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 경상도 보리문디
by Silla on 2020-03-29
경상도 지방에서는 지금도 친한 사이의 사람들 사이에 '문디'라는 호칭이 거리낌없이 사용되고 있다. 또 그런 말을 들어도 별로 불쾌해하지 않는다. 이 문디(나병 환자)에 대한 기록을 사서와 일조시대의 신문에서 찾아 보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제주도의 나병에 대한 기록이 이른 시기에 나온다.

1451 조선왕조실록
기건은 이사(吏事 관리들의 사무)에 조금 익숙하고, 여러 사서를 즐겨 보았다. 일찍이 제주 목사로 있을 적에는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또 제주가 바다 가운데에 있으므로 사람들이 나질(癩疾 나병)이 많았는데, 비록 부모 처자일지라도, 또한 서로 전염될 것을 염려하여 사람 없는 땅으로 옮겨 두어서 절로 죽기를 기다렸다. 기건이 관내를 순행하다가 바닷가에 이르러 바위 밑에서 신음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서 보니, 과연 나병을 앓는 자였다. 인하여 그 까닭을 물어 알고서, 곧 구질막(救疾幕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막)을 꾸미고, 나병을 앓는 자 1백여 인을 모아 두되, 남녀를 따로 거처하게 하고, 고삼원(苦蔘元)을 먹이고 바닷물에 목욕을 시켜서 태반을 고치니 그가 체임되어 돌아올 때에 병이 나은 자들이 서로 더불어 울면서 보냈다.

이 기록은 훈훈한 내용이지만 끔찍한 기록도 있다.

1685 조선왕조실록
금부 도사가 아비의 시체를 불태운 정득춘을 잡아왔다. 정득춘은 남원 사람인데 그의 아비가 나병(癩病)으로 죽었는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 시체를 태우면 자손에게 전염되지 않는다’고 하자 정득춘이 드디어 아비의 시체를 태웠으니, 그의 극도로 흉악함은 이전에 듣지 못한 것이었기에 그를 추국하여 정형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나병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다. 대체로 나병퇴치를 위한 관리의 노력, 나병환자를 정성껏 돌본 가족에 대한 칭찬, 나환자의 범죄행위 등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조시대에 들어와서는 사회문제에 대한 세세한 기록들이 신문에 담기게 되면서 나병에 대한 기사도 많이 생산되었다.
1926년 동아일보가 보도한 총독부 경무국의 조사를 보면, 전국에 4,000여명의 나환자가 있는데 경북 1600여명, 전남 1100여명, 경남 950여명 등으로 영남과 전남에 나환자가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 이렇게 경상도 지방에 문둥이가 많았기 때문에 '경상도 문둥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을까 추정해 보기도 한다. 

1933-12-07 동아일보
自來(자래)로 嶺南(영남) 문둥이라는 말과 같이 癩病患者(나병환자)라 하면 嶺南(영남)인 慶南北地方(경남북지방)에만 限(한)하야 存在(존재)한 것으로 認識(인식)하여 왓더니...

한편, 경상도 지방에서는 글공부하는 아이를 일컬어 문동(文童)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문둥이로 변했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경상도 북부 지방에는 보리 농사를 많이 지었는데, 글공부의 댓가로 보리를 서당 훈장에게 주었기 때문에 '보리문동'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1952-06-08 경향신문
이(경상도) 地方(지방) 사투리에 귀여운 아들 또는 남의 귀여운 子弟(자제)들을 부를 때 문동(文童)이라고 부르고 그들을 보면「이문동아」라고 感激的(감격적)으로 불러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三代獨子(삼대독자)가 不治炳(불치병)인 '뢰病(병)'에 걸렸는데 그의 父母親戚(부모친척)들은 여전히 "이 문동아"하고 슬퍼했습니다. 이 '문동'이 변하여 '문둥'으로 된 것이고 오늘날 반가운 사람을 이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어떤 주장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어쩌면 이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을 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일조시대에는 아직 치료약이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환자의 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1930년대의 신문기록을 보면 대체로 전국에 13,000에서 18,000여명의 나환자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은 신체적으로도 고통스러웠지만 사회적으로도 극도의 배척을 당했기 때문에 살아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래서 먹고 살 길이 없어 유리걸식을 하다가 민가에 몰려가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총독부에서는 소록도와 같은 격리시설을 늘려 그들을 수용하려 했으나 많은 환자들을 다 감당해 내기에는 시설이 많이 부족했다. 나환자는 삶을 비관하여 자살을 택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린 아이의 신체 일부를 먹으면 낫는다는 미신을 믿고 사람을 해치기도 하였다. 
요즘은 매년 발생하는 나환자의 수가 전국을 다 합쳐도 불과 몇 십 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나마 발병하더라도 약을 먹으면 바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다고 하니 새삼 좋은 세상을 만났다는 걸 깨닫게 된다.

* 첨언
일조시대에는 경상도가 가장 살기 힘들었던 거 같다. 
위에서 경상도에 나환자가 가장 많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지만 그 외에도 경상도는 특이한 점이 많았다. 
재일교포는 한국에서 살기 힘들어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재일교포의 65%정도가 경상도 출신이라고 한다. 
만주의 조선족 또한 한국에서 살기 힘들어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그 조선족도 경상도 출신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일본통치에 대한 저항도 경상도에서 가장 심했던 듯하다. 국가보훈처의 자료를 보면 독립유공자의 수가 경상도 지방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나와 있다. 
해방 후 월북한 사람의 수도 경상도에서 많았다고 한다. 한국군에는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한국전쟁때 남북의 군대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보니 이북군의 수뇌부는 죄다 경상도 사람이었고 한국군의 수뇌부는 죄다 이북 사람이었다는 우스개 소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