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성은 1906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나 경성제일고보와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다가 모두 퇴학당했다. 1927년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고 신간회 김천지회의 창립에도 참여하였다. 일본의 고등경찰자료에 의하면 1927년 5월 16일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 때 황태성이 김천의 금릉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였는데 이때 박상희는 선산의 구산구락부 대표로 참석했었다. 1929년에는 근우회 김천 지회장으로 활동하던 조귀분을 박상희에게 소개하여 결혼시키기도 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과 관련되어 2년간 복역하였고 1935년에도 검거되어 3년 6개월간 복역하였다. 해방 직전 황태성과 박상희는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서 활동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황태성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고 박상희는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를 창설하여 1945년 11월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회의에 경북 선산군 대표 3인 중 1인으로 참가했다. 1946년 10월 대구인민봉기가 나자 황태성은 월북하였으나 박상희는 구미경찰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경찰 총에 맞아 죽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는 박상희의 친구인 이재복의 추천을 받아 남로당에 가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48년 황해도 해주 남조선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황태성은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상업성 지방관리국장과 외무성 부상과 상업성 부상을 거쳐 무역성 부상 겸 무역상 서리를 역임하였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을 일으킨 세력은 그 해 8월에 북에 편지를 보내어 '나라의 평화통일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교섭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그래서 황해의 한 섬에서 각 측 장교 2명과 서기로 구성된 대표단 사이에,
1. 서울과 평양에 양측 상설군사대표부를 설치하고
2. 남과 북이 통상 관계를 맺으며
3. 시민들의 38선 자유통행을 보장하고
4. 우편교환을 회복한다
는 이야기가 논의 되었다.
이즈음 황태성이 내려왔는데 일이 틀어져 갇히는 몸이 되었다.
2년 뒤 1963년에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는데 야당의 윤보선 후보는 이 황태성과 관련한 의혹을 계속 제기하였다.
"간첩 황태성을 잡아서 두 해나 묻어두었다가 야당이 들고나오니 그제서야 사건 내용을 일부 공개했다. 황은 막대한 돈을 가지고 와서 김종필을 만났는데 김종필은 황을 자기 집에 감춰두었다가 조선 호텔로 옮겨 식사 대접을 했다. 이 돈을 가지고 공산당식으로 다섯 군데의 밀봉교육처를 두어 여기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조직한 것이 공화당이다."
윤보선의 주장을 모아보면 이렇다.
박정희는 일본군 중위로서 대통령에 선출하면 일본의 졸병이 된다.
간첩 황태성의 자금 20만불을 정치자금으로 써서 공화당을 조직하였다.
박정희가 물러나야 미국의 원조도 증가된다.
부산과 대구는 6.25당시 후퇴하지 않은 곳으로 빨갱이가 많고 인민군이 침입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박정희의 친형이 10.1폭동사건에 좌익분자로 총살당하였다.
박정희도 여수순천 반란사건에 관련이 있었다.
선거결과 박정희는 1.5%의 근소한 표차로 겨우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세 기간에 윤보선이 제기한 의혹은 박정희에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결국 황태성은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2월 14일에 처형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