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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사외국전

하나라 멸망 이후 전국시대때까지 중원국가와 융적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관계

  • 국가
    흉노(匈奴)
하(夏)나라의 국운이 쇠락하자 공유(公劉) 주 001
각주 001)
公劉 : 周의 시조로서 전설상의 인물인 后稷의 증손이라고 한다. 『史記』의 「周本紀」에 따르면, 稷官의 지위를 잃고 “戎狄”의 땅으로 옮긴 것은 公劉의 조부 不窋 때의 일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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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대대로 이어 내려온] 직관(稷官)주 002
각주 002)
稷官 : ‘稷’은 본래 精米를 뜻하고 ‘稷官’은 농업을 관할하던 관리의 우두머리로 ‘稷正’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周의 시조 后稷이 唐堯 시기에 이 직임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후손들이 그를 이어 관직을 세습하였다고 한다(『史記』 권1 「五帝本紀」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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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지위를 잃고 서융(西戎)주 003
각주 003)
西戎 : 中國 古代 西北에 거주했던 戎狄에 대한 총칭이다. 이들은 주로 지금의 甘肅省과 陝西省 일대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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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바뀌어주 004
각주 004)
公劉의 祖父가 稷官의 지위를 잃고 그 백성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주했다. 이것은 公劉가 그 뒤 戎狄들과 섞여 살게 되면서 그곳에서 농업 생산을 하여 西戎의 풍속과 습관을 바꾸었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公劉가 西戎의 풍속에 따르게 되었다고 보았다(『鹽鐵論』 「和親篇」 “故公劉處西戎, 戎狄化之.” :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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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豳) 주 005
각주 005)
豳 : 음이 빈인데 ‘邠’과 동일하다. 이곳은 지금의 陝西省 旬邑縣과 彬縣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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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마을을 만들어 살았다. 그 뒤 300여 년이 지나 융적(戎狄)이주 006
각주 006)
戎狄 : 서쪽에 사는 다른 종족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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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단보(大王亶父) 주 007
각주 007)
大王亶父 : 古公亶父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父’는 ‘甫’와 통한다고 보아 통상 ‘보’로 읽는다. 그는 周의 우두머리로서 周의 전설상 시조로 여겨지는 后稷의 12대손이고, 公劉의 9대손이다. 그가 岐로 도망오자 豳 땅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와 마을을 만들었다. 그는 文王의 조부로 周 武王 때에 太王으로 추존되었다. 그는 周의 무리를 이끌고 陝下로 옮겨 성곽과 집을 짓고 관리를 두어 戎狄의 풍습을 개혁하였다. 그리고 생산을 늘려 周의 번영을 이룩하였다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13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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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공격하였다. [대왕]단보기[산](岐山) 주 008
각주 008)
岐山 : 지금의 陝西省 岐山縣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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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슭으로 달아났는데, 땅의 사람들이 모두 [대왕]단보를 따라와서 [그곳에] 마을을 만들고 주(周)를 세웠다. 그 뒤 백여 년이 지나 서백창(西伯昌) 주 009
각주 009)
西伯昌 : 周의 文王 姬昌을 가리킨다. 古公亶父는 세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伯, 虞仲, 季歷이 그들이다. 季歷은 周祀를 이었고, 商王은 그가 西方의 霸王이 되는 것을 인정하여 西伯이라 불리게 되었다. 계력의 아들 昌이 그 뒤를 이어서 西伯昌이라 불리게 되었다(『史記』 권4 「周本紀」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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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견이씨(畎夷氏)주 485
각주 485)
畎夷氏 : 고대 종족 명칭의 하나이다. ‘畎戎’, ‘犬夷’ 또는 ‘昆夷’이라고도 하며, ‘犬戎’으로 통칭된다. 이들은 원래 周나라와 관계가 깊었는데, 周文王이 西戎의 覇者로서 왕조의 기초를 쌓았고, 穆王이 犬戎을 정벌하여 太原으로 쫓은 이래 周나라는 犬戎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다. 주나라 말기에 幽王이 즉위하여 정치가 문란해지자 전771년 犬戎은 申侯와 연합하여 주를 공격, 유왕을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周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후 犬戎은 涇水·渭水에 진출하여 周나라를 위협하다가 秦의 襄公·文公 시기에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부는 春秋時代에도 세력을 떨치다가 秦과 匈奴의 힘에 눌려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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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정벌[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 [의] 무왕(武王)이 [상(商)의] 주왕(紂王) 주 011
각주 011)
紂王 : 商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姓이 子이고, 이름은 辛이다. 帝乙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왕이 되었다.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총명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애첩 妲己와 황음무도한 짓을 일삼아 夏의 마지막 왕 桀과 함께 폭군의 전형이 되었다.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 주변의 나무를 비단으로 휘감은 뒤 고기를 매달아 놓고[肉林], 妲己와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손이 가는 대로 고기를 따서 먹었다고 한다. 또 학정을 그치도록 간언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炮烙之刑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7년에 걸쳐 거대한 호화궁전 鹿臺를 짓느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諸侯들의 맹주격인 姬發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 뒤 紂王은 鹿臺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한다(『史記』 권3 「殷本紀」 : 105 ~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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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치고 난 다음 낙읍(雒邑) 주 012
