를 諸侯로 정식 승인하였다. 이를 ‘三晉’이라 하는데, 이로부터 전221년 秦나라가 통일할 때까지의 시기를 ‘戰國時代’라고 한다(『史記』 권5 「秦本纪」 :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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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河西 : 黃河의 서쪽을 의미한다. 『漢書』에는 郡의 명칭인 “西河”로 되어 있다(주1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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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上郡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魏 文侯가 설치했다. 秦代에는 治所가 肤施縣(지금의 陝西省 楡林市 동남 魚河堡 부근)이고 前漢시대 관할 구역은 지금의 陝西省 북부와 內蒙古 自治區 烏審旗 등지였다. 後漢 建安 20년(215)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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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惠王(재위 전337 ~ 전311) : 惠文王이라고 하는데, 秦나라의 嬴駟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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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史記』 권5 「秦本纪」에는 이 사건을 秦 惠文王 初更 10년(전315)에 일어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史記』 권15 「六國年表」에는 이 사건을 惠文王 初更 11년(전314)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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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0)
    『漢書』에서 “伐”로 되어 있는데, 이는 “정벌했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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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西河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魏나라에서 설치되었다. 관할구역은 지금의 陝西省 동부 黃河 西岸 지역이다. 전330년에 秦나라에 병합되면서 폐지되었다. 前漢 元朔 4년(전125)에 다시 설치되었다. 治所는 平定縣(지금의 內蒙古自治區 伊金霍洛旗 동남)인데, 일설에는 治所가 富昌縣에 있었다고도 한다. 관할 구역은 지금 內蒙古自治區 伊克昭盟 동부, 山西省 呂梁山·蘆芽山 이서, 石樓 이북과 陝西省 宜川의 黃河 연안 지대이다. 後漢時代에 治所를 離石縣(지금 山西省 離石縣)으로 옮겼다(주13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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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秦나라가 秦 惠文王 8年(전330)에 魏나라로부터 西河를, 그리고 10년 뒤에 다시 上郡의 15개 현을 넘겨받아 河西 濱洛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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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秦 昭襄王(재위 전306 ~ 전251) : 嬴稷(또는 則)을 말한다. 秦 武王의 배다른 동생이다(『史記』 권5 「秦本紀」 : 209 ~ 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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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宣太后 : 昭王의 모친으로 楚나라 사람이었다. 姓은 芈이다(『史記』 권5 「秦本紀」 :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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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甘泉宮 : 秦나라가 세운 離宮의 명칭으로 陝西省 淳化縣 서북쪽에 위치하였다. (주4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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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漢書』에는 “滅”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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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隴西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秦나라 襄王 28년(전279)에 설치되었다. 治所는 赤道縣(지금의 甘肅省 臨洮縣 남쪽)이다. 隴山의 서쪽이라는 것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관할은 지금의 甘肅省 隴山 이서, 黃河 이동, 西漢水와 白龍姜 상류 이북, 祖歷河와 六盤山 이남의 땅이다. 後漢시대에는 점차 영역이 축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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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北地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秦나라에서 설치하였다. 治所는 義渠縣(지금의 甘肅省 西峰市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西漢시대에는 治所를 馬領縣(지금의 甘肅省 慶陽縣 서북)으로 이전하였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甘肅省 環江, 馬蓮河 유역과 寧夏回族自治區 賀蘭山, 靑銅峽, 山水河 동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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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趙 武靈王(재위 전325 ~ 전299) : 이름은 趙雍이다. 戰國 중기에 강대해지기 시작한 秦나라가 遠交近攻策이라는 외교술을 통해 주변 나라들을 압박하자 趙나라가 이에 대응하였다. 趙나라의 원래 위치가 북방민족에 가까웠으므로 그들과 싸워 북방으로 국토를 확대시켜 갔고, 그들과의 교류 역시 빈번했다. 이런 과정에 武靈王은 군제를 개혁해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19년(전307) 북방민족 고유의 ‘胡服騎射’를 전격적으로 도입하였다. 武靈王은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기 위해 본인 스스로 솔선수범하여 胡服으로 갈아입고 말을 타면서 활쏘기를 익혔다. 이것은 북방 유목민들의 탁월한 군사기술을 수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는 이런 새로운 군사기술의 도입을 기초로 발전을 도모하였고, 이후 秦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왕위를 惠文王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다음 스스로 主父라 불렀다. 그리고 군대를 지휘하여 이민족의 땅을 지나 秦나라를 공격하기도 했다(『史記』 권43 「趙世家」 : 1803 ~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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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0)
