ᐥ국군 2군단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덕천과 영원으로 진출한 국군 2군단 예하의 7사단과 8사단은 하루 밤 사이에 사단이 주저앉았다. 앞에서 미리 소개한 대로 2군단의 주력이랄 수 있었던 6사단은 압록강에 선착해 물을 뜨다가 적의 포위에 말려 사단이 무너졌다. 한 달 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서는 나머지 2개 사단이 전력을 상실함으로써 2군단 전체가 없어지는 결과를 빚은 셈이다.ᐥ
이 자리에서 거듭 말하지만,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적어도 1950년 11월 말 중공군의 참전과 대규모 공세 때 맞이한 국군과 유엔군의 전반적인 후퇴상황에서는 그랬다. 내가 이끄는 국군 1사단은 미군 1군단에 속해 있으면서 그들로부터 막강한 화력을 지원받았고, 그들의 작전 통제에 따라 움직이면서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공군의 1차 공세 때 국군 1사단은 포로로 잡은 중공군의 진술 내용, 4개 대대에 이르는 미 고사포단의 화력 지원, 나와 함께 중공군 포로를 심문한 뒤 중국의 참전 사실을 심각하게 깨달은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소장의 신속한 판단 덕분에 큰 피해를 보지 않은 채 후퇴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른바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불렸던 국군 및 유엔군의 진격과, 이를 정면으로 치고 들어온 중공군의 2차 공세였다. 1950년 11월 24일 맥아더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재차 압록강을 향한 진격에 나섰다. 중공군의 참전 사실과 그들의 공격력을 터무니없이 낮춰 본 맥아더 사령부의 실책이었다.
전쟁에서 방심은 절대 금물이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것이 병력의 분산(分散)이다. 특히 방어 또는 후퇴 때 적에게 어느 한 구석을 뚫릴 경우 병력은 쉽게 흩어진다. 적이 밀고 들어오는 경우 아군의 병력이 분산의 조짐을 보일 때 그 뒤의 결과는 아주 참담하다. 2차 크리스마스 공세에 나선 우리 1사단도 그런 상황을 맞이했다.
평양 인근의 입석에서 10여 일의 재정비 기간을 거친 뒤 1사단은 평북 태천을 넘어 압록강 진격에 다시 나섰다. 박천에 도달했을 때다. 11월24일 중공군이 전면에 나타나는 듯했고, 이어 다음날에는 저들의 본격적인 대규모 공격이 가해졌다. 나는 전선 바로 뒤에 작은 ‘전방 지휘소’를 만들어놓고 그곳에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상황이 매우 심각했다. 1사단 2개 연대가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으로 급히 내달렸다. 각 연대의 예하인 대대본부를 마구 뛰어다녀야 했다. 전선의 장병들은 벌써 상당수가 적에게 등을 내보이면서 달아나고 있던 상황이었다. 나는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급히 뛰었다. 각 대대를 찾아가 등을 보이고 돌아서는 장병들을 향해 “이러면 못써, 이러다가는 우리 모두 끝이야!”라고 절규하듯이 외치며 그들을 막아섰다.
그래도 상황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고 또 뛰었다. 각 부대와 부대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밀리면 우리는 끝이다”라고 독전을 거듭했다. 그러자 조금씩 대열이 안정을 찾았다. 급히 밀리던 상황이 차분하게 후퇴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었다. 밀릴 때 밀리더라도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가하면서 후퇴하는 식으로 분위기가 달라졌던 것이다.
동요하지 않는 전열(戰列)은 그래서 필요하다. 전선에 선 장병은 옆에 선 부대와 동료의 신뢰를 뒤에 업고 싸운다. 따라서 전열의 한 곳이 무너지면 바로 옆의 부대가 심각하게 동요한다. 그 열(列)을 유지하면서 공격을 벌이거나 후퇴를 함께 해야 한다. 전열 한 구석이 맥없이 무너지면 금세 인근 부대의 전투력 상실로 이어진다. 이런 때가 오면 공격이나 방어 모두가 불가능하다.
나는 그 점을 잘 알았다. 전투를 지휘해 본 지휘관이 결코 모를 수 없는 싸움의 기본에 해당한다. 전선의 지휘관은 그런 ‘분산’의 상황을 가장 두려워해야 한다. 따라서 지휘관은 한 군데에 그저 앉아있을 수 없다. 전투 지휘소에서 전황을 파악하더라도 늘 현장을 따라 움직여야 한다. 급한 경우는 직접 전선을 다니면서 싸움의 의지를 되살리는 ‘독전(督戰)’을 펼쳐야 한다.
다행히도 국군 1사단의 2개 연대는 무질서한 후퇴를 멈추고 전열을 곧 가다듬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고 차분하게 반격하면서 사흘 정도를 버텼다. 그 뒤에 한국 전선으로 부임해 전쟁을 이끌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그 점을 늘 강조했다.
