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는 처음 위례에 도읍을 정할 때, 산에 올라 한강을 바라보며, 그 남쪽의 땅이, 북으로 한강을 띠처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에 의지하였으며 남으로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로 큰 바다에 막혀 있어, 도읍으로 정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북쪽으로부터 말갈의 잦은 침략을 받자, 왕이 순행하며 한강 남쪽의 땅이 비옥한 것을 보고,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한강 남쪽에 도읍하였다가 한강 남쪽으로 도읍을 옮긴다는 이야기가 되어 모순됩니다.
기록이 모순되면 어느 한쪽을 버려야 합니다.
말갈이 있을 만한 곳은 철원 평야고 그곳에서 한강에 이르는 길은 중량천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며 이 길의 끝에 아차산이 있고 그 아래에 훗날 고려의 북한산군, 신라의 한양군 그리고 왕씨고려의 양주가 되는 나루가 있었습니다.
이곳이 위례로 어울리죠.
그렇다면 위례가 한강 남쪽이었다는 기록을 버려야 합니다.
高麗 鄒牟왕의 두 아들 沸流와 温祚는 高麗에서 나와 각각 彌鄒와 慰禮에 정착했다가 慰禮로 합쳤습니다.
樂浪郡의 浿水와 南部都尉의 帶水를 지난 뒤 眞番郡이 폐지된 漢水를 따라 올라가며 彌鄒를 거쳐 慰禮에 정착한 것이죠.
훗날 漢水 이남으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보아 이 慰禮는 漢水 이북에 있었습니다.
도읍을 옮긴 이유는 북쪽으로부터 靺鞨의 침공을 자주 받았기 때문인데, 靺鞨이 있을 만한 곳은 철원 평야고 그곳에서 漢水에 이르는 길은 중량천을 따라 내려오는 길이었습니다.
이 길의 끝에 아차산이 있고 그 아래에 훗날 高麗의 北漢山郡, 新羅의 漢陽郡 그리고 王氏高麗의 楊州가 설치되는 나루가 있었죠.
이곳이 百濟의 초기 도읍으로 어울립니다.
'북으로 漢水를 띠처럼 두르고 동으로 높은 산을 의지하였으며 남으로 비옥한 벌판을 바라보고 서로 큰 바다에 막혀 있다'는 설명은 百濟가 靺鞨을 피해 옮겨간 漢水 건너편이 어울립니다.
「三國史記」
沸流 與弟率黨類 渡浿帶二水 至彌鄒忽以居之
温祚都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望可居之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髙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冝乎
王謂臣下曰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 侵軼疆境 少有寧曰
勢不自安 必將遷國
予昨出巡 觀漢水之南 圡壤膏腴 冝都於彼 以圖久安之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