    胡服 : 말을 타기에 편한 질긴 바지와 버선 모양의 부츠형 신발, 그리고 馬上에서 활쏘기에 편하게 옷고름이 왼쪽에 있는 저고리[左袵]를 말한다. 그에 비해 中國의 복장은 바지를 입지 않고 고름이 오른쪽에 있었다는 점[右衽]에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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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趙 武靈王은 朔州 善陽縣 북쪽에 長城을 쌓았는데, 趙나라의 長城 축조는 趙 肅侯 17년(전332)에 이미 시작되었다(『史記』 권43 『趙世家」 :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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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陰山山脈 :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중부에 위치한 산맥이다. 지금은 大靑山이라 불리는데, 고비 남부에 있는 일련의 산지를 부르는 명칭이다. 徐廣은 五原의 서쪽 安陽縣의 북쪽에 위치한다고 했고, 『括地志』에서는 “朔州의 북쪽 塞外에 있는데, 突厥과의 경계가 된다.”고 했다. 이곳은 遊牧民들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로 역할했고, 중국 역시 이 지역을 유목민족이 차지하고 세력을 확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吉田順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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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3)
    高闕 :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杭錦後旗 동북쪽에 위치한 험준한 산 계곡의 명칭이다. 陰山山脈이 여기에서 중단되는데, 그 사이에 생긴 협곡이다. 그 입구가 마치 대궐문을 바라보는 것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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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4)
    雲中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趙 武靈王이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의 治所는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托克托縣 東北 古城鄕 古城村 서쪽에 있는 古城이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土黙特右旗 이동, 大靑山 이남, 卓資縣 이서, 黃河 南岸과 長城 이북의 땅이었다. 前漢시기에 관할 구역이 축소되어 後漢시대에는 幷州에 속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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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5)
    雁門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趙 武靈王이 설치하였다. 秦, 前漢 때의 治所는 善無縣(지금의 山西省 右玉縣 남쪽)이다. 관할 구역은 山西省 河曲, 五寨, 靈武 등의 縣 이북, 恒山 이서. 內蒙古自治區 黃旗海, 岱海 이남의 땅이다. 後漢時代에는 治所를 陰館縣(지금의 山西省 朔州市 東南 夏關城)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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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6)
    代郡 : 郡 명칭으로 戰國時代 趙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 前漢 때의 治所는 代縣(지금의 河北省 蔚縣 서남)이었다. 前漢시대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懷安, 蔚縣 이서, 山西省 陽高, 渾源 이동에 있는 장성 안팎의 땅과 함께 장성 밖에 있는 東洋河 유역이었다. 後漢時代에 高柳縣(지금 陽高縣 서남)으로 治所를 옮겼다가 西晉時代 말에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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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7)
    秦開 : 燕 昭王(재위 전311 ~ 전279) 때의 사람이다. 동쪽으로 東胡를 경략하고, 朝鮮을 侵入하여 滿潘汗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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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8)
    “胡”는 원래 ‘北狄’의 총칭으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에서는 匈奴를 지칭한다(주1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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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9)
    『漢書』에는 “東胡”라는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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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0)
    荊軻 : 衛나라 사람으로 秦나라가 衛나라를 멸한 후에 燕나라로 도피하였다. 전227년에 燕 太子 丹의 명을 받고 秦나라에 들어가 秦王 嬴政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피살되었다. 秦舞陽은 그의 부하였다(『史記』 권86 「刺客列傳」 : 2527 ~ 2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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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1)
