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 爲漢廉斯邑君使 屬樂浪郡 四時朝謁 한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 삼국지에 실린 위략의 염사착 이야기와 동일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왕망의 사후 낙랑과 그 주변 나라들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韓의 廉斯는 낙랑에 기대는 방향으로 생존을 모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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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後漢書(445)
建武六年 光武遣太守王遵將兵擊之 至遼東 閎與郡決曹史楊邑等共殺調迎遵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결조사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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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0 ❰❰ 0044 「三國誤記」 高句麗
한나라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낙랑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한 토착인 왕조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준이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결조사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낙랑군과 동유낙랑을 혼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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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後漢書(445) 東夷列傳
▐ 삼국지에 실린 위략의 염사착 이야기와 후한서의 염사 사람 이야기는 廉斯라는 명칭과 韓에서 낙랑으로 귀순한다는 이야기가 유사하므로 동일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후한서는 韓에 대해 삼국지의 기록을 대부분 계승하고 있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염사읍군의 이야기를 취하고 염사착의 이야기는 취하지 않았다.
왕망의 사후 낙랑과 그 주변 나라들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韓의 廉斯는 낙랑에 기대는 방향으로 생존을 모색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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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三國史記(1145) 高句麗
漢光武帝遣兵渡海伐樂浪取其地爲郡縣薩水已南屬漢 한나라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았으므로,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 이 기록은 중국의 기록에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삼국사기의 저자가 전래 기록에 나오는 동유낙랑 또는 최리낙랑을 낙랑군으로 오인하고 후한서에 나오는 낙랑군 기록에 짜맞추다보니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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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三國史記(1145) 高句麗
❶ 삼국지(289), 238년에 조위가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수습하였다.
❷ 후한서(445), 25년에 왕조가 낙랑군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30년에 광무제가 왕준을 보내 진압했고 44년에 韓의 염사가 항복해 왔다.
❸ 삼국사기(1145), 32년에 낙랑이 고구려와 혼인 관계를 맺었다가 침공을 받아 항복했고 37년에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켰는데 44년에 광무제가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병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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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8 三國志(289)
景初中 大興師旅 誅淵 又潛軍浮海 收樂浪帶方之郡 而後海表謐然 東夷屈服 237~239년에 크게 군대를 일으켜 공손연을 죽이고 또 몰래 바다를 건너가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수습하였다. 그 후로 해외가 안정되어 동이들이 굴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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