각주 012)
雒邑 : 洛邑이며, 지금의 河南省 洛陽市에 해당한다. 周 武王이 죽은 뒤 나이 어린 成王이 제위에 오른 이후 攝政이 된 周公이 河南省 洛陽 부근인 洛邑(또는 成周)에 성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당시 商의 대표자인 武庚과 祿夫, 그리고 周公의 동생 管叔·蔡叔 등이 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키자 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고 난 다음 동방에 대한 지배를 본격화하기 위한 것과 관련되었다. 이곳은 이후 西周가 몰락하고 東周시대가 되면서 천하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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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들었고, 다시 풍호(酆鄗) 주 013
각주 013)
酆鄗 : ‘酆京’ 또는 ‘京’이라고도 지칭되는데, 西周시대의 수도였다. 周 文王이 灃水 西岸에 酆邑(지금의 陝西省 長安縣 서북쪽 灃河 西岸 馬王村, 西王村 일대)을 건립하고 수도로 삼았다. 周 武王은 商나라를 멸한 후에 鄗(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서쪽)에 수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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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으로 [되돌아와] 살며 융이를 경수(涇水)낙수(洛水) 주 014
각주 014)
涇水·洛水 : 모두 陝西省 경내 渭河 西岸의 양대 지류이다. 逕河는 서쪽에, 洛河(지금의 北洛河)는 동쪽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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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북으로 내쫓으니 [융이가 이로부터] 철따라 조공을 바치게 되었고, [따라서 그들이 사는 지역을] 황복(荒服)주 015
각주 015)
荒服 : 중국 고래의 관념적 지역구분의 하나로, 邊疆의 외진 지역이면서도 능히 帝王에게 복종할 수 있는 땅을 뜻한다. 이것은 王畿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五服’을 둔 제도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周代에 每 500리를 1服이라고 하고, 그 순서는 侯服, 甸服, 绥服, 要服, 荒服이었다. 대체적으로 荒服은 王畿로부터 2500리(일설에는 4500리에서 5000리라고도 한다.) 밖의 지역으로 가장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질적인 종족이나 국가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周禮』 「夏官·職方氏」에서는 中國의 구역을 首都로부터 9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이를 ‘九服’이라 했다. 그중에서 蠻服은 天子의 京畿로부터 4500里 떨어져 있는 여섯 번째 구역, 즉 夷보다 앞에 있는 지역에 거주하여 다른 민족으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 역시 동심원으로 형성된 中國의 지리 체계 내에 포함되기는 하나 정치적·도덕적 권위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리적 범주를 의미하였다(주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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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그 뒤 이백여 년이 지나주 016
각주 016)
周 武王이 商을 무너뜨린 시점부터 周 穆王시대까지의 시차는 200년을 넘지 않기 때문에 “其後二百有餘年”이라고 한 것에서 ‘二’는 ‘一’의 착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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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의 국운이 쇠약해졌으나 목왕(穆王) 주 017
각주 017)
穆王 : 이름이 姬滿으로 西周 5代 군주이다. 昭王의 아들로 기원전 10세기경 사람으로 50세 때 즉위하여 55년간 재위하였다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34). 西方의 犬戎을 토벌하려다가 실패하여 諸侯의 離反을 초래하였다. 이때부터 周나라의 덕이 쇠퇴하였다고 한다. 한편, 金文銘으로 보아 昭王·穆王시대에 법제가 정비되고 姬姓의 나라가 증가하여 영토가 확장되고 주나라 국력이 확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史記』 권4 「周本紀」 : 135 ~ 136). 현존하는 『穆天子傳』은 穆王의 西遊 이야기인데, 후세의 僞書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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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견융(犬戎)을 쳐서 네 마리의 흰 이리[狼]와 네 마리의 흰 사슴[鹿]을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주 018
각주 018)
이 說話는 말 그대로 犬戎의 수렵지로 들어가 진귀한 짐승을 사냥하였다는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이리와 사슴을 토템으로 하는 部族들을 征伐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리와 사슴 등과 같은 神話素가 북아시아 신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데, 烏孫·高車·突厥·蒙古 신화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북아시아 신화를 통합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몽골의 건국신화에서도 잿빛 이리와 하얀 사슴이 결합해서 건국자 칭기스 칸의 조상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原山煌, 1995 : 46 ~ 47). 이런 점에서 볼 때 周代에 犬戎으로 표현된 다른 종족들과 후대 북방의 여러 유목민족들이 계통적인 연결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史記』 권4 「周本紀」 :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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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그 이후에 황복에서 [조공을 하러] 오지 않았다. 이에 주나라에서는 마침내 보형(甫刑)주 019
각주 019)
甫刑 : 甫侯가 穆王의 명을 받아 만든 刑法이다. 『漢書』에는 “呂刑”으로 되어 있다. 『尙書』의 「呂刑」 篇이 바로 이와 관련된 내용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38 ~ 139). 穆王은 外征 뒤 諸侯와 外蕃들 중에 周나라를 따르지 않는 이가 생기자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로 贖法을 제정한 甫刑(呂刑)을 발포하여 조정의 권위를 높이고 財政을 확보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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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는 법[辟]을 만들었다. 목왕 이후 이백여 년이 지나주 486
각주 486)
『漢書』에는 穆王 이후 懿王에 이르는 시기 왕실의 쇠퇴와 이민족의 침입으로 나라가 혼란하였다가 宣王시기 원정을 통해 이민족들을 복속시키고 나라를 중흥시키게 된 내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은 『史記』와 다르므로 이를 보충해 보면 아래와 같다.