    造陽 : 읍의 명칭으로 지금의 河北省 獨石口 부근이다. 일설에는 河北省 懷來縣에 위치하였다고 한다. 燕나라 長城의 서쪽 기점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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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2)
    襄平 : 읍의 명칭으로 지금의 遼寧省 遼陽 북쪽 70리 정도 떨어진 곳이다. 燕나라 장성의 동쪽 기점이다. 현재의 赤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두 줄의 長城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 장성은 赤峰 남쪽의 美麗河 공사에서 동서로 횡단하여 赤峰 북쪽에 있는 장성과 대체로 약 50㎞ 거리를 두고 평행하게 존재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昭盟 喀喇沁旗, 赤峰縣 남쪽, 建平縣 북쪽, 敖漢旗 중부에 분포되어 있으며 老哈河, 蹦河, 盟克河, 敎來河 등을 통과한다. 이 유적에서 발견된 魚骨盆, 明刀, 繩紋板瓦, 山字紋·獸紋 半瓦當 등의 출토를 통해 이 장성이 燕代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 燕나라가 설치한 5군이 모두 이 장성 이내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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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3)
    上谷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에는 治所가 沮陽縣(지금의 河北省 懷來縣 동남 20리 떨어진 廳水庫 남안에 있는 古城)에 있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張家口市, 小五臺山 이동, 赤城縣, 北京市 延慶縣 이서, 內長城과 昌平縣 이북의 지역이었다. 上谷郡이 지금의 嬀州라고 한 것은 唐代의 지명을 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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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4)
    漁陽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의 燕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의 治所는 漁陽郡인데, 지금의 위치 를 北京市 密雲縣 혹은 그 서남, 懷柔縣, 더욱 구체적으로 懷柔의 梨園莊으로 보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灤河 상류 이남, 薊運河 이서, 天津市 海河 이북, 北京市 懷柔縣, 通縣 이동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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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5)
    右北平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하였다. 秦나라 때 治所는 無終縣(지금의 天津市 薊縣)이고, 前漢시대 治所를 平剛縣(지금의 遼寧省 凌源市 서남)으로 옮겼다. 하지만 燕代의 治所는 河北省 平泉, 遼寧省 凌源縣 安杖子村 古城, 內蒙古自治區 寧城縣 甸子鄕 黑城 古城, 寶坻 古城 등의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에 따르면, 黑城 내지는 寶坻 古城에서 燕나라의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를 戰國時代, 그리고 후자를 말기의 治所로 보기도 한다. 관할 구역은 지금 河北省 承德, 天津市 薊縣 이동(長成 남부 灤河 유역과 그 이동은 제외), 六股河 이남지역이다. 後漢시대에는 治所가 土峎縣(지금의 河北省 豊潤縣 동남)으로 옮겼다. 현재는 점차 영역이 축소되어 長城 이남으로 경계가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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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6)
    遼西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했다. 秦나라 때 治所는 陽樂縣(지금의 遼寧省 義縣 서쪽)이었다. 前漢시대에는 柳城이라고 불렸는데, 이곳을 遼寧省 朝陽市 十二臺營子 袁臺子 유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河北省 遷西縣, 唐山市 이동, 遼寧省 醫巫閭山, 大凌河 하류 이서와 長城 이남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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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7)
    遼東 : 郡의 명칭으로 戰國時代 燕나라에서 설치했다. 治所는 襄平(지금의 遼寧省 丹東市 老城)이다. 관할 구역은 지금의 遼寧省 大凌河 이동, 開原市 이남, 淸川江 하류 이북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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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8)
    冠帶 : 본래 帽子와 腰帶를 지칭하는 것으로 文明의 나라, 즉 中國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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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9)
    이른바 戰國七雄, 곧 秦, 楚, 齊, 燕, 韓, 魏, 趙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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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0)
    세 나라는 秦, 趙, 燕나라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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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1)
    李牧 : 代郡과 雁門郡 등지에서 오랫동안 匈奴에 대비하여 趙나라의 변경을 수비하였다. 匈奴가 도발을 하자 군대를 일으켜 單于를 쫓아내고 東胡를 격파하고, 澹林을 없애 匈奴를 물리쳤다. 그 이후 匈奴는 10여 년 이상 함부로 趙나라를 범하지 못하였다. 이후에 秦나라 군대를 대파하여 그 공으로 武安君에 봉해졌다. 전229년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史記』 권102 「張釋之馮唐列傳」 : 2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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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2)
