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 말의 응소는 전한의 요동군 험독현에 대해 조선왕 만의 옛 도읍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동군은 위만 이전인 전국시대에 연나라가 설치했죠. 따라서 한나라때 위만이 요동을 나와 조선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험에 도읍하였는데 그 왕험이 요동군 험독현일 수는 없습니다.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조선 등 25개 현을 거느린 낙랑군을 설치하는 바람에 왕험이란 지명이 사라졌습니다. 응소는 지명이 사라진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험독을 왕험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史記」 燕 筑長城 至襄平 置遼東郡
「漢書」 遼東郡 縣十八 襄平 險瀆 ...
「漢書」
滿 王之都王險
尼谿相參 殺朝鮮王右渠來降 王險城未下
遂定朝鮮為四郡
樂浪郡 縣二十五 朝鮮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