“穆王의 孫子인 懿王의 시대에 王室이 마침내 쇠퇴하게 되어 戎狄이 침입하여 中國을 괴롭혔다. 中國이 그 고통을 당하게 되자 시인들이 비로소 그것을 아파하면서 노래를 했다. ‘처도 없고 가장도 없게 된 것은 獫允 때문이다.’, ‘어찌 하루도 경계하지 않겠는가! 獫允의 [침입이] 급격한데.’ 懿王의 曾孫인 宣王시대가 되어 군대를 일으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정벌하게 하니 詩人들이 그 공을 크게 찬미하여 노래하였다. ‘獫狁을 몰아내고 太原에 이르렀네.’ ‘떠나가는 전차가 아주 가득하고’, ‘북녘 땅에 성을 쌓았도다.’ 이때 四夷들이 모두 복속하게 되니 中興이라 칭하였다.”(“至穆王之孫懿王時, 王室遂衰, 戎狄交侵, 暴虐中國. 中國被其苦, 詩人始作, 疾而歌之, 曰 ‘靡室靡家, 獫允之故’ ‘豈不日戒, 獫允孔棘.’ 至懿王曾孫宣王, 興師命將以征伐之, 詩人美大其功, 曰 ‘薄伐獫狁, 至於太原’ ‘出車彭彭’, ‘城彼朔方.’ 是時四夷賓服, 稱爲中興.” : 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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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유왕(幽王) 주 021
각주 021)
幽王(재위 전781 ~ 전771) : 이름이 姬宮湦이다. 宣王의 아들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寵姬 襃姒를 웃기기 위하여 가끔 거짓 烽火를 올리게 하여 諸侯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때문에 犬戎이 침공하였을 때 봉화를 올렸으나 諸侯들이 응하지 않아 驪山 기슭에서 패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사후 아들 平王이 수도를 洛陽으로 옮겨 西周時代는 끝났다(『史記』 권4 「周本紀」 :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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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사(襃姒) 주 022
각주 022)
襃姒 : ‘襃’는 나라이름이고, ‘姒’는 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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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총희(寵姬)로 인해 신후(申侯) 주 023
각주 023)
申侯 : 西周 말기 申의 諸侯로서 幽王의 后 申氏의 아버지이다. 幽王이 襃姒를 총애하여 申后와 태자 宜臼를 폐하자, 申侯가 犬戎과 연합하여 幽王을 살해하고 宜臼를 平王으로 옹립하였다(『史記』 권4 「周本紀」 : 147 ~ 149). 申侯의 封邑은 申城으로 지금 河南 南陽市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漢書』에서는 “與申侯有隙”이라고 했는데, ‘卻’과 ‘隙’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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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틈이 생기게 되었다. 신후는 화가 나서 견융과 함께 쳐들어와 주나라 유왕여산(驪山) 주 024
각주 024)
驪山 : 지금의 陝西省 臨潼縣 동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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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슭에서 죽이니 [견융이] 마침내 주나라의 초확(焦穫)주 025
각주 025)
焦穫 : 지금의 陝西省 涇陽縣 서북쪽에 있다. 『漢書』에는 “鹵獲”으로 되어 있는데, 『漢書』에서는 ‘노획하다’는 의미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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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얻어 경수(涇水)위수(渭水) 주 026
각주 026)
渭水 : 甘肅省 渭源縣에서 발원하여 陝西省 중부를 지나가는 黃河의 支流이다. 지금의 西安과 咸陽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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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에 머물러 살면서 중국을 침범하고 약탈할 수 있었다.
[한편] 진(秦)나라 양공(襄公) 주 027
각주 027)
秦 襄公 : 秦나라의 開國始祖로 周 平王을 도와 동천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로 말미암아 諸侯로 책봉되었다(『史記』 권5 「秦本紀」 : 178 ~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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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를 구원하였으므로 이에 주나라 평왕(平王) 주 028
각주 028)
平王(재위 전770 ~ 전720) : 幽王의 아들로 이름은 姬宜臼이다. 어머니는 申侯의 딸인 申后이다. 처음에 태자에서 폐위되었다가 幽王의 사후 다시 복위하였다. 西方의 異民族이 강성해져 周나라 영토를 침공하자 鎬京을 버리고 동쪽의 洛邑으로 도읍을 옮긴(전770) 다음 洛邑에서 즉위하여 전 720년까지 재위하였다. 그가 東遷한 이후의 시대를 일반적으로 ‘春秋時代’라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49 ~ 150). (주63), 주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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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호를 떠나 동쪽 낙읍으로 옮겨 갔다. 이때에주 029
각주 029)
周 桓王 14년(전706)의 일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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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양공이 [견]융을 쳐서 기[산]까지 가게 되어 비로소 제후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주 488
각주 488)
秦 襄公이 周를 구한 공이 있어 平王이 東遷한 다음에 그의 故地인 酆鄗를 秦襄公에게 주었다. 이때가 襄公 7년(전77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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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65년이 지나주 031
각주 031)
東周가 건국된 뒤 65년이 지난 전 706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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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융주 032
각주 032)
『史記索隱』에 따르면 山戎을 후한 시기 東胡의 別種인 鮮卑라고 했다. 鮮卑는 秦나라 때 長成을 쌓으러 갔던 사람들로 長城 밖으로 도망쳐 鮮卑山에 의지해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주6) 참조)
山戎은 기원전 8세기 이후 燕나라가 遼寧지역으로 계속 진출하자 遼西에 거주하던 여러 종족들이 이에 맞서 燕나라와 山東半島 일대까지 침입하면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山戎은 주로 燕나라의 북쪽, 즉 지금의 遼西지역 내지는 內蒙古 등지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기초로 문헌에 등장하는 여러 종족의 문화적인 특징을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山戎의 주요 거주지인 遼西지역 청동기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田廣金, 2005 : 365 ~ 369). 특히, 遼西地域 靑銅器文化, 즉 夏家店上層文化와 大凌河 동쪽에 분포하는 遼寧式 銅劍文化를 어느 집단의 문화로 보느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遼西地域의 靑銅器文化 담당자를 古朝鮮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東胡냐 山戎이냐를 놓고 논쟁을 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이다(송호정, 2003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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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燕)나라 주 033
각주 033)
燕 : 武王의 동생인 召公 奭에게 봉해된 나라이다. 河北省으로부터 점차 동북쪽으로 발전하여 戰國時代에 七雄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의 河北省 북부와 遼寧省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후 전222년에 秦나라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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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넘어 제(齊)나라 주 034
각주 034)
齊 : 전1123년경 周나라 武王이 太公望에게 봉해 준 나라이다. 지금의 山東省 북부와 동부에 위치하였다. 齊나라의 영역은 산이나 바다의 물산이 풍부하고 도읍지인 臨淄(지금의 濟南 부근)는 커다란 상업도시로 번창하였다. 春秋 初期에 桓公이 管仲의 내정개혁 정책에 힘입어 국력을 키워서 覇主가 될 수 있었다. 靈公 때에는 萊를 멸망시켜 나라를 山東省 동부까지 확장하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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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공격하니 제나라 희공(釐公) 주 035
각주 035)
齊 釐公(재위 전730 ~ 전698) : 이름이 姜祿甫이다. 여기에서 ‘釐’는 통상 ‘禧’와 통한다고 보아서 ‘희’로 읽는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2 ~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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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융과] 제나라의 국경에서 싸웠다. 이후 44년이 지나주 036
각주 036)
『左傳』에 의하면, 魯 莊公 30년(전664)에 齊가 燕을 괴롭히던 山戎을 쳤다. 따라서 이해는 앞서 설명한 山戎이 齊나라를 공격한 시점(전706년)으로부터 43년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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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융이 연나라를 쳤다. 연나라는 위급함을 제나라에 알렸고, 제나라 환공(桓公) 주 037
각주 037)