    蒙恬 : 秦나라의 장수로 始皇帝의 명을 받아 匈奴를 북방으로 내쫓은 다음에 장성을 수축하는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에 2世 皇帝의 핍박을 받아 자살하였다(『史記』 권88 「蒙恬列傳」 : 2565 ~ 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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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3)
    秦 始皇帝 32년(전215)에 北巡하던 始皇帝는 “亡秦者胡也”라는 盧生의 말을 듣고 匈奴를 막기 위해 蒙恬에게 명령하여 匈奴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가 인솔한 군대의 숫자를 저본에서는 “十萬”이라고 하였으나 『漢書』에는 “數十萬之物衆”이라고 되어 있다. 그와 달리 「蒙恬列傳」과 「秦始皇本紀」에서는 이것을 모두 “三十萬衆”이라고 다르게 기록했다. 『鹽鐵論』 「伐功篇」의 기록(“蒙公爲秦擊走匈奴, 若鷙鳥之追群雀. 匈奴勢慴, 不敢南面而望者十餘年.” : 316)을 보아도 “三十萬衆”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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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4)
    河南 : 지명으로 內蒙古 河套(오르도스), 즉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伊克昭盟 일대이다. 秦나라의 蒙恬이 匈奴를 몰아내고 黄河 이남의 땅을 회복한 다음에 성곽을 쌓고 백성을 이주시킨 다음에 이곳을 ‘新秦’이라고 했다. 漢 武帝시대에도 이곳을 ‘新秦中’이라 불렀다(주59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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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5)
    適 : 음은 ‘적’이다. 그 의미는 ‘謫’과 통해 ‘譴責’ 또는 ‘懲罰’을 뜻한다. ‘適戍’는 죄가 있어 변방을 지키는 벌을 받는 사람을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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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6)
    九原 : 奏나라 때의 郡 명칭으로, 漢武帝 때에 ‘五原’으로 바뀌었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包頭市 兩五原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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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7)
    雲陽 : 縣 명칭으로 지금의 陝西省 淳化縣 서북쪽이다. 이곳에는 秦나라 때의 林光宮, 漢나라 때의 甘泉宮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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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8)
    直道 : 九原에서 雲陽까지 직선으로 북쪽으로 연결된 도로를 말한다. 秦 始皇帝 35년(전212)에 만들어졌는데 『史記索隱』에서는 그 거리가 8000여 리라고 했고, 『史記正義』에서는 1800리라고도 했다. 秦 始皇帝의 운구가 이 길을 통해 咸陽으로 운반되기도 했다(來村多加史, 2004 : 76 ~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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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9)
    『漢書』에는 “治”와 통하는 “繕”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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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0)
    臨洮 : 縣 명칭으로 지금의 甘肅省 岷縣이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12리 떨어진 곳에서 秦나라 장성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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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1)
    陽山 : 산 명칭으로 河北과 高厥의 동쪽에 있는 산이다. 지금의 內蒙古自治區에 있는 狼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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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62)
    北假 : 지명으로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河套(오르도스) 북쪽, 陽山 남쪽의 來山帶河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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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도공(悼公), 위강(魏絳), 조양자(趙襄子), 조양자, 지백(智伯), 혜왕(惠王), 혜왕, 소왕(昭王), 선태후(宣太后), 선태후, 무령왕(武靈王), 진개(秦開), 진개, 형가(荊軻), 진무양(秦舞陽), [진]개, 이목(李牧), 시황제(始皇帝), 몽염(蒙恬)
지명
진(晉)나라, 진(晉)나라, 구주[산](句注山), 대(代), 한(韓)나라, 위(魏)나라, 진나라, 조(趙)나라, 대(代), 구주[산], 위나라, 하서(河西), 상군(上郡), 진(秦)나라, 위(魏), 위나라, 서하[군](西河郡), 상군, 진나라, 진나라, 진(秦)나라, 농서[군], 북지[군], 상군, 조나라, 대(代), 음산(陰山)[산맥], 고궐(高闕), 운중[군](雲中郡), 안문[군](雁門郡), 대군(代郡), 연나라, 진나라, 연나라, 조양(造陽), 양평(襄平), 상곡[군](上谷郡),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遼西郡), 요동[군](遼東郡), 조나라, 조나라, 진(秦)나라, 하남(河南), 황하, 황하, 구원[군](九原郡), 운양[현](雲陽縣), 임조[현](臨洮縣), 요동[군](遼東郡), 황하, 양산(陽山), 북가(北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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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를 거쳐 진(秦)의 시황제 때 몽염이 흉노를 쳐서 하남 땅을 모두 차지함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