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는 모두 당시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다.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릉비에는 399년에 신라가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이듬해에 고려가 구원병을 보내 왜(倭)를 격퇴시켜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사건과는 고려와 왜(倭)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이다.
또 신라 내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별로 어색한 것이 아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418년에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하러 왜(倭)에 갔을 때 고려군이 신라의 국경 바깥에 있던 왜군을 공격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내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어야 자연스러워지는 이야기다. 또 축조 연대가 449년으로 추정되는 중원고려비에는 新羅土內幢主(신라 내에 있는 군대의 지휘관)란 구절이 있는데, 이것도 신라에 고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일본부 행군원수(日本府 行軍元帥)는 당시 임나에 왜(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라에 고려군이 주둔하고 있었듯이 임나에 왜군이 주둔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임나에 왜군이 주둔했던 정황은 고고학적 양상으로도 뒷받침이 되고 있다.
영산강 유역에는 1990년대부터 전방후원분이 발견되고 있는데 현재까지 14기가 발견되었다. 이 전방후원분은 전형적인 왜(倭)의 무덤양식으로 이곳에서는 왜(倭)의 무기류도 출토되고 있다. 왜인 무장이 묻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이들 전방후원분이 축조된 시기는 500년을 전후해서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기로 추정된다.
이 전방후원분을 두고 몇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다.
첫째는, 475년에 백제가 고려의 침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왕이 살해된 사건과 연결한 설명으로, 왜(倭)가 고려의 위협을 받고 있는 백제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주둔시켰다는 것이다.
둘째는, 479년에 동성왕이 귀국할 때 함께 온 축자국 군사 500인과 연결한 설명으로, 이 군사들이 영산강 유역에 주둔하며 아직 백제의 영향이 미치지 않던 이 지역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협조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백제가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538년경부터 이들 전방후원분이 사라진 점은 이 두 설명과 잘 어울린다.
셋째는 왜군의 주둔이 훗날의 신라 청해진과 같은 역활을 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원양 항해가 어려웠던 당시에는 한반도의 서남쪽 모퉁이가 왜(倭)와 대륙을 연결하는 해로의 요충지였고 왜(倭)는 이 해로를 보호하는 한편 이 지역을 중계 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병력을 주둔시켰다는 것이다.
넷째는 영산강 유역이 선사 시대부터 구주 지역과 종족적 문화적 연결성이 강했고 전방후원분은 그 한 부분이라는 설명이다. 전방후원분 외에도 독널 무덤이라든가 인골의 특성 같은 고고학적 양상이 이 주장을 뒷받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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