齊 桓公(재위 전685 ~ 전643) : 이름은 姜小白으로, 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란으로 형 襄公이 살해된 후, 이복동생 糾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鮑叔牙의 진언으로 糾의 옛 신하인 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그 후 管仲의 협력으로 諸侯와 종종 會盟하여 신뢰를 얻었다. 특히 葵丘에서의 회맹으로 覇者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또 山戎을 쳐서 燕나라를 구하고, 魯의 내란 평정에 힘을 기울였다. 다른 종족의 침임으로 멸망한 邢을 夷儀로, 衛를 楚丘로 옮겨 부흥시켰다. 內政에서는 군사적 강화와 상업·수공업의 육성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만년에 管仲의 유언을 무시하고 전에 추방한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으나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었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6 ~ 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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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북쪽으로 산융을 공격하니 산융이 도망갔다.
이후 20여 년이 지나 융적(戎狄)주 038
각주 038)
『漢書』에는 “戎翟”으로 되어 있다. ‘狄’과 ‘翟’은 서로 통용하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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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읍까지 와서 주나라 양왕 주 039
각주 039)
周 襄王(재위 전651 ~ 전619) : 이름이 姬鄭이었다(『史記』 권4 「周本紀」 : 152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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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치니주 489
각주 489)
周 襄王 16년(전636)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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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왕정(鄭)나라 주 041
각주 041)
鄭 : 전806년 周나라 宣王의 아우 桓公이 세운 周나라의 封國이다. 처음 鄭(지금의 陝西省 華縣 동쪽)에 있다가 이후에 河南省 新鄭縣으로 옮겨 발전했다. 전375년 韓나라 哀侯에게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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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읍(氾邑) 주 042
각주 042)
氾邑 :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省 襄城縣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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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달아났다. 일찍이 주나라 양왕정나라를 치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융]적 [추장의] 딸을 왕후로 맞아들여주 043
각주 043)
周 襄王 15년(전637)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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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적의 군사와 함께 정나라를 쳤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양왕이 적후(狄后)를 멀리하게 되자 적후가 왕을 원망하게 되었다.주 044
각주 044)
周 襄王 16년(전636)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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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양왕의 계모 혜후(惠后)에게는 자대(子帶)라는 아들이 있어 그를 [천자로]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혜후가 적후, 자대와 함께 [몰래 융적과] 내통해 융적에게 [성문을] 열어주니 융적은 [도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결국 양왕을 격파해 내쫓은 다음에 자대를 천자로 삼았다. 이로 인해 융적이 더러 육혼(陸渾) 주 045
각주 045)
陸渾 :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省 嵩縣 서남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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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살게 되면서 동쪽으로는 위(衛)나라 주 046
각주 046)
衛 : 周나라에서 商나라의 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周公의 아우 康叔을 商나라의 옛 도읍 朝歌에 봉해 준 나라이다. 西周 말년, 제8대 頃侯 때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周나라의 幽王이 살해되었을 때에 제11대 武公이 周나라 왕실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春秋時代에 이르러서는 齊, 晉, 宋, 魯 등으로부터 압박을 받아 점차 쇠퇴하였다. 전600년에는 狄의 침략을 받아 한때 국토를 잃기도 하였다. 교통의 요지를 점유하고 있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戰國時代에는 秦과 魏 사이에 끼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전209년 제46대 君角 때 秦나라의 2世 皇帝에게 병합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북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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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까지 이르러 중국을 침입해 약탈하며 포학을 일삼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그것을]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에 시인들은 [그들에 대해] “융적을 이에 응징하였네.”,주 047
각주 047)
魯 僖公(재위 전659 ~ 627)이 ‘周公之宇’를 修復한 것을 칭송한 『詩經』 「魯頌 閟宮」에서는 “公車千乘, 朱英綠縢, 二矛重弓. 公徒三萬, 貝冑朱綅. 烝徒增增, 戎狄是應, 荊舒是懲, 則莫我敢承. 俾爾昌而熾, 俾爾壽而富, 黃髮台背, 壽胥與試. 俾爾昌而大, 俾爾耆而艾, 萬有千歲, 眉壽無有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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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윤을 쳐부수어 대원(大原)주 048
각주 048)
『漢書』에는 “太原”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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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이르렀네.”,주 049
각주 049)
『詩經』 「小雅 六月」에서 “戎車旣安, 如輊如軒. 四牡旣佶, 旣佶且閑. 薄伐玁狁, 至于大原. 文武吉甫, 萬邦爲憲.”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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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수레[戰車]가 [길에] 가득하고, 저 북녘땅[朔方]주 490
각주 490)
朔方 : 북녘 땅을 의미한다. 이곳은 지금의 寧夏回族自治區 靈武縣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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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성을 쌓았도다.”주 051
각주 051)
『詩經』 「小雅 出車」에서 “王命南仲, 往城于方. 出車彭彭, 旂旐中央. 天子命我, 城彼朔方. 赫赫南仲, 玁狁于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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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노래를 불렀다.주 052
각주 052)
주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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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양왕은 도성 밖에서 4년이나 살다가,주 053
각주 053)
周 襄王이 都城 밖에서 산 것은 사실 단지 1년뿐이다. 즉위 16년(전636)에 나와 鄭에 머물다 17년(전635) 삼월 都城으로 돌아와 복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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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을 진(晉)나라 주 054
각주 054)
晉 : 周나라의 封國으로 春秋時代에 文公이 楚나라를 격파하고 周나라를 도와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전453년에 韓, 魏, 趙의 세 나라로 분리되었다. 지금의 山西省 지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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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보내 위급함을 알렸다. [당시] 진(晉)나라 문공(文公) 주 055
각주 055)
晉 文公(재위 전636 ~ 전628) : 이름은 姬重耳인데, 春秋五覇의 두 번째 인물로 이름이 높다(『史記』 권5 「秦本紀」 :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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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패업(覇業)을 이루고자 했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융적(戎翟)을 쳐서 내쫓은 다음 자대를 죽이고 양왕을 맞아들여주 056
각주 056)
‘内’는 ‘纳’과 통하는데, 晉 文公이 襄王을 맞아들인 것은 文公 2년(전635) 삼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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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읍에 살게 하였다.

