ᐥ광개토왕릉비(414)의 鄒牟王은 한서(82)에서 왕망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高句驪王 騶에 대응된다. 추모왕 이후의 왕위 계승은 그의 후손이 이었다는 사실이 기록에 분명히 나와 있다. 따라서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위가 이동했다는 삼국지(289)의 이야기와 연결되면, 추모왕이 계루부 최초의 왕이었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이 왕조는 후대에 부여의 동명설화를 차용하여 추모설화를 만들고 왕조의 혈통을 신성화했다.ᐥ
압록강 유역에는 貊이 있었다. 위만 조선에 복속되어 있다가 한나라가 -108년에 위만 조선을 무너뜨리고 4군을 설치할 때 현도군 高句麗현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점차 한나라의 통제를 벗어나 高句麗현은 형식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5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을 배출하다 鄒牟부터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독점하였다. 나라 이름은 高句麗현의 이름을 따 高句麗라 불리게 되었다.
고구려가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82년에 편찬된 한서다.
한서 지리지에 고구려, 상은태 그리고 서개마 3현이 현도군에 소속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후한서(445)에는 예, 옥저 그리고 고구려가 모두 조선의 땅이었는데 한무제가 조선을 정벌하고 그 지역을 갈라 4군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때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는데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이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고구려는 위만조선이 망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지(289)에는 한나라가 고구려에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고, 고구려는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令)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고구려가 현도군에 오지 않자 동쪽 경계에 작은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두어 해마다 가져가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한나라가 고구려현을 설치하긴 했지만 고구려를 제대로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서(82)에는 왕망 초에 고구려 병력를 뽑아 오랑캐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법을 어기고 도적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는데, 고구려후(侯) 추를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고 한다. 이때 고구려는 후국으로 강등되었는데, 이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왕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삼국사기(1145)에는 기원전 37년에 주몽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주몽이 왕조를 세우고 고구려란 이름을 붙였다기보다 고구려에서 주몽이 왕조를 세웠다고 보는 것이 앞뒤의 정황에 어울린다. 이는 조선에서 위만이 세운 왕조가 역시 조선이라 불렸던 것과 같다.
삼국사기에는 또 이 왕조의 창건자 주몽을 신성화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광개토왕릉비에 실려있는 이야기와 거의 같다.
광개토왕릉비(414)에 실려있는 이야기는 천제의 아들이자 하백의 외손인 추모왕이 부여를 이탈하여 나라를 세운다는 이야기다. 이 광개토왕릉비의 추모(鄒牟)는 한서에 나오는 고구려후 추(騶)에 대응시킬 수 있다. 이름도 비슷하고, 연대도 비슷하며, 용의 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추모왕의 이야기가 시신을 돌려받을 수 없었을 고구려후 추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고구려 시조에 대한 명칭은 鄒牟(모두루묘지명,광개토왕릉비), 朱蒙(위서,주서,수서,북사,천남산묘지명), 都慕(속일본기), 中牟(안승 책문), 衆解(삼국사기), 騶(한서,후한서), 騊(삼국지) 등으로 나타난다.
한편, 삼국지(289)에는 고구려가 5부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을 배출하다 나중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세습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추모왕 이후로는 추모의 후손들이 왕위를 독점한 사실이 분명하므로 이 이야기는 추모왕 이전의 고구려에 적용하여 계루부에서 왕위를 독점하기 시작한 것과 추모가 왕조를 세워 그의 후손이 왕위를 독점한 사실을 연결지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6부의 사람들이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거나 박석김 3성이 왕위를 나눠가지다 김씨로 고정되었다는 신라의 발전 과정과 비슷하게 되어 자연스럽다.
한편, 전한 때인 기원전 107년에 설치된 현도군 고구려縣은 후한(23~220) 때에 현도군 고구려城이 되었다가 서진(265~316) 때에는 다시 현도군 고구려縣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