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역 투입 3공수여단
일선 지휘관 “실탄 지급은 발포 지시”
보안대 문서에는 발포명령 하달 적혀
신군부는 위협사격 사실만 겨우 인정
김병두 보안사 육본 지원 준장 진술
“실권자는 전두환…보안사가 지휘해”
지난 13일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 집에서 만난 정귀순(78)씨는 5·18 이야기를 꺼내자 한숨부터 쉬었다. 정씨의 남편 김만두(1936년생)씨는 5월20일 밤 광주역 앞에서 공수부대 군인이 쏜 총을 맞고 병원으로 옮겨져 사흘 만에 숨졌다. 남편 김씨는 광주역 앞에서 군인들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했다. 정씨는 “남편이 총을 맞고 숨졌는데, 누가 총을 쏘라고 했는지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지휘관들은 ‘실탄 지급=발포 명령’으로 이해했다. 5·18 당시 일선 대대장들은 검찰 수사에서 “여단본부에서 실탄을 전달한다는 것은 위급한 상황 등에 필요한 경우에는 발포해도 된다는 의미”라고 진술했다. 윤수웅 당시 3공수여단 정보참모(소령)는 “5월20일 밤 9시30분 전남대 교내 도로가에 있던 (최세창) 여단장이 ‘이거 11대대에 갖다주고 와!’라고 말하며 2.5t 트럭 위에 실리고 있던 실탄 박스를 가리켰다”고 진술했다. 광주역 첫 집단발포로 김만두씨와 김재화(25)·김재수(25)·이북일(28)·박세근(36)씨 등 시민 5명이 총을 맞고 숨졌다.
광주역 첫 집단발포 이후 계엄사령부는 5월21일 새벽 사실상 자위권 발동을 결정했다. 군인들이 위험에 처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군인복무규율(123조)과 위수령상의 자위권에 근거해” 정당하게 발포했다는 것이다. 5·18 연구자 이재의 박사는 “위수령은 영구히 주둔하는 부대에 한한다는 점에서 (특정 지역에 출동해 작전하는) 공수부대에 적용될 수 없는 조항이고, 군인복무규율 역시 보초(초병)의 무기 사용에 관한 것이어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가 초병으로서의 권한 행사로 볼 수 없다”고 지적한다.
5·18 발포명령 책임자 규명은 지휘권 이원화 문제와도 연결된다. 정식 군 명령 체계 외에 당시 보안사-특전사-공수여단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사실상 발포명령 등 ‘작전’을 지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육군본부로 지원을 나갔던 김병두 준장은 검찰 수사에서 “발포명령은 누가 지시했는지 알 수 없으나, 광주사태 당시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로서 이희성 계엄사령관보다 서열이 높았고, 실제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계엄사 측에서는 보안사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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