  • 각주 001)
    公劉 : 周의 시조로서 전설상의 인물인 后稷의 증손이라고 한다. 『史記』의 「周本紀」에 따르면, 稷官의 지위를 잃고 “戎狄”의 땅으로 옮긴 것은 公劉의 조부 不窋 때의 일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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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稷官 : ‘稷’은 본래 精米를 뜻하고 ‘稷官’은 농업을 관할하던 관리의 우두머리로 ‘稷正’이라고도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周의 시조 后稷이 唐堯 시기에 이 직임을 맡아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리고 후손들이 그를 이어 관직을 세습하였다고 한다(『史記』 권1 「五帝本紀」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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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西戎 : 中國 古代 西北에 거주했던 戎狄에 대한 총칭이다. 이들은 주로 지금의 甘肅省과 陝西省 일대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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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公劉의 祖父가 稷官의 지위를 잃고 그 백성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주했다. 이것은 公劉가 그 뒤 戎狄들과 섞여 살게 되면서 그곳에서 농업 생산을 하여 西戎의 풍속과 습관을 바꾸었다고 해석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公劉가 西戎의 풍속에 따르게 되었다고 보았다(『鹽鐵論』 「和親篇」 “故公劉處西戎, 戎狄化之.” :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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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豳 : 음이 빈인데 ‘邠’과 동일하다. 이곳은 지금의 陝西省 旬邑縣과 彬縣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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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戎狄 : 서쪽에 사는 다른 종족들을 총칭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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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大王亶父 : 古公亶父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父’는 ‘甫’와 통한다고 보아 통상 ‘보’로 읽는다. 그는 周의 우두머리로서 周의 전설상 시조로 여겨지는 后稷의 12대손이고, 公劉의 9대손이다. 그가 岐로 도망오자 豳 땅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와 마을을 만들었다. 그는 文王의 조부로 周 武王 때에 太王으로 추존되었다. 그는 周의 무리를 이끌고 陝下로 옮겨 성곽과 집을 짓고 관리를 두어 戎狄의 풍습을 개혁하였다. 그리고 생산을 늘려 周의 번영을 이룩하였다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13 ~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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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岐山 : 지금의 陝西省 岐山縣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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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西伯昌 : 周의 文王 姬昌을 가리킨다. 古公亶父는 세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伯, 虞仲, 季歷이 그들이다. 季歷은 周祀를 이었고, 商王은 그가 西方의 霸王이 되는 것을 인정하여 西伯이라 불리게 되었다. 계력의 아들 昌이 그 뒤를 이어서 西伯昌이라 불리게 되었다(『史記』 권4 「周本紀」 :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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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5)
    畎夷氏 : 고대 종족 명칭의 하나이다. ‘畎戎’, ‘犬夷’ 또는 ‘昆夷’이라고도 하며, ‘犬戎’으로 통칭된다. 이들은 원래 周나라와 관계가 깊었는데, 周文王이 西戎의 覇者로서 왕조의 기초를 쌓았고, 穆王이 犬戎을 정벌하여 太原으로 쫓은 이래 周나라는 犬戎의 잦은 침략에 시달렸다. 주나라 말기에 幽王이 즉위하여 정치가 문란해지자 전771년 犬戎은 申侯와 연합하여 주를 공격, 유왕을 살해하였다. 이로 인해 周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기게 하였다. 그 후 犬戎은 涇水·渭水에 진출하여 周나라를 위협하다가 秦의 襄公·文公 시기에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부는 春秋時代에도 세력을 떨치다가 秦과 匈奴의 힘에 눌려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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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紂王 : 商나라의 마지막 왕으로 姓이 子이고, 이름은 辛이다. 帝乙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왕이 되었다.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총명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애첩 妲己와 황음무도한 짓을 일삼아 夏의 마지막 왕 桀과 함께 폭군의 전형이 되었다.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 주변의 나무를 비단으로 휘감은 뒤 고기를 매달아 놓고[肉林], 妲己와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손이 가는 대로 고기를 따서 먹었다고 한다. 또 학정을 그치도록 간언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炮烙之刑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7년에 걸쳐 거대한 호화궁전 鹿臺를 짓느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諸侯들의 맹주격인 姬發의 공격을 받아 패배한 뒤 紂王은 鹿臺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한다(『史記』 권3 「殷本紀」 : 105 ~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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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雒邑 : 洛邑이며, 지금의 河南省 洛陽市에 해당한다. 