후퇴하면서도 항상 적에게 반격을 가하는 ‘후퇴이동’, 즉 retrograde movement였다. 당시 1사단은 전열을 허물지 않았고, 그에 따라 차분한 반격도 펼칠 수 있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이 국군 1사단과 나의 행운이었다. 하지만 동쪽으로 진출한 미 9군단 소속 미 2보병사단은 문제였다. 이들은 길고 좁은 골짜기에 들어가 길 양쪽에 매복한 중공군에게 아주 모질고 혹독한 공격을 당했다.
앞 회에서 소개한 이른바 ‘인디언 태형’이었다. 미군의 2개 연대와 공병대대, 사단 직할부대, 포병부대가 아주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2개 연대 이상의 병력 대부분이 무너지는, 미군의 전쟁사에서도 기록에 남을 만한 패배였다.
그러나 국군 2군단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덕천과 영원으로 진출한 국군 2군단 예하의 7사단과 8사단은 하루 밤 사이에 사단이 주저앉았다. 전투력을 거의 상실할 정도의 막심한 타격이었다. 앞에서 미리 소개한 대로 2군단의 주력이랄 수 있었던 6사단은 압록강에 선착해 물을 뜨다가 적의 포위에 말려 사단이 무너졌다. 한 달 뒤 아군의 ‘크리스마스 공세’에서는 나머지 2개 사단이 전력을 상실함으로써 2군단 전체가 없어지는 결과를 빚은 셈이다.
미 2사단을 이끈 사람은 로런스 카이저 소장이었다. 그는 공격을 펼칠 때 여러 가지를 놓쳤다. 우선 퇴로(退路)를 상정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았지, 뒤로 물러설 때의 위험을 간과했던 것이다. 아울러 적이 이미 매복했을지도 모를 골짜기에 들어서면서 야간에 부대를 이동시켰다. 아주 커다란 실책이었다.
부대의 후퇴 시간이 낮이었다면 미군은 뛰어난 화력으로 적에게 맞설 수 있다. 그러나 밤이라면 상황이 달라진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날아오는 총알과 박격포탄에 맞설 수 없을 만큼 시야가 묶이고, 그만큼 두려움이 늘어난다. 공격을 펼치는 공로(攻路)에서의 방심, 후퇴하는 길인 퇴로에서의 조급함이 결국 재앙과 같은 미 2개 전투연대의 와해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큰 문제는 우리 국군이었다. 7사단과 8사단은 덕천과 영원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고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하룻밤 사이에 와해됐던 것이다. 우리의 전사(戰史)는 이를 올바로 적고 있을까. 정부가 간행한 공적인 역사 기록을 우리는 공간사(公刊史)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정부가 전쟁의 기록을 펴낸 공간사에는 7사단과 8사단의 피해 상황이 자세히 적혀져 있지 않다.
나 또한 당시 국군 1사단을 이끌고 있던 일개 전선지휘관이었던 까닭에 옆 사단인 7, 8사단의 피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만큼 모든 전선의 상황은 매우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60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공간사를 이리저리 뒤져도 그에 관한 기록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나는 중공군 공세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다시 내줬던 1.4 후퇴 무렵에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 소식을 접한 나는 당시 어안이 벙벙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싸워도 좋을까’라는 생각이 우선 앞섰다. 다음에 찾아든 것은 ‘내게도 그런 경우가 닥치면 안 되겠다’는 깊고 뼈저린 자성(自省)이었다.
전선에서 무너진 두 사단의 최고 지휘관과 관련해서다. 둘은 아주 유감스럽게도, 서울 거리에서 우리 군에 붙잡혔다. 중공군에게 서울을 빼앗기기 직전이다. 아마 헌병이 그 둘을 체포했을 것이다.
왜 아군의 헌병이 전선에 섰던 두 지휘관을 체포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거느렸던 병력을 이탈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탈은 무엇을 의미할까. 1만 명이 넘는 사단 병력의 목숨을 져버리고 도망쳤다는 뜻이다.
사단장은 이른바 ‘지휘관의 꽃’이라고 불린다. 자신이 거느린 병력의 인사권과 행정권, 그리고 사법권을 손에 쥔 사람이다. 옛날식으로 표현하자면 부하 장병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사람이다.
그런 사단장이 비록 패했다고는 하지만 전선 어딘가에 흩어져 있을 제 부하들을 놔두고 그로부터 한참 떨어진 서울의 거리를 배회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주 심각한 문제였다. 그 둘은 결국 군법재판에서 아주 무거운 판결을 받았다.
지휘권을 포기하고, 군을 함부로 이탈했으며, 그로써 자신들이 거느린 수많은 장병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든 죄다. 지휘관으로서 그 이상의 죄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문제는 그 두 사람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 두 지휘관은 어쩌면 당시의 국군 지휘관이 지닌 일반적인 모습을 말해주고 있었는지 모른다.
전쟁은 매우 잔혹했고,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엇을 먼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제대로 몰랐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전쟁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전쟁을 이해하는 과정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덧없이 반복하기에는 전쟁이 던지는 상처가 너무나 깊고 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