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3일 만에 다시 1사단장으로 복귀했다. 2군단장으로 있다가 육군참모본부 차장으로 갔던 유재흥 소장이 불쑥 돌아와 “그냥 있던 데로 돌아가라고 그러네”라고 했다. 다급한 전쟁의 와중에 벌어진 매우 이상한 인사 조치였다. 당시로서는 그 영문을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다급했던 2군단의 상황을 유재흥 군단장에게 넘기고 다시 1사단으로 돌아왔다.
압록강의 물을 뜨는 일이 그리 급했던 것일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압록강 물 뜨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 상징적인 의미야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전쟁은 사느냐 죽느냐를 결정하는 자리다. 그 전쟁을 다루는 군사(軍事)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압록강 물 뜨기는 민족통일을 실현했다는 감격과 흥분만으로 다룰 일이 절대 아니다.
6사단 7연대의 진격은 바람처럼 신속했다. 당시 국군 일반 사단의 입장에서는 언감생심일 수밖에 없었던 다수의 트럭을 보유했던 까닭에, 6사단 7연대는 빠른 속도로 압록강에 닿았다. 내가 유재흥 군단장의 후임으로 잠시 2군단장으로 가 있던 10월 26일 무렵, 6사단 7연대의 본대는 압록강 남쪽 6㎞의 초산에 도착해 부대 일부가 먼저 압록강에서 물을 뜬 뒤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날카로운 비수처럼 다가와있던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든 상태였다. 처음 2군단장으로 그곳에 갔을 때 그들은 마치 절규하듯 군단 본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바람처럼 그곳에 다가갔던 6사단 7연대는 적의 공세에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지휘관의 뒤를 따라 용맹스럽게, 그리고 민족통일의 거대한 꿈에 젖어 전선으로 향했던 수많은 장병이 중공군의 파도와 같은 공세에 직면했다. 그들 장병의 가상한 뜻을 누구도 탓할 수는 없다. 단지 문제가 있었다면, 냉철하게 전선의 승패를 가늠하는 지휘관의 역량 부족이었다. 내가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의 전면에 있던 12연대의 김점곤 연대장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보다 훨씬 앞으로 진격해 압록강에 도착했다는 6사단 7연대장 임부택 대령이 중공군 포위에 말려 결국 도망치다가 12연대로 넘어왔다.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우리 연대로 왔다는 얘길 듣고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연대장이 지니고 있어야 했던 권총마저 소지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다 총을 빼놓은 모양이었다. 평소 친하게 지냈던 그에게 나는 농담으로 ‘물 떠오는 것도 좋지만, 총은 왜 빼놨느냐’고 물었다. 그는 허탈하게 웃을 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압록강에 선봉으로 도착한 6사단 7연대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주 많다. 그들은 압록강 물을 뜬 뒤 애국가를 함께 불렀다고 한다. 감격에 겨워 서로 얼싸안으며 눈물도 흘렸을 것이다. 그런 감격이야 대한민국 군인이라면 누구라도 앞장서서 맛보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곳은 아직 전장이었다.
2군단은 6사단이 무너짐으로써 더 큰 위기에 직면한다. 미 1군단 예비로 있던 국군 7사단을 급히 국군 2군단 예하로 돌려 군단 재편에 나서야 했고, 이는 곧 닥칠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서 큰 위기 요소로 남는다. 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6.25 초기 큰 전적을 보였고, 북진 때도 지휘력을 발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시 2군단장을 맡을 무렵에는 작전지역의 동굴을 시찰하다가 부상을 입고 몸져누운 상태였다.
압록강을 넘어와 산맥 속에 도사리고 있던 중공군의 10월 말 공세에 찢겨 6사단은 마침내 후방으로 내려와 2군단 예비로 남는다. 타격이 매우 컸기 때문에 취해진 일시적인 보완 조치였다. 그러나 2군단의 주력 사단으로서 6사단이 전방에서 물러남으로써 군단 전체의 전투력은 현격하게 떨어진 상태였다.
곧 이어 닥칠 불운은 더 컸다. 청천강 이북의 운산 지역에서 미군의 연대 병력이 중공군에게 혹심한 공격을 당했고, 국군 6사단이 압록강에 접근했다가 막심한 타격에 밀려 예비로 전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이끄는 도쿄 유엔군총사령부는 막바지 진격을 명령한다. 이른바 ‘크리스마스 대공세’다.
