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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구려 멸망 야기한 전쟁 명칭서 '통일' 빼야"

송고시간2019-03-09 08:05

계간지 '역사비평' 삼국통일 재조명 특집 시작

이재환 교수 "국제전 성격 고려하면 7세기 중후반 동북아 전쟁"

연천 대전리 산성
연천 대전리 산성

나당전쟁에서 중요한 전장 중 한 곳인 매초성으로 지목되는 연천 대전리 산성. [경기문화재연구원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7세기 중반 한반도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신라·백제·고구려가 삼분한 땅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결과 백제와 고구려는 패망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쟁에는 삼국뿐만 아니라 중국을 막 통일한 당나라도 참여했다. 신라가 원군을 요청하자 참전을 결정한 당은 645년 고구려 원정에 나섰고, 660년 출정해 백제 수도 사비성을 함락했다. 이어 668년에도 신라군과 함께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해 항복을 끌어냈다.

학계에서 이 시기 전쟁을 보는 시각과 그에 따른 명칭은 크게 두 개로 나뉜다. 첫째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물리치고 통일을 이뤄냈다는 '삼국통일전쟁론'이고, 둘째는 신라가 고구려 영토를 편입하지 못한 점을 고려해 신라와 백제의 통합을 강조하는 '백제통합전쟁론'이다.

삼국통일전쟁론이든 백제통합전쟁론이든 명칭의 주체는 신라다. 삼국통일전쟁론을 따른다면 7세기 후반 이후는 '통일신라시대'이고, 백제통합전쟁론을 지지한다면 '남북국시대'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과 인식을 감안하면 전쟁에 '통일'이나 '통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왔다.

고대사 연구자인 이재환 홍익대 겸임교수는 삼국통일과 통일신라에 대한 재조명 특집을 시작한 계간지 '역사비평' 봄호에 기고한 글에서 "7세기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은 국제전임을 부각해 '7세기 중·후반 동북아시아 전쟁'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교수가 삼국통일전쟁론이나 백제통합전쟁론을 거부하는 중요한 이유는 당대에 세 나라가 동족의식을 지녔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통일은 사전적으로 원래 하나였던 것이 나누어졌을 경우 이를 다시 합칠 때 사용한다"며 "신라에 의해 '삼한일통의식'이 표방되는 것은 빠르게 보아도 전쟁 이후이므로, 전쟁 종반부에 신라가 백제·고구려와 동질성을 자각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나라가 세 나라를 '해동삼국' 혹은 '삼한'으로 지칭했다고 해서 이 표현이 국가 간 동질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면서 "오늘날 동아시아 삼국을 한·중·일이라고 묶어서 호칭하지만, 세 나라가 하나의 세계를 이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 교수는 삼국통일전쟁이나 백제통합전쟁이라는 말은 중요한 참전국인 당나라를 소외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당은 고구려·백제·신라와 모두 싸웠고, 개전 주체이자 전쟁 수행의 주체였다"며 "전쟁의 시작부터 끝까지 핵심적 위치에 있었던 당의 존재 자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기존 시각은 적당한지 의문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러면서 '삼국통일전쟁'이라는 용어는 오히려 후삼국시대에 일어난 전쟁에 어울린다는 견해를 밝혔다. 고려와 후백제는 신라에서 갈라졌지만, 동질성이 매우 강한 나라였기에 통일이라는 말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넓은 시야로 구성한 7세기 전쟁 양상에 '신라의', '삼국', '통합', '통일' 같은 명칭을 붙여보면 딱히 잘 들어맞는다고 보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며 전쟁의 민족사적 의미 부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거대한 세계를 바라보려는 시도도 결국 최종적인 이름 붙이기 단계에서는 어느새 고구려·백제·신라 수준으로 다시 닫혀버렸다"며 "이 전쟁을 통해 세계를 이야기하고, 그 세계 속 인간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떨까"라고 제안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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