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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사전

평양성

[ 平壤 平壤城 ]

지역 평양

평양 시가지에 자리잡고 있는 고구려 시대의 도성으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양원왕 8년(552)에 장안성을 축조하였고, 평원왕 28년(586)에 장안성으로 천도하였는데 장안성은 평양성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평양성이 수도였던 기간은 586~668년까지 83년간이다.

평양성은 평양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 있는 해발 96.1m의 모란봉과 을밀대, 그리고 만수대의 높고 험한 산능선을 북벽으로 이용하고, 동쪽과 남쪽으로 대동강 기슭을 따르다가 다시 서쪽으로 보통강 기슭을 거슬러 올라 축조되었다. 이렇게 산성과 평지성을 연결시킨 평산성에 속한다. 전체 길이는 약 23㎞이며 성안의 넓이는 1,185만㎡이다. 그 중 내성은 130만㎡이고, 중성은 300만㎡, 외성은 730만㎡, 북성은 25만㎡이다.

평양성은 크게 4개의 성으로 나뉜다. 만수대를 에워싼 내성을 중심으로 하여, 그 북쪽에는 모란봉을 두른 북성이 있고, 내성 남쪽에는 창광산, 해방산, 안산 밖으로 멀리 두른 중성이 있으며, 중성 남쪽 벌판에는 넓게 외성이 돌려져 있다. 내성은 궁성, 중성은 행정기구가 있는 성, 외성은 백성 거주 구역, 북성은 궁성의 보호성으로 보고 있다. 중성, 내성, 북성의 성벽은 모두 석재로 축조하였으며, 외성벽은 제방을 겸한 성벽으로 토성벽이다.

평양성의 기저부는만수대, 모란봉에서와 같이 암반이 깔려 있는 곳에서는 표토를 제거하고 그 위에 성벽을 축조하였고, 지반이 약한 지형에서는 경사면을 ‘ㄴ’자형으로 깊이 파고 50~60㎝ 두께로 자갈과 진흙을 섞어 다진 다음 장대석을 가로로 놓아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돌은 주로 사암이고 일부는 화강암과 혈암을 사각추 모양으로 가공하여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성돌은 30×20㎝ 크기를 사용하였고, 기초 부분에는 이보다 큰돌을 사용하였다. 평천구역과 같은 평지대와 강기슭의 평지에는 성벽 기저부 폭이 약 6~8m, 높이 7~9m, 상부 폭 4~6m의 규모로 내외협축(內外夾築)하였는데, 내벽에는 토석으로 내탁하여 그 너비가 17m에 달하는 곳도 있다. 산능선 등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한 부분은 적심하여 외축(外築)하였는데, 을밀대에서 칠성문 구간과 만수대 동북단에서는 기저부 폭이 3~6m, 높이 4~5m, 융기된 상부 폭이 2.5~4m이다.

현재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평천동, 정평동 일부 성벽 위에는 1m 폭으로 담장처럼 쌓은 성가퀴(女牆)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성가퀴에 사용된 석재는 대체로 너비 10~20㎝, 두께 5~10㎝이다. 상부에서는 암키와편과 수키와편들이 줄을 지어 발견되어, 평가퀴였음을 알게 한다. 내성의 동벽인 장경문에서 을밀대에 이르는 구간과 북벽인 을밀대에서 칠성문에 이르는 구간에서는 성벽이 밖으로 돌출한 부분마다 약 12개소의 치(雉)가 확인되었으며, 안산 서북 모서리를 비롯하여 성벽이 꺾어진 위치에도 치성을 설치하였다. 치는 성벽에서 8~10m 정도 돌출시킨 정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또한 평양성의 모란봉과 그 북쪽으로 무봉이 좁은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부분에 성벽을 약 120m 정도를 돌출시켜 철성(凸城)을 축조하였다.

토성의 경우에는 성벽 가운데 자갈이 섞인 진흙과 황색토를 얇게 교차로 판축하여 성체를 구축하였는데, 1970년에 드러난 중성 남쪽 성벽의 단면에서는 자갈이 섞인 진흙과 황토를 수십 번 얇게 교차로 판축한 것인데, 높이 5.5m, 기저부 폭 7m, 상부 폭 5.6m였다. 대동강 기슭의 일부 외성벽에서는 토성벽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성 밖 약 50m까지 강기슭에 조약돌과 진흙을 교차로 다지기도 하였다.

