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新羅民族論 > 0012 高句麗 > 0414 고려와 한국의 상호 인식

韓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에 高句麗와 별개의 나라로 처음 나타난다. 고려는 광개토왕릉비에서 韓과 穢를 다른 종족으로 보았으며 중원비에서는 신라를 東夷라 했다. 신라 또한 고려를 다른 종족으로 보았으며 해동안홍기와 당시장군비 그리고 낭혜화상탑비에서 穢貊이라 했다. 중국은 고려왕에게 遼東郡公이라는 작위를 내렸고 고려왕도 스스로를 遼東에 있는 신하라 했다. 당나라는 고려를 침공하기 전에 遼東은 본래 중국 땅이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0003 三國史記(1145) 고구려
王聞之震怒 罷陜父職 俾司官園 陜父憤 去之南韓 왕이 이를 듣고 매우 화가 나 협보의 관직을 파하고 관원을 맡아보게 하였다. 협보가 분하여 남한으로 가버렸다.
16893
 
0091 史記
匈奴 其先祖夏后氏之苗裔也 曰淳維 唐虞以上有山戎 獫狁 葷粥 居于北蠻 隨畜牧而轉移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씨의 후예로 순유라고 불린다. 당과 우 이전에는 산융, 험윤, 훈육 등이 북쪽 이민족의 땅에 살면서 가축을 먹이고 옮겨 다니며 살았다.
16970
 
0289 三國志
동옥저는 나라가 작고 큰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句麗에 신속케 되었다. 구려는 그 중에서 대인을 두고 사자로 삼아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또 대가로 하여금 조세를 통괄 수납케하여 맥(貊)·포목·생선·소금·해초류 등을 천리나 되는 거리에서 져나르게 하고 또 동옥저의 미인을 보내게 하여 종이나 첩으로 삼았으니 그들을 노복처럼 대우하였다.
850 COMMENT
 
0289 三國志
0289 三國志
高句麗在遼東之東┆韓在帶方之南▐ 高句麗와 韓이 별도로 기술되어 있다.
14475
 
0355 三國史記(1145) 고구려
(고국원)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 조감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征東大將軍 營州刺史를 삼고 樂浪公을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10920
 
0396 梁書(636)
垂死 子寶立 以句驪王安為平州牧 封遼東帶方二國王 모용수가 죽자 모용보가 자리에 올라 구려왕 안(광개토왕)을 평주목으로 삼고 요동대방이국왕에 책봉하였다.
14908
 
0414 廣開土王陵碑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 신라는 옛부터 고려 속민으로 조공을 해왔다. ▐ 여기에 나오는 百殘은 백제다. 殘은 잔인하다는 뜻이다.
19830
 
0414 廣開土王陵碑
若吾萬年之後 安守墓者 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 令備洒掃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해 온 한인과 예인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 여기서 말하는 韓은 396년에 백제를 침공하였을 때, 백제왕이 바친 남녀 생구 1천 명을 말한다.
17831 COMMENT
 
0435 北魏
북위가 장수왕에게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작위를 내렸다. 전연은 355년에 고국원왕에게 樂浪公의 작위를 내렸었다. 북사(659)에는 遼東郡公 高句麗王으로 나온다.
2605#595 COMMENT
 
0445 後漢書
句驪一名貊耳 有別種 依小水為居 因名曰小水貊 구려는 일명 맥이라 부른다. 별종이 있는데, 소수에 의지하여 사는 까닭에 이를 소수맥이라 부른다.
6049 COMMENT
 
0449 中原高麗碑
오월에 高麗 대왕 ... 東夷 寐錦이 늦게 돌아와 매금 토내의 제중인에게 절교사를 내렸다. ... 동이 매금의 상하가 우벌성에 와서 교를 내렸다.
36734 COMMENT
 
0492 北魏
장수왕이 죽고 문자왕이 뒤를 잇자 북위는 다시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작위를 내렸다. 북사(659)에는 遼東郡公 高句麗王으로 나온다.
2605#596 COMMENT
 