周 武王이 죽은 뒤 나이 어린 成王이 제위에 오른 이후 攝政이 된 周公이 河南省 洛陽 부근인 洛邑(또는 成周)에 성을 건설하였다. 이것은 당시 商의 대표자인 武庚과 祿夫, 그리고 周公의 동생 管叔·蔡叔 등이 東夷와 결탁하여 대반란을 일으키자 召公과 협력하여 이 난을 진압하고 난 다음 동방에 대한 지배를 본격화하기 위한 것과 관련되었다. 이곳은 이후 西周가 몰락하고 東周시대가 되면서 천하의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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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酆鄗 : ‘酆京’ 또는 ‘京’이라고도 지칭되는데, 西周시대의 수도였다. 周 文王이 灃水 西岸에 酆邑(지금의 陝西省 長安縣 서북쪽 灃河 西岸 馬王村, 西王村 일대)을 건립하고 수도로 삼았다. 周 武王은 商나라를 멸한 후에 鄗(지금의 陝西省 西安市 서쪽)에 수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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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涇水·洛水 : 모두 陝西省 경내 渭河 西岸의 양대 지류이다. 逕河는 서쪽에, 洛河(지금의 北洛河)는 동쪽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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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荒服 : 중국 고래의 관념적 지역구분의 하나로, 邊疆의 외진 지역이면서도 능히 帝王에게 복종할 수 있는 땅을 뜻한다. 이것은 王畿로부터의 거리에 따라 ‘五服’을 둔 제도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周代에 每 500리를 1服이라고 하고, 그 순서는 侯服, 甸服, 绥服, 要服, 荒服이었다. 대체적으로 荒服은 王畿로부터 2500리(일설에는 4500리에서 5000리라고도 한다.) 밖의 지역으로 가장 외곽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질적인 종족이나 국가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周禮』 「夏官·職方氏」에서는 中國의 구역을 首都로부터 9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이를 ‘九服’이라 했다. 그중에서 蠻服은 天子의 京畿로부터 4500里 떨어져 있는 여섯 번째 구역, 즉 夷보다 앞에 있는 지역에 거주하여 다른 민족으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 역시 동심원으로 형성된 中國의 지리 체계 내에 포함되기는 하나 정치적·도덕적 권위의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지리적 범주를 의미하였다(주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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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6)
    周 武王이 商을 무너뜨린 시점부터 周 穆王시대까지의 시차는 200년을 넘지 않기 때문에 “其後二百有餘年”이라고 한 것에서 ‘二’는 ‘一’의 착오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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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7)
    穆王 : 이름이 姬滿으로 西周 5代 군주이다. 昭王의 아들로 기원전 10세기경 사람으로 50세 때 즉위하여 55년간 재위하였다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34). 西方의 犬戎을 토벌하려다가 실패하여 諸侯의 離反을 초래하였다. 이때부터 周나라의 덕이 쇠퇴하였다고 한다. 한편, 金文銘으로 보아 昭王·穆王시대에 법제가 정비되고 姬姓의 나라가 증가하여 영토가 확장되고 주나라 국력이 확충되었다는 견해도 있다(『史記』 권4 「周本紀」 : 135 ~ 136). 현존하는 『穆天子傳』은 穆王의 西遊 이야기인데, 후세의 僞書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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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8)
    이 說話는 말 그대로 犬戎의 수렵지로 들어가 진귀한 짐승을 사냥하였다는 이야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달리 이리와 사슴을 토템으로 하는 部族들을 征伐하였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리와 사슴 등과 같은 神話素가 북아시아 신화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데, 烏孫·高車·突厥·蒙古 신화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북아시아 신화를 통합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몽골의 건국신화에서도 잿빛 이리와 하얀 사슴이 결합해서 건국자 칭기스 칸의 조상이 형성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原山煌, 1995 : 46 ~ 47). 이런 점에서 볼 때 周代에 犬戎으로 표현된 다른 종족들과 후대 북방의 여러 유목민족들이 계통적인 연결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史記』 권4 「周本紀」 :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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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9)
    甫刑 : 甫侯가 穆王의 명을 받아 만든 刑法이다. 『漢書』에는 “呂刑”으로 되어 있다. 『尙書』의 「呂刑」 篇이 바로 이와 관련된 내용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38 ~ 139). 穆王은 外征 뒤 諸侯와 外蕃들 중에 周나라를 따르지 않는 이가 생기자 법률을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새로 贖法을 제정한 甫刑(呂刑)을 발포하여 조정의 권위를 높이고 財政을 확보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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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6)
    『漢書』에는 穆王 이후 懿王에 이르는 시기 왕실의 쇠퇴와 이민족의 침입으로 나라가 혼란하였다가 宣王시기 원정을 통해 이민족들을 복속시키고 나라를 중흥시키게 된 내력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내용은 『史記』와 다르므로 이를 보충해 보면 아래와 같다.