고구려시기의 성문으로 밝혀진 것은 4개소이다. 그 중 하나는 보통문으로서, 주춧돌 가운데 일부가 고구려시대의 것이다. 둘째 성문은 중성의 남문에 해당하는 정양문 부근에 있었다. 이곳에서 드러난 2개의 주춧돌 역시 고구려시대의 것이다. 셋째, 모란봉 기슭에 자리잡은 모란봉 극장 정면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동남쪽 부근에서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성문지가 발굴되었다. 이 성문에는 바닥에 잘 다듬은 네모난 화강석의 판돌을 깔았는데, 그 위에서 문확(門地孔石) 구멍, 문턱돌 및 불에 탄 성문의 잔해와 고구려 기와편들이 드러났다. 문턱에는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다. 넷째문은 지금의 칠성문이다. 이 문의 옹성 기초는 전형적인 고구려때의 축조기법을 보여준다.

만수대 서남단에서 칠성문을 지나 을밀대와 모란봉에 이르는 구간에는 성벽 안팎에 해자(垓子)를 팠다. 지금 그 흔적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곳은 칠성문과 을밀대 사이이다. 이 해자는 성벽 밑에서 약 3m 안쪽에 10m 너비로 팠다. 성밖의 해자는 성벽 밖으로 약 28~30m 떨어진 경사면에 5m 너비로 팠다.

내성의 만수대에서는 1935년에 길이 36m, 너비 4m의 건물지가 발견되었으며, 그 남쪽에서도 16m 폭으로 된 긴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전체 도시는 대체로 ‘정(井)’자형으로 구획되었다. 이(里)는 4×4개, 즉 16개의 방(坊)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방은 또 ‘전(田)’자형(2×2), 즉 4개의 작은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방은 모두 정방형(正方形)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 1변(도로축간) 길이는 고구려척(高句麗尺)으로 2,000자였으니, 방 1변은 500자, 작은 방 1변은 250자 길이가 된다.

이와 이, 방과 방, 작은 방과 작은 방 사이에는 동서 및 남북으로 바둑판처럼 길이 나 있었다. 고구려자로 각 이 사이에는 40자, 방과 방 사이에는 13.5자, 작은 방과 작은 방 사이에는 4.5자 너비로 된 길들이 나 있었다. 이 길들은 대동강의 강자갈로 포장되어 있었고, 이와 이의 큰 길 양쪽에는 너비 0.6~0.7m나 되는 하수구가 규모 있게 나 있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1954년 김책공업대학 청사 기초 공사장에서 나타났다. 외성의 서문인 다경문에서 동서로 뻗은 중앙대로로 추정되는데, 그 도로의 너비는 12.6~12.8m이고, 20㎝ 내외의 두께로 강자갈이 깔려 있었으며, 도로 좌우측에는 약 0.6~0.7m 너비의 하수구가 시설되었다.

평양성 평면도

평양성 평면도

참고문헌

  • 고구려 고고학 Ⅰ(최무장, 민음사, 1995년)
  • 中國內의 高句麗遺蹟(李殿福 著, 車勇杰外 譯, 學硏文化社, 1994년)
  • 조선유적유물도감3-고구려편1(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외국문종합출판사, 1989년)
  • 조선고고학개요(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편, 도서출판 새날, 1989년)
  • 조선건축사1(리화선,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9년)
  • 고구려 평양성(장안성)의 성벽 축조형식과 시설물의 배치상태(최희림, 고고민속 67-3, 1967년)
  • 평양성을 쌓은 연대와 규모(최희림, 고고민속 67-2, 1967년)
  • 평양성(장안성)의 축성 과정에 대하여(채희국, 고고민속 65-3,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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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대동문 좌측면

평양 대동문 좌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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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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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고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정리한 용어에 대한 정의와 함께 그간 우리나라에서 발굴조사된 중요 유적들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수록한 『한국고고학사전』. 우리나라 고고학을 총괄하는 고고학일반편과 주요 시대를 망라한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고구려 및 발해 시대, 백제시대, 신라시대 등 7개편의 총 8개 분야로 구분하여 1,650여 항목의 원고를 작성하고 기본적인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면과 도판을 수록했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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