0495 南齊書(537)
去庚午年 獫狁弗悛 舉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지난 490년에는 험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케 하여 밤에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들끓듯 붕괴되었습니다. ▐ 백제 동성왕의 표문인데, 여기서의 獫狁과 匈梨는 고려다.
19828
 
0513 日本書紀(720)
백제가 저미문귀 장군과 주리즉이 장군을 수적신압산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 단양이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伴跛國이 저희 나라 기문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 여기에 나오는 伴跛는 가라다. 梁職貢圖(526~539)에는 叛波라 표기되어 있다.
19832
 
0519 北魏
문자왕이 죽자 북위는 안장왕에게 다시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작위를 내렸다. 북사(659)에는 遼東郡公 高麗王으로 나온다.
2605#599 COMMENT
 
0532 北魏
안장왕이 죽고 안원왕이 즉위하자 북위는 다시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작위를 내렸다. 북사(659)에는 遼東郡公 高麗王으로 나온다.
2605#615 COMMENT
 
0550 北齊
북제는 양원왕에게 遼東郡開國公 高麗王의 작위를 내렸다.
2605#709 COMMENT
 
0553 日本書紀(720)
백제가 상부 나솔 과야신라와 하부 고덕 문휴대산 등을 보내 표를 올려 말하였다. “올해 문득 듣자니 신라와 狛國이 통모하여 ‘백제와 임나가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있다. 생각컨대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 여기에 나오는 狛國은 고려다. 狛은 이리라는 뜻이다.
19831
 
0556 日本書紀(720)
소아대신도목숙녜 등을 왜국의 고시군에 보내어 韓人대신협둔창(여기에서 한인이란 백제를 이른다), 高麗人소신협둔창을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기국에 해부둔창을 두도록 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각지의 한인을 대신협둔창의 전부로 삼았다. 고려인을 소신협둔창의 전부로 삼았다. 한인, 고려인을 전부로 삼은 것을 가지고 둔창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韓人과 高麗人이 구별되어 있다.
41853 COMMENT
 
0560 北齊
북제가 평원왕에게 遼東郡公 高麗王의 작위를 내렸다.
2605#724 COMMENT
 
0561~0578 三國史記(1145)
후주 무제가 군사를 내어 遼東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산의 벌판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이 되었는데 힘을 다해 싸워서 참수한 것이 수십 급이었다. 여러 군사들이 이긴 틈을 타서 맹렬히 공격해서 크게 이겼다.
2605#17702
 
0565 北齊書(636)
是歲 高麗契丹靺鞨並遣使朝貢 고려, 거란 그리고 말갈이 함께 사신을 보내 조공해왔다. ▐ 靺鞨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18232
 
0577 北周
북주가 평원왕에게 遼東郡開國公 遼東王의 작위를 내렸다.
2605#591 COMMENT
 
0590 隋
수나라는 영양왕이 즉위하자 遼東郡公의 작위를 물려받게 하였다.
2605#726 COMMENT
 
0598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영양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며 스스로를 遼東糞土臣元이라 칭했다.
2605#587 COMMENT
 
0624 唐
당나라가 영류왕을 遼東郡王 高麗王으로 책봉하였다.
2605#732 COMMENT
 
0636 三國遺事(1281)
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䴡濟二國迭犯封陲 隣冦縱橫是爲民梗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말갈과 연결되어 있고 남쪽으로 왜국을 접하고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변경을 침범하여 이웃나라의 침략이 횡행하니 이것이 백성의 걱정입니다.
19833
 
0636 隋書
高麗之地 本孤竹國也 周代以之封于箕子 漢世分為三郡 晉氏亦統遼東 今乃不臣 別為外域 故先帝疾焉 欲征之久矣 當陛下之時 安得不事 使此冠帶之境 仍為蠻貊之鄉乎 고려 땅은 본래 고죽국으로 주나라 때 기자를 봉하였고 한나라 때는 3군으로 나누었으며 진나라 때는 요동군에 합쳤는데, 지금은 신하가 되어 섬기지 않고 따로 외역이 되었으니 선제께서 근심하여 정벌하고자 한지 오래입니다. 폐하의 시대에 어찌 이 일을 도모하지 않고 중국황제 땅을 오랑케 땅으로 둘 수 있겠습니까?
13753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640 新唐書(1060)
帝曰 高麗地止四郡 我發卒數萬攻遼東 諸城必救 我以舟師自東萊帆海趨平壤 固易 然天下甫平 不欲勞人耳 태종이 “고려의 땅은 4군 뿐이다. 우리가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요동을 공격하면 다른 여러 성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다. 우리가 수군을 동원하여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들어 간다면 아주 쉬울 것이다.”고 하였다. ▐ 여기서 말하는 4군은 한나라가 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이다.
14278
 