    “穆王의 孫子인 懿王의 시대에 王室이 마침내 쇠퇴하게 되어 戎狄이 침입하여 中國을 괴롭혔다. 中國이 그 고통을 당하게 되자 시인들이 비로소 그것을 아파하면서 노래를 했다. ‘처도 없고 가장도 없게 된 것은 獫允 때문이다.’, ‘어찌 하루도 경계하지 않겠는가! 獫允의 [침입이] 급격한데.’ 懿王의 曾孫인 宣王시대가 되어 군대를 일으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정벌하게 하니 詩人들이 그 공을 크게 찬미하여 노래하였다. ‘獫狁을 몰아내고 太原에 이르렀네.’ ‘떠나가는 전차가 아주 가득하고’, ‘북녘 땅에 성을 쌓았도다.’ 이때 四夷들이 모두 복속하게 되니 中興이라 칭하였다.”(“至穆王之孫懿王時, 王室遂衰, 戎狄交侵, 暴虐中國. 中國被其苦, 詩人始作, 疾而歌之, 曰 ‘靡室靡家, 獫允之故’ ‘豈不日戒, 獫允孔棘.’ 至懿王曾孫宣王, 興師命將以征伐之, 詩人美大其功, 曰 ‘薄伐獫狁, 至於太原’ ‘出車彭彭’, ‘城彼朔方.’ 是時四夷賓服, 稱爲中興.” : 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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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1)
    幽王(재위 전781 ~ 전771) : 이름이 姬宮湦이다. 宣王의 아들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寵姬 襃姒를 웃기기 위하여 가끔 거짓 烽火를 올리게 하여 諸侯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때문에 犬戎이 침공하였을 때 봉화를 올렸으나 諸侯들이 응하지 않아 驪山 기슭에서 패해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사후 아들 平王이 수도를 洛陽으로 옮겨 西周時代는 끝났다(『史記』 권4 「周本紀」 :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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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2)
    襃姒 : ‘襃’는 나라이름이고, ‘姒’는 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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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3)
    申侯 : 西周 말기 申의 諸侯로서 幽王의 后 申氏의 아버지이다. 幽王이 襃姒를 총애하여 申后와 태자 宜臼를 폐하자, 申侯가 犬戎과 연합하여 幽王을 살해하고 宜臼를 平王으로 옹립하였다(『史記』 권4 「周本紀」 : 147 ~ 149). 申侯의 封邑은 申城으로 지금 河南 南陽市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漢書』에서는 “與申侯有隙”이라고 했는데, ‘卻’과 ‘隙’은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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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4)
    驪山 : 지금의 陝西省 臨潼縣 동남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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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5)
    焦穫 : 지금의 陝西省 涇陽縣 서북쪽에 있다. 『漢書』에는 “鹵獲”으로 되어 있는데, 『漢書』에서는 ‘노획하다’는 의미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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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6)
    渭水 : 甘肅省 渭源縣에서 발원하여 陝西省 중부를 지나가는 黃河의 支流이다. 지금의 西安과 咸陽을 가로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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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7)
    秦 襄公 : 秦나라의 開國始祖로 周 平王을 도와 동천하는 데 공을 세웠고, 이로 말미암아 諸侯로 책봉되었다(『史記』 권5 「秦本紀」 : 178 ~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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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8)
    平王(재위 전770 ~ 전720) : 幽王의 아들로 이름은 姬宜臼이다. 어머니는 申侯의 딸인 申后이다. 처음에 태자에서 폐위되었다가 幽王의 사후 다시 복위하였다. 西方의 異民族이 강성해져 周나라 영토를 침공하자 鎬京을 버리고 동쪽의 洛邑으로 도읍을 옮긴(전770) 다음 洛邑에서 즉위하여 전 720년까지 재위하였다. 그가 東遷한 이후의 시대를 일반적으로 ‘春秋時代’라고 한다(『史記』 권4 「周本紀」 : 149 ~ 150). (주63), 주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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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29)
    周 桓王 14년(전706)의 일이다(『史記』 권4 「周本紀」 :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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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8)
    秦 襄公이 周를 구한 공이 있어 平王이 東遷한 다음에 그의 故地인 酆鄗를 秦襄公에게 주었다. 이때가 襄公 7년(전77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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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1)
    東周가 건국된 뒤 65년이 지난 전 706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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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2)
    『史記索隱』에 따르면 山戎을 후한 시기 東胡의 別種인 鮮卑라고 했다. 鮮卑는 秦나라 때 長成을 쌓으러 갔던 사람들로 長城 밖으로 도망쳐 鮮卑山에 의지해 살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주6) 참조)
    山戎은 기원전 8세기 이후 燕나라가 遼寧지역으로 계속 진출하자 遼西에 거주하던 여러 종족들이 이에 맞서 燕나라와 山東半島 일대까지 침입하면서 확인되기 시작했다. 山戎은 주로 燕나라의 북쪽, 즉 지금의 遼西지역 내지는 內蒙古 등지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고학적인 발굴 성과를 기초로 문헌에 등장하는 여러 종족의 문화적인 특징을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山戎의 주요 거주지인 遼西지역 청동기문화의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田廣金, 2005 : 365 ~ 369). 특히, 遼西地域 靑銅器文化, 즉 夏家店上層文化와 大凌河 동쪽에 분포하는 遼寧式 銅劍文化를 어느 집단의 문화로 보느냐 하는 점이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遼西地域의 靑銅器文化 담당자를 古朝鮮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東胡냐 山戎이냐를 놓고 논쟁을 하는 것이 현재 일반적이다(송호정, 2003 :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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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3)
    燕 : 武王의 동생인 召公 奭에게 봉해된 나라이다. 河北省으로부터 점차 동북쪽으로 발전하여 戰國時代에 七雄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의 河北省 북부와 遼寧省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후 전222년에 秦나라에 병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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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4)
    齊 : 전1123년경 周나라 武王이 太公望에게 봉해 준 나라이다. 지금의 山東省 북부와 동부에 위치하였다. 齊나라의 영역은 산이나 바다의 물산이 풍부하고 도읍지인 臨淄(지금의 濟南 부근)는 커다란 상업도시로 번창하였다. 春秋 初期에 桓公이 管仲의 내정개혁 정책에 힘입어 국력을 키워서 覇主가 될 수 있었다. 靈公 때에는 萊를 멸망시켜 나라를 山東省 동부까지 확장하는 등 크게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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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5)
    齊 釐公(재위 전730 ~ 전698) : 이름이 姜祿甫이다. 여기에서 ‘釐’는 통상 ‘禧’와 통한다고 보아서 ‘희’로 읽는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2 ~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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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6)
    『左傳』에 의하면, 魯 莊公 30년(전664)에 齊가 燕을 괴롭히던 山戎을 쳤다. 따라서 이해는 앞서 설명한 山戎이 齊나라를 공격한 시점(전706년)으로부터 43년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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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7)
