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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la on 2025-11-03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는 요양에 요동도사를 설치하고 원나라가 개원로를 두어 통치했던 동북 지역을 이곳에 소속시키기 시작합니다. 철령 이북도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두어 개원로에 소속시켰었는데, 원나라가 쇠약해진 틈을 타 왕씨고려가 차지하고 화주목을 설치했다가 나중에 화령부로 바꾼 바 있죠. 명나라는 이곳에도 철령위를 설치하여 요동도사에 소속시키겠다며 왕고에 통보해 옵니다.
이에 왕고의 우왕은 철령 이북이 동해안 여러 주를 거쳐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원래 왕고의 땅이었다며 항의합니다. 그러나 우왕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철령위 설치를 강행하여 1388년 3월에 두 명의 지휘와 천여 명의 군사들이 압록강 남쪽의 강계를 지나갑니다. 이곳을 지나 황초령을 넘으면 바로 철령 이북이죠. 그러자 분노한 우왕은 다음달 18일에 이성계로 하여금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치게 합니다.
이후 철령위 설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에 없고, 이 해에 명나라가 요동의 북쪽에 있는 지금의 철령시에서 500리 동남쪽에 있는 왕고와의 경계에 철령위를 설치했다고만 나와 있습니다. 강계를 지나왔던 명나라의 관원들이 우왕의 출병에 놀라 왔던 길을 되돌아가 압록강을 건넌 뒤 그곳에 주저앉은 듯합니다.
그런데 우왕의 출병이 명나라로 하여금 철령 이북을 포기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것에 반대하여 일으킨 이성계의 반란은 명분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이씨왕조가 펴낸 고려사에는 철령위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우왕에 대한 인신공격만 잔뜩 씌어져 있죠.
위화도 반란으로 새 왕조를 세운 이성계는 명나라에 조선과 화령 두 가지 국호안을 올려 1393년에 조선을 국호로 쓰라는 결정을 받습니다. 여기서 화령은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 했던 철령 이북의 당시 행정구역 명칭이었죠. 이 국호안에 담긴 의미를 읽었는지 명나라는 이 해에 국경에 있던 철령위를 옛 개원로 인근으로 옮기는데, 이것이 지금의 철령시가 되었습니다.


1387.12 「明史(1739)」 命戶部咨高麗王
以鐵嶺北 東西之地 舊屬開元
其土著軍民女直韃靼高麗人等 遼東統之
鐵嶺之南 舊屬高麗人民 悉聽本國管屬
疆境既正 各安其守 不得復有所侵越

1388.02 「高麗史(1451)」 偰長壽還自京師 口宣聖旨曰
鐵嶺迆北 元屬元朝 並令歸之遼東
其餘開元瀋陽信州等處軍民 聽從復業

1388.02 「高麗史(1451)」
大明欲建鐵嶺衛 禑遣密直提學朴宜中 表請曰
傳自祖宗 區域有定
切照鐵嶺迆北 歷文高和定咸等諸州 以至公嶮鎭 自來係是本國之地

1388.03 「高麗史(1451)」 西北面都安撫使崔元沚報
遼東都司遣指揮二人 以兵千餘 來至江界 將立鐵嶺衛

1388.03 「高麗史(1451)」
大明後軍都督府 遣遼東百戶王得明 來告立鐵嶺衛 王得明還

1388.04 「明史(1739)」
禑表言 鐵嶺之地實其世守 乞仍舊便
帝曰 高麗舊以鴨綠江為界 今飾辭鐵嶺 詐偽昭然
其以朕言諭之 俾安分 毋生釁端

1388.04.18 「高麗史(1451)」 左右軍發平壤 衆號十萬

1392.11.29 「太祖實錄(1413)」
遣藝文館學士韓尙質如京師 以朝鮮和寧 請更國號

1393.02.15 「太祖實錄(1413)」
奏聞使韓尙質來傳禮部咨 上向帝闕 行謝恩禮 其咨曰
東夷之號 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
可以本其名而祖之 體天牧民 永昌後嗣

1393.09.14 「太祖實錄(1413)」 改和寧府爲永興府 改永興縣爲永平縣

1393 「明史(1739)」 遷於古嚚州之地 即今治也

「明一統志」
鐵嶺衞 在都司城北 二百四十里
古有鐵嶺城 在今衞治 東南五百里 接髙麗界
洪武二十一年 置衞於彼
二十六年 徙今治 即遼金時 嚚州故城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