0643 新唐書(1060)
황제의 편지를 주어 보내 高麗를 나무라고 공격하지 말도록 하였다. 사자가 채 이르기 전에 개소문이 벌써 신라의 두 성을 탈취하였다. 현장이 태종의 유지를 알리자 “지난 날 수나라의 침략을 받았을 적에 신라는 우리 땅 5백리를 빼앗아갔소. 다 돌려주지 않으면 싸움을 중지할 수 없소.” 라고 하였다. 현장이 “지나간 일을 논할 것이 있겠소? 遼東故中國郡縣 요동은 본시 중국의 군현이지만 천자께서는 그래도 취하지 않으시었소.”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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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43 舊唐書(945)
왕위를 계승한 장(藏)을 책봉하여 遼東郡王 高麗王으로 삼았다.
585 COMMENT
 
0644 新唐書(1060)
태종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토벌하고자 장안의 노인들을 불러 모아 위로하며, “遼東故中國地 요동은 옛 중국 땅이며 도적 막리지가 그 군주를 죽였으므로 짐이 친히 경략하려 한다. 그러므로 어른들과 약속을 하겠는데 나를 따라 나서는 아들이나 손자들은 내가 잘 보살펴 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아라.” 라고 하고 곧 포·속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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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61~0668 唐柴將軍碑
惟彼穢貊 蠶食新羅 오직 저 예맥이 신라를 잠식하였다.
20050
 
0679~0702 고려유민 묘지명
천남생과 천남산은 연개소문의 아들이고 천헌성은 천남생의 아들이다. 그들은 모두 당나라에서 죽었고 묘는 모두 낙양에 있다. 묘지명에는 천남생이 遼東郡平壤城人이라 되어 있고 천남산은 遼東朝鮮人이라 되어 있으며 천헌성은 其先高句驪國人이라 되어 있다. 당나라는 고려를 요동으로 인식한 듯하다.
14221
 
0736 사기정의(사기正義 張守節)
方數千里(括地志云 朝鮮髙驪貊東沃沮五國之地國 東西千三百里 南北二千里 在京師東 東至大海四百里 北至營州界九百二十里 南至新羅國六百里 北至靺羯國千四百里) 괄지지에는 조선, 고려, 맥, 동옥저 등 다섯 나라의 크기가 동서 1300리고 남북 2000리인데 동쪽으로 400리를 가면 큰 바다에 이르고 북쪽으로 920리를 가면 영주의 경계에 다다르며 남쪽으로 600리를 가면 신라에 이르고 북쪽으로 1400리를 가면 말갈국에 이른다고 하였다.
14211
 
0890~0897 朗慧和尙塔碑
祖諱仁問唐醻伐獩貊功封爲臨海 조상의 휘는 인문으로 당나라가 예맥을 칠 때 공이 있어서 임해군공으로 봉해졌다. 武烈大王爲乙粲時爲屠獩貊乞師 무열대왕이 을찬으로 있을 때 예맥을 도륙하기 위해 군사를 빌리다.
20216
 
0900년경 上太師侍中狀
고려(髙麗)와 백제의 전성 시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습니다.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하였고 북으로는 유의 연, 제, 노의 지역을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해충이 되었습니다. 수나라 황제가 나라를 그르친 것도 요동정벌(征遼)에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 최치원은 수나라의 고려 침공을 요동 정벌로 표현했다.
1142 COMMENT
 
0999 論語注疏
一曰玄菟 二曰樂浪 三曰高麗 四曰滿飾 五曰鳧臾 六曰索家 七曰東屠 八曰倭人 九曰天鄙 하나는 현도고 둘은 낙랑이며 셋은 고려고 넷은 만식이며 다섯은 부유고 여섯은 소가이며 일곱은 동도고 여덟은 왜인이며 아홉은 천비다.
20389
 
