ᐥ중공군은 우선 기율이 엄격했다. 여러 가지 행동수칙이 있었겠지만, 우선 민가 등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꽤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또 실제 그렇게 행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점령지에서 가능한 한 민가에서 숙영(宿營)하는 일을 피했다. 설령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가에 숙영하더라도 머문 뒤의 장소를 깨끗이 정리했으며, 반드시 화장실을 청소한 뒤 떠나는 모습을 보였다.ᐥ
참전했던 중공군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공군이 점령했던 지역의 한반도 주민들이 그들로부터 받은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다. 물론 그들과 싸웠던 국군과 유엔군의 기억을 제외하면 말이다. 가장 뚜렷했던 인상은 그들 중공군의 대민(對民) 폐해가 적었다는 점이다.
중공군은 우선 기율이 엄격했다. 여러 가지 행동수칙이 있었겠지만, 우선 민가 등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꽤 많은 주의를 기울였으며 또 실제 그렇게 행동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예를 들자면 그들은 점령지에서 가능한 한 민가에서 숙영(宿營)하는 일을 피했다. 설령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민가에 숙영하더라도 머문 뒤의 장소를 깨끗이 정리했으며, 반드시 화장실을 청소한 뒤 떠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중국 지도부가 참전 전과 후에 철저하게 시행한 내부 교육 때문이었으리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인으로 구성한 군대의 인상은 6.25전쟁 참전 이전까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부패하기 쉬웠으며, 그에 따라 기강이 없었다. 만주사변 당시의 상황은 앞에서 이미 소개했다.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최정예 2개 사단은 무기를 시장에 내다 팔다가 그 약점을 노리고 들이닥친 일본군 1개 대대에게 일거에 사라지고 말 정도였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군대도 부패와 무능의 덫에 걸려 있다가 마오쩌둥(毛澤東)이 지휘하는 소수의 홍군(紅軍)에게 밀려 하루 사이에 수십 만의 병력이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러니 중국 군대라고 하면 우선은 그런 부패와 무능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1950년 한반도 전쟁에 뛰어들었던 중공군은 그들과 많이 달랐다. 중국 지도부는 특히 참전 뒤에도 중공군 각 부대에 지속적으로 작전 수칙(守則)을 보내 예하 장병들을 교육했다. 그 내용 중에는 ‘현지 인민의 풍습과 습관을 존중한다’ ‘학교와 문화, 교육기관, 명승지와 유적지 등을 보호한다’ ‘사사로이 민가에 들어가지 않는다’ ‘인민의 것은 하나라도 들고 나오지 않는다’ ‘교회나 사찰 등에 간섭하지 않는다’ 등이 들어 있다.
베이징(北京)에서 전쟁을 모두 지휘한 마오쩌둥의 군사사상 중에 돋보이는 내용 중의 하나가 이른바 ‘물과 물고기’에 관한 이론이다. 그는 홍군을 물고기에, 그 바탕을 형성하는 인민을 물에 비유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홍군은 인민의 토대 위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내용이다.
중국 공산당은 그런 점에서 자신의 약점을 어떻게 보완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작전의 토대를 인민 위에 둠으로써 부패와 무능의 가능성을 막았고, 그로써 다시 내전과 항일전쟁에서의 ‘정의(正義)’를 선점할 줄 알았다. 6.25전쟁 참전 뒤에도 그런 기강은 그대로 살아 있었고, 참전 중공군 장병들은 그에 충실히 따르는 편이었다.
1950년 10월 말 운산에서 전면의 15연대 수색대가 붙잡은 중공군 포로를 심문할 때 나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중공군 포로가 일개 사병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부대 이동과 배치, 병력수 등을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전사(戰史)를 보면서 나는 그 궁금증을 풀었다. 중공군 지도부는 싸움에 임하는 장병들에게 작전에 관한 고급 정보를 알려줘 함께 공유토록 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공군의 단점이기도 했다. 중공군이 포로로 잡힐 경우 제법 많은 정보가 상대 진영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은 하나로 묶여 있었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 곧 중국으로 번질 것이라며 保家衛國식의 구호를 만들어 위기의식으로 무장했고, 당시에는 없었던 계급 때문에 아래 위가 한결 강한 동료의식으로 묶였다.