    齊 桓公(재위 전685 ~ 전643) : 이름은 姜小白으로, 春秋五覇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는 내란으로 형 襄公이 살해된 후, 이복동생 糾를 몰아내고 즉위하였다. 鮑叔牙의 진언으로 糾의 옛 신하인 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하였다. 그 후 管仲의 협력으로 諸侯와 종종 會盟하여 신뢰를 얻었다. 특히 葵丘에서의 회맹으로 覇者로서의 지위가 확립되었다. 또 山戎을 쳐서 燕나라를 구하고, 魯의 내란 평정에 힘을 기울였다. 다른 종족의 침임으로 멸망한 邢을 夷儀로, 衛를 楚丘로 옮겨 부흥시켰다. 內政에서는 군사적 강화와 상업·수공업의 육성으로 나라를 튼튼히 하였다. 만년에 管仲의 유언을 무시하고 전에 추방한 신하를 다시 등용하였으나 그들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가 죽은 후 내란이 일어나 국력이 약화되었다(『史記』 권32 「齊太公世家」 : 1486 ~ 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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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8)
    『漢書』에는 “戎翟”으로 되어 있다. ‘狄’과 ‘翟’은 서로 통용하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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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39)
    周 襄王(재위 전651 ~ 전619) : 이름이 姬鄭이었다(『史記』 권4 「周本紀」 : 152 ~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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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89)
    周 襄王 16년(전636)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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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1)
    鄭 : 전806년 周나라 宣王의 아우 桓公이 세운 周나라의 封國이다. 처음 鄭(지금의 陝西省 華縣 동쪽)에 있다가 이후에 河南省 新鄭縣으로 옮겨 발전했다. 전375년 韓나라 哀侯에게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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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2)
    氾邑 :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省 襄城縣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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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3)
    周 襄王 15년(전637)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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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4)
    周 襄王 16년(전636)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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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5)
    陸渾 : 지명으로 지금의 河南省 嵩縣 서남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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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6)
    衛 : 周나라에서 商나라의 유민을 다스리기 위해 周公의 아우 康叔을 商나라의 옛 도읍 朝歌에 봉해 준 나라이다. 西周 말년, 제8대 頃侯 때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周나라의 幽王이 살해되었을 때에 제11대 武公이 周나라 왕실을 도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春秋時代에 이르러서는 齊, 晉, 宋, 魯 등으로부터 압박을 받아 점차 쇠퇴하였다. 전600년에는 狄의 침략을 받아 한때 국토를 잃기도 하였다. 교통의 요지를 점유하고 있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戰國時代에는 秦과 魏 사이에 끼여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전209년 제46대 君角 때 秦나라의 2世 皇帝에게 병합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북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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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7)
    魯 僖公(재위 전659 ~ 627)이 ‘周公之宇’를 修復한 것을 칭송한 『詩經』 「魯頌 閟宮」에서는 “公車千乘, 朱英綠縢, 二矛重弓. 公徒三萬, 貝冑朱綅. 烝徒增增, 戎狄是應, 荊舒是懲, 則莫我敢承. 俾爾昌而熾, 俾爾壽而富, 黃髮台背, 壽胥與試. 俾爾昌而大, 俾爾耆而艾, 萬有千歲, 眉壽無有害.”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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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8)
    『漢書』에는 “太原”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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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49)
    『詩經』 「小雅 六月」에서 “戎車旣安, 如輊如軒. 四牡旣佶, 旣佶且閑. 薄伐玁狁, 至于大原. 文武吉甫, 萬邦爲憲.”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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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490)
    朔方 : 북녘 땅을 의미한다. 이곳은 지금의 寧夏回族自治區 靈武縣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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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1)
    『詩經』 「小雅 出車」에서 “王命南仲, 往城于方. 出車彭彭, 旂旐中央. 天子命我, 城彼朔方. 赫赫南仲, 玁狁于襄.”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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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2)
    주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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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3)
    周 襄王이 都城 밖에서 산 것은 사실 단지 1년뿐이다. 즉위 16년(전636)에 나와 鄭에 머물다 17년(전635) 삼월 都城으로 돌아와 복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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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4)
    晉 : 周나라의 封國으로 春秋時代에 文公이 楚나라를 격파하고 周나라를 도와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전453년에 韓, 魏, 趙의 세 나라로 분리되었다. 지금의 山西省 지역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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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5)
    晉 文公(재위 전636 ~ 전628) : 이름은 姬重耳인데, 春秋五覇의 두 번째 인물로 이름이 높다(『史記』 권5 「秦本紀」 :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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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56)
    ‘内’는 ‘纳’과 통하는데, 晉 文公이 襄王을 맞아들인 것은 文公 2년(전635) 삼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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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공유(公劉), 대왕단보(大王亶父), [대왕]단보, [대왕]단보, 서백창(西伯昌), 무왕(武王), 주왕(紂王), 목왕(穆王), 목왕, 유왕(幽王), 포사(襃姒), 신후(申侯), 신후, 유왕, 양공(襄公), 평왕(平王), 양공, 희공(釐公), 환공(桓公), 양왕, 양왕, 양왕, 양왕, 양왕, 혜후(惠后), 자대(子帶), 혜후, 자대, 양왕, 자대, 양왕, 문공(文公), 자대, 양왕
지명
하(夏)나라, 빈(豳), 기[산](岐山), , 주(周), , , 상(商), 낙읍(雒邑), 풍호(酆鄗), 경수(涇水), 낙수(洛水), 주나라, 주나라, 주나라, 주나라, 여산(驪山), 주나라, 경수(涇水), 위수(渭水), 진(秦)나라, 주나라, 주나라, 풍호, 낙읍, 진나라, 기[산], 연(燕)나라, 제(齊)나라, 제나라, 제나라, 연나라, 연나라, 제나라, 제나라, 낙읍, 주나라, 정(鄭)나라, 범읍(氾邑), 주나라, 정나라, 정나라, 육혼(陸渾), 위(衛)나라, 주나라, 진(晉)나라, 진(晉)나라, 낙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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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라 멸망 이후 전국시대때까지 중원국가와 융적의 시대적 변화에 따른 관계 자료번호 : jo.k_0001_01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