1117 임의묘지명
是時 國家新破東女眞 置九城 而虜常來爭 我師屢北 元帥尹公瓘 吳公延寵 並罷就第 虜亦乞和 九年七月 授公節鉞 以今相國金公副之 往諭女眞 還侵地 諸將在外久苦戰 聞有命收兵 便雜燒器仗 欲棄城脫歸 ▐ 당시 여진을 격파하고 9성을 설치하였으나 이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자 그 땅을 돌려주었는데, 이 때에 그가 사신으로 여진족을 잘 설득하여 그 후로 침입이 없도록 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왕씨고려에서도 女眞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17195
 
1156 松漠紀聞
女真即古肅慎國也 東漢謂之挹婁 元魏謂之勿吉 隋唐謂之靺鞨 여진은 옛 숙신국이다. 동한은 읍루라 했고 탁발위는 물길, 수당은 말갈이라 했다. ▐ 肅慎 ➔ 挹婁(東漢) ➔ 勿吉(元魏) ➔ 靺鞨(隋唐) ➔ 女真
19798
 
1280 通鑑地理通釋
燕遼東郡 秦漢因之東通樂浪 晉置平州 後魏時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䕶府 연나라의 요동군은 진나라와 한나라가 계승하였고 동쪽으로 낙랑과 통한다. 晉이 평주를 설치하였다. 북위 시기의 고려가 그곳에 도읍하였으며 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 고려가 도읍하고 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한 곳은 낙랑이다.
15877
 
1281 三國遺事
海東安弘記云 九韓者一日夲·二中華·三吳越·四乇羅·五鷹逰·六靺鞨·七丹國·八女真·九穢貊 해동안홍기에 이르기를 9한이란 것은 1 일본, 2 중화, 3 오월, 4 탁라, 5 응유, 6 말갈, 7 단국, 8 여진, 9 예맥이라고 하였다.
17191
 
1281 三國遺事
海東名賢安弘撰 東都成立記云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逰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犾(狄) 第九層獩㹮 해동의 명현 안홍이 편찬한 동도성립기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거란,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이다. ▐ 日夲 日本 ┆ 中華 中華 ┆ 吳越 吳越 ┆ 乇羅 托羅 ┆ 鷹逰 鷹逰 ┆ 靺鞨 靺鞨 ┆ 丹國 丹國 ┆ 女真 女犾 ┆ 穢貊 獩㹮
17193
 
1281 ① 日本
▐ 倭가 日本으로 국호를 바꾼 것은 670년의 일이다. 안홍은 그 이전의 사람이니 해동안홍기에는 日本이라는 말이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실린 해동안홍기의 日本은 670년 이후 고쳐쓴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7197
 
1281 ⑤ 鷹逰
▐ 백제는 434년에 신라에 흰 매를 보낸 기록이 있고 백제가 망한 뒤 백제의 도읍이었던 부여에서 677년에 신라에 흰 매를 바친 기록이 있어, 「매는 백제의 특산물」이었던 듯하다. 그래서 신라가 백제를 鷹逰라 부른 듯하다. 鷹은 매다.
2605#14473
 
1281 ⑥ 靺鞨
▐ 6층은 백제의 북쪽에 있었다는 北有靺鞨을 말하는 듯하고 8층은 숙신의 후예인 勿吉靺鞨을 말하는 듯하다. 제주도를 가리키는 乇羅(托羅)도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쳤던 北有靺鞨도 충분히 언급될 수 있었다.
19376
 
1281 ⑧ 女真
▐ 靺鞨이라는 말은 565년의 중국 기록에 사용된 것이 확인되고 있고 신라에서는 655년에 중국에 보낸 문서에서 사용된 것이 확인된다. 안홍은 615년에 수나라로 유학을 갔으므로 勿吉이 靺鞨로 불리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8층도 靺鞨로 표기되어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6층을 靺鞨로 표기하고 8층을 靺鞨이 아닌 다른 명칭으로 표기한 것을 보면, 신라가 靺鞨이라 부른 세력이 백제의 북쪽에 실제로 있었던 듯하다.
19796
 