압록강까지 다시 밀어붙여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전쟁을 끝낸다는 게 이 작전의 요지였다. 역시 중공군의 위력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잘못된 작전이었음이 후에 드러났다. 이때는 유엔군 분위기도 엉망이었다. ‘귀국해서 크리스마스를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장병들이 들떠있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전하는 증언들에 따르면 일부 미군 장병들은 도쿄의 백화점이 인쇄한 크리스마스 선물 카탈로그를 들여다보기에 바빴다고 한다. 전쟁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일본 도쿄의 백화점에 들려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고를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는 얘기다. 이런 부대가 전쟁을 어떻게 치를지는 불문가지다.
상대적으로 물적 지원이 더 궁핍했던 대한민국 군대는 막대한 물력(物力)과 화력(火力)을 보유한 미군과 유엔군보다 작전에 더 신중을 기했어야 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 역시 진공(進攻)의 대열에 덩달아 오르면서 많은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1950년 11월 25일 맥아더의 사령부로부터 ‘크리스마스 공세’의 진격이 벌어졌다. 크리스마스 전까지 대세를 결정짓고 크리스마스 때는 귀국하자는의미에서‘크리스마스 공세’라는 이름이 나왔다.
국군 1사단은 앞서 10월 25일 이후 벌어진 중공군 1차 공세 때 우선 남하해 평양 인근의 입석에서 사단을 재정비한 뒤 압록강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1사단은 우선 중공군의 공세를 경험했던 덕분에 작전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11월의 ‘크리스마스 공세’가 드러낸 결과는 참담했다. 미 2사단의 피해는 막심했다. 2개 연대 병력이 골짜기에 몰려 이른바 ‘인디언 태형’을 당하는 처지에 빠졌다. 인디언이 포로를 잡았을 때 이들을 한 줄로 늘어놓고 돌아가면서 매질을 가하는 게 그 ‘인디언 태형’이었다. 미 2사단 2개 연대는 좁은 골짜기에 진입한 뒤 협곡 양쪽에 매복했던 중공군 병력에게 그런 ‘매질’을 당하면서 처참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국군 2군단이었다. 2군단 예하 7사단은 덕천으로, 8사단은 영원지역으로 진출했다. 중공군은 미군에게 막심한 타격을 가했지만, 그들이 정작 노린 곳은 허약한 화력을 지닌 국군 2군단 지역이었다. 이는 나중의 중공군 전사(戰史)에 분명하게 나온다.
그들은 참전 초기 화력이 빈약한 국군을 본보기 삼아 집중 공략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이에 따라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어 ‘곰보 장군’으로 불렸던 훙쉐즈(洪學智)가 이끄는 막대한 중공군 병력이 7사단과 8사단 정면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어쩌면 그 거센 소용돌이가 휩쓸어 닥치는 와중에서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천강 이북의 운산에서 중공군과 조우한 뒤 대대 급 병력을 잃은 뒤 후퇴했고, 그에 따라 10여 일 동안 평양 인근의 입석에서 부대 상황을 점검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막강한 화력을 지닌 미 1군단에 배속해 중공군이 집중적으로 벌이는 공격의 칼날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우리 국군은 쉽게 흥분했고, 아울러 자만했다. 그리고 그런 단점을 채울 만한 경험도 없었고, 전장에서 패할 때 피해를 최소화할 노련함도 없었다.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는 몇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아주 방만했다. 낙동강에서 김일성 군대의 최후 공세를 막아내고 북진할 무렵에 그런 현상은 자주 나타났다.
북진하는 국군의 뒤를 받쳐주기 위해 올라가는 보급 차량이 중간 중간의 아군 헌병초소를 지날 때 ‘통과료’를 물어야 했다는 얘기, 북진하는 장교의 작전 차량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들이 함께 타고 다녔다는 풍설 등이 전해졌다. 특히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한 뒤에 그런 군기 문란현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그랬던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중공군이 새카맣게 도사리고 있는 적유령 산맥 속의 깊은 정적 속으로 함부로 내달렸던 것일까.
바람처럼 떠도는 그런 이야기들을 다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국군의 장병들은 나름대로의 충정을 가슴에 안고, 최선을 다해 압록강을 향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당시의 크리스마스 공세에서 씻을 수 없는 패배를 기록했다. 1950년 6월25일 김일성의 전격적인 남침으로 벌어진 전쟁에서 처음 맞는 국군 군단의 와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