아주 단일한 명령체계와 기율, 그리고 가정과 나를 지킨다는 식의 단순한 목적의식으로 중국인들이 한 데 묶일 경우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를 당시 중공군의 한반도 참전 상황은 잘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배후 지휘자 마오쩌둥은 그 점에서 매우 대단한 전략가였다. 그는 명분을 만들고, 그를 집행할 세부의 틀을 조작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볼 때의 중공군 작전 스타일은 우직하다기보다는 교묘했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힘차게 내지르는 타입은 아니었고, 대신 상대의 빈 구석을 파고들어 화려한 기만(欺瞞)과 변칙(變則)을 구사하는 군대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미군의 정면에 나서 총을 뽑아들 생각이 없었다. 문제는 그런 기만과 변칙 스타일의 중공군에게 미군이 번번이 당했다는 점이었다.
중공군 참전과 1차 공세가 벌어진 때는 앞서 소개한 대로 1950년 10월 말이었다. 국군 1사단장이었던 나는 당시 평북 운산에 진출해 있었다. 전황(戰況)이 아주 급박해 당시로서는 중공군 지도부가 어떤 기만을 펼쳤는지 제대로 살필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사>를 보면 그 내용이 자세히 나온다.
중공군은 1차 공세에서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따라서 국군과 미군을 비롯한 다수의 유엔군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그들은 포로를 교묘하게 활용했다. 일부러 풀어줬던 것이다. 그냥 풀어주지는 않았고 ‘교육’해서 석방했다. 그 핵심은 “우리는 곧 돌아간다” “식량이 부족해서 귀국할 예정”이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중국 지도부는 1차 공세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둔 11월 초에 접어들어 전군(全軍)에 유엔군 추격 금지 명령을 하달했다. 지도부가 추격을 금지하면서 중공군은 느닷없이 전선 곳곳에서 사라졌다. 아군의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공군 1차 공세 때 붙잡혔다가 아군 진영으로 살아 돌아온 포로는 국군 76명, 미군 27명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중공군 진영에 붙잡혔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전했던 모양이다. “중공군이 곧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중공군은 산발적으로 벌어진 작은 전투에서 일부러 도주하는 모습을 연출했다고 한다.
별로 쓸모가 없는 물자 등을 배낭에 넣어 길가에 버렸고, 역시 용도가 별로 없는 구식 중소화기(中小火器) 등을 도로 등에 내던지고 도망쳤다. 산발적 전투에서 그런 중공군의 모습을 지켜봤던 아군 장병들이 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했다면, 이는 정보형태로 상부에 전해졌을 것이다. 그런 여러 조각 정보가 모이면서 아군 진영을 이끌었던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가 어떤 판단을 했을지는 분명해 보인다.
<6.25 전쟁사>에 따르면 아군 포로가 중공군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난 상황은 서방 언론에게는 매우 중요하고 흥미 있는 뉴스거리였다. 특히 전쟁 당사자로 나선 미국 언론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이 포로를 인도적으로 대우했다’ ‘중국은 인권을 중시한다’ 등의 내용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마오쩌둥의 기분이 이 때문에 크게 좋아졌다고 한다. 미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포로 석방 소식을 전하자 그는 베이징에서 “300~400명을 더 풀어주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마음씨 좋은 척 선심을 베푸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가치를 중시하는 서방 언론이 그 안에 담긴 전략적 의도를 읽었을 리 없다. 그들이 칼로 두드리는 장단에 맞춰 춤을 추기에 바빴을 뿐이다.
중국은 그 때 이미 12월 들어 벌이는 2차 대규모 공세를 준비 중이었다. 만주지역으로부터 압록강을 도하한 후속 부대의 한반도 진출로 중공군의 병력은 크게 늘어난 상황이었다. 40만에 달하는 중공군이 차분하게 강을 넘어와 적유령과 낭림산맥 일대에 포진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아군을 유인하고 있었다. 포로를 풀어주고, 산발적인 전투에서 등을 보이며 쫓겨 가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말이다.
트루먼 대통령의 미 워싱턴 행정부, 도쿄의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유엔군 총사령부는 그런 중공군의 의도를 전혀 짐작조차 못했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은 중공군 병력을 “특수부대 형태의 1만5000~2만 명의 중공군이 한반도 북부에 있고, 주력은 아직 만주 일대에 남아 있다”고 파악했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지휘부나 언론 등은 모두 그런 중국의 덫에 빠져들고 있었다. 깊고 복잡한 기만과 변칙의 덫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