1281 ⑧ 女真
▐ 신라가 백제의 북쪽에 있으면서 백제는 물론 신라까지 자주 침공했던 세력을 중국이 동북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로 쓰는 靺鞨로 부른 것은, 백제 동성왕이 중국이 북방 오랑캐를 가리키는 말로 쓰는 獫狁을 고려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 것과 비슷할 듯하다.
17196
 
1281 ⑧ 女真
▐ 女真은 구당서(945)는 물론 신당서(1060)에서도 나오지 않다가 송막기문(1156)에 와서야 나타난다. 삼국사기(1145)와 삼국유사(1281)에도 靺鞨만 나타나고 女真은 나타나지 않는데, 오직 삼국유사가 인용한 이 해동안홍기와 동도성립기에만 女真과 女犾이 나온다. 그러나 왕씨고려의 금석문에는 이미 1117년의 지석문에서 女眞이 사용되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삼국유사는 왕씨고려때 수정된 해동안홍기를 인용했거나 인용하면서 수정한 것이다.
6038
 
1281 ⑨ 穢貊과 獩㹮
▐ 女犾과 獩㹮은 모두 중국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표기다. 女犾은 女狄의 오기인 듯하다.
19374
 
1287 帝王韻紀
後王或號南扶餘 或稱鷹準與羅鬪 持盈日久及義慈 色醉聲酣失王度 후대의 왕이 혹 남부여라 부르기도 하였고 혹 응준이라 칭하며 신라와 겨루었네. 나라를 유지한 지 오래되어 의자왕에 미치니 여색에 취하고 음악에 흥겨워 왕의 법도를 잃었도다. ▐ 이 기록에 나오는 鷹準에 의해 삼국유사(1181)에 나오는 鷹逰가 백제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거듭 확인된다. 鷹準는 백제가 스스로 칭했다기보다 신라에 의해 그렇게 불리어 졌다고 보아야 한다.
6839
 
池内宏(いけうち ひろし 1878~1952)
신라 말까지의 朝鮮上世史를 漢族통치기(-108~314), 濊貊·韓상쟁기(314~676), 韓통치기(676+) 등 3시기로 구분했다. 이는 濊貊과 韓을 별개로 분리해야 가능한 일이다.
23008
 
고대 국가들의 상호 비칭
고대 국가들의 상호 비칭
▐ 고려는 백제와 신라에 의해 각각 狛國(553)과 濊貊으로 불리었고 백제는 고려와 신라에 의해 각각 百殘(414)과 鷹逰로 불리었으며 신라는 고려에 의해 東夷(449)로 불리었고 가라는 백제에 의해 叛波(513)로 불리었다.
23563
 
고려에 대한 중국의 인식
고려에 대한 중국의 인식
로마의 속지 Britannia와 낙랑군은 시기와 기간이 비슷하다. 중국은 435년부터 고려왕에게 遼東郡公의 작위를 내리고 있다. 고려가 옛 요동군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98년에 고려왕도 스스로를 遼東糞土臣이라 칭했다. 당태종은 640년에 高麗地止四郡이라 했고 644년에는 고려를 침공하면서 遼東故中國地라 했다. 연개소문의 두 아들 천남생과 천남산의 묘지명에는 각각 遼東郡平壤城人(679)과 遼東朝鮮人(702)이라 되어 있다.
20409
 
신라와 고려의 상호 인식
신라와 고려의 상호 인식
신라와 고려가 서로를 동족으로 인식했다는 기록은 없다. 광개토왕릉비(414)에서는 광개토왕이 자신이 잡아온 韓과 穢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무덤을 돌보게 하라는 내용이 들어있고 중원고려비(449)에서는 신라를 東夷라 부르고 있으며 당시장군비(661~668)에는 穢貊이 신라를 잠식했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고 낭혜화상탑비(890~897)에는 獩貊을 도륙하기 위해 신라가 군사를 빌린다는 이야기가 들어있다. ┆ 新羅 ➔ 高麗=穢貊 ┆ 高麗 ➔ 新羅=東夷
2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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