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창에 대한 난감한 기록
by Silla on 2020-04-01
이봉창 의사는 한국독립을 위해 1932년 일본수괴(日本首魁 ひろひと)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사형당한 사람이다.
김구선생은 그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성품은 마치 봄바람과 같이 온화하면서도 의지가 굳고, 열정이 불꽃처럼 뜨거웠다. 이런 까닭에 다른 사람들과 접촉함에 있어서 인자함이 있으면서도, 의협심이 강하여 한번 노하면 두려움 없이 칼부림을 하고 1천만 명이라도 물리칠 듯한 기세였다. 술을 마심이 호걸이었으나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고, 교제에 능하여 일본인의 창가를 잘 불렀다. 그래서 홍커우에 도착한 지 1년도 안되어 그와 가깝게 사귀는 일본인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그의 위대한 인생관을 보고 감동의 눈물이 벅차오름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작성한 신문조서를 보면 매우 난감한 내용이 나온다.

1932-01-12 이봉창 신문조서
[문] 돈을 찾은 후의 피고의 거동은?
[답] 나는 尾張屋 여관에 지불을 한 다음 北蒲田 周福根을 찾아가 그 집에서 2圓 30錢 어치의 음식을 먹은 뒤 그에게 으스대기 위해 돈을 쓸 생각으로 川崎의 유곽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습니다만 周는 정월달이므로 오전 2시까지는 가게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거절했습니다. 마침 周의 집에서 마시던 사람이 안내하지요 라고 해 그 사람의 안내로 川崎에 가 창녀를 샀습니다.
[문] 무엇이라 하는 창녀집이었는가?
[답] 그것은 玉木樓였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靜枝라는 여자를 상대로 묵었습니다.

1932-06-27 이봉창 신문조서
[문] 조선 독립 문제에 대해 현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답] 형무소에 들어가고 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다만 조선의 독립이라는 것은 전혀 실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독립 문제에 대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 그렇다면 조선인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가?
[답] 조선인은 대체로 미신적이지만 진정한 신앙은 없고 또 이해력도 낮다고 생각합니다. 생활 상태, 문화의 정도도 아직 내지 사람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나는 종교로 조선인을 이끌고 정신 수양과 인격 양성 방면으로 힘써 간다면 조선인도 점점 발전해 내지인과 서로 이해하고 융화하여 피차 일본 국민으로서 유쾌하게 생활해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써 조선인의 행복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밖에도 신문조서에는 그가 회삿돈을 횡령했다거나 폭탄을 던진 것을 후회하는 내용 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에 정면으로 반하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이 신문조서가 날조된 것이라고 의심해 볼 수도 있지만, 1월 8일에 체포되어 9차례의 신문과 뒤이은 공판을 거쳐 9월 30일에 사형이 선고된 과정을 보면 상당히 공정한 신문이었을 거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어쨋든 아직까지 이 신문조서가 날조되었다고 볼 만한 근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이봉창은 김구가 평가한 것처럼 그렇게 고귀한 인물은 아닌 것이 된다.

그러면 이봉창의 의거는 폄하되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의 사생활이 다소 문란했던 것과 그의 의거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이봉창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본수괴(日本首魁)에게 폭탄을 던졌다. 당시 한국인에 대한 일본의 차별은 분명히 존재하였고 이봉창의 행동은 그런 차별에 대한 거친 항거였던 것이다.

1932-02-09 이봉창 신문조서
[문] 어찌하여 용산역에 근무하는 일이 싫어졌는가?
[답] 그것은 조선인과 내지인 사이에 차별 대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은 내지인과 비교할 때 승급율도 낮고 상여금 액수도 적을 뿐 아니라 용원으로 절대로 승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기량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1년이나 1년 반 늦게 들어온 내지인에게 잇달아 추월당해 마지막에는 가르쳐 주었던 자의 밑에서 일하게 되었기 때문에 싫증이 났던 것입니다.
(이봉창은 한때 용산역 철도원으로 일했었다. 여기서 내지인은 일본인을 말한다.)

이봉창 신문조서에서 발견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공산당에도 관심을 가졌었다는 점이다.

1932-02-12 이봉창 신문조서
[문] 무산당 또는 공산당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언제 가졌는가?
[답] 五條경찰서의 유치장에 있는 동안 그러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문] 당시 피고는 무산당과 공산당을 어느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가?
[답] 무산당이나 공산당의 주의, 강령, 조직 등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무산당이란 어떤 것이며 공산당이란 어떤 것인지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문] 그렇다면 어찌하여 그와 같은 정당에 들어가려고 생각했는가?
[답] 무산당도 공산당도 공장의 대우 개선과 같은 것을 부르짖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 무산 계급에 대해 유리한 운동을 해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후 생각을 거듭하면서 조선인인 나는 먼저 독립 운동에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는 무산당이나 공산당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계급투쟁보다 민족해방투쟁을 앞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