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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la on 2026-04-23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고구려본기 그리고 거칠부 열전에는, 551년에 진흥왕이 거칠부로 하여금 백제와 함께 고려를 침공하게 했는데, 백제가 평양을 깨뜨리자 신라도 죽령 바깥 10군을 빼앗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일본서기에도 551년에 백제 성명왕이 신라와 임나를 거느리고 고려를 쳐서 한성을 차지하고 이어서 평양까지 토벌하면서 옛 땅 6군을 회복했다고 되어 있죠.

그런데 일본서기에는 553년에도 명왕의 아들 여창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를 깨뜨리고 그 왕을 동성산 위로 쫓아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또 562년에도 천황이 대장군 협수언으로 하여금 수 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와 함께 고려를 정벌하게 하자 그 왕이 담을 넘어 도망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협수언은 왕궁에 들어가 갖가지 보물을 약탈하고 돌아왔다죠.
이 기록의 주석에는 550년에 협수언이 백제와 함께 고려왕 양향을 비진류도에서 쫓아냈다는 다른 기록도 소개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연도가 다르고 이야기의 주체도 신라, 백제 그리고 왜로 각기 다르지만 모두 같은 사건을 말하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들을 종합해서, 427년 장수왕 때 옮겨와서 양원왕 때까지 있었던 고려의 도읍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이야기에 나오는 동성산을 구룡산으로도 불린 지금의 대성산에 대응시키고 왜의 이야기에 나오는 비진류도를 대성산 아래에 대동강 나루를 끼고 형성된 도회로 가정해 보는 것이죠.
그러면 왕궁은 지금의 안학궁이나 안학궁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겁니다.
이곳은 343년에 고국원왕이 도읍을 옮겨왔던 평양동황성으로도 어울리죠.
371년에도 백제 초고왕의 침공을 받아 고국원왕이 죽자 국내성으로 되돌아간 적이 있습니다.
양원왕은 이곳에 있던 왕궁의 담을 넘어 동성산성으로 달아난 것입니다.
이때 왕궁이 약탈당했기 때문에 양원왕은 이듬해부터 장안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그 성이 완성되자 평원왕은 586년에 그 안으로 왕궁을 옮깁니다.
지금의 평양성이죠.


0551 「三國史記」 居柒夫列傳
王命 居柒夫等八將軍 與百濟侵髙句麗
百濟人先攻破平壤 居柒夫等乗勝 取竹嶺以外髙峴以内十郡

0551 「日本書紀」
是歲 百濟聖明王 親率衆及二國兵 (二國謂新羅任那也)
往伐高麗 獲漢城之地 又進軍討平壤
凡六郡之地 遂復故地

0553 → 0551 「日本書紀」
冬十月庚寅朔己酉
百濟王子餘昌(明王子 威德王也) 悉發國中兵 向高麗國
復其偏將 打鼓疾鬪 追却高麗王於東聖山之上

0562 → 0551 「日本書紀」
八月 天皇遣大將軍大伴連狹手彥 領兵數萬 伐于高麗
狹手彥乃用百濟計 打破高麗 其王踰墻而逃
狹手彦遂乘勝以入宮 盡得珍寶貨賂·七織帳·鐵屋還來
0550 → 0551 一本云 (十一年→)十二年
大伴狹手彥連 共百濟國 驅却高麗王(陽香→)陽原於比津留都

0552 「三國史記」 築長安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