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가 閼川 楊山村의 蘿井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 蘿井은 형산강과 남산 사이에 있죠. 그렇다면 閼川은 형산강입니다.
또 삼국사기에는 하천의 범람 기록이 나오는데, 閼川의 범람 기록만 나옵니다. 경주 하천의 주류는 형산강인데, 이 형산강의 범람 기록이 빠졌을 리는 없죠. 따라서 閼川이 형산강이라는 사실은 거듭 확인됩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160년에 閼川이 범람하여 민가가 떠내려갔는데, 이때 금성 북문이 저절로 무너졌다고 했습니다.
또 785년에는 閼川이 범람하여 서울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이 건너오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두 기록 모두 閼川이 금성의 북쪽을 흐르는 강이라는 인상을 주는 바람에, 1281년에 편찬된 삼국유사는 北川을 閼川의 이칭인 듯 기술하였고, 1530년에 편찬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 와서는 그것이 고착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707년에 北川의 제방을 수리하고 강변에 새겨놓은 기록에는 閼川이라 명시되어 있죠.
그러나 閼川이 범람하여 민가가 떠내려갈 때 금성의 북문은 범람과 상관없이 무너졌을 수 있고, 또 형산강은 북동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형산강의 동편에 있는 월성에서 북쪽으로 20리 되는 곳은 형산강의 서편이 될 수 있죠.
「三國史記」
閼川 楊山村
髙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0160 暴雨 閼川水溢 漂流人家 金城北門自毀
0496 大雨 閼川水漲 漂沒二百餘家
0785 周元宅於京北二十里 㑹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