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김씨흉노유래설
by Silla on 2021-06-07
신라김씨란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김(金)씨 가문을 말하는데, 경주김씨와 경주김씨로부터 갈라져 나온 많은 김씨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여기에는 김일성의 본관인 전주김씨와 김구의 본관인 안동김씨도 포함된다. 또 김씨는 아니지만 김알지의 후손인 감천문씨, 광산이씨 그리고 수성최씨도 신라김씨에 포함된다.

신라김씨의 유래에 대해서는 세 가지 이야기가 있다. 첫번째는 금궤에서 시조가 나왔기 때문에 김씨로 성을 삼았다는 이야기고, 두번째는 소호금천의 후예를 자처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다는 이야기이며, 세번째는 흉노왕자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로 흘러와 신라김씨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세번째 이야기는 첫번째 이야기의 앞에 놓여져 첫번째 이야기와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라김씨 흉노유래설이다.

여기서 잠깐 흉노족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자.
서기전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무렵에 중국 북방에 있던 흉노족도 통합을 이루고 동으로는 대흥안령 산맥에서부터 서로는 예니세이강까지 활발한 정복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 흉노족의 침략을 두려워한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쌓았다. 진시황이 죽은 후 중국은 다시 분열되었다가 초나라의 항우를 물리친 한나라의 유방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다. 이때 유방은 흉노까지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였으나 도리어 전쟁에 패하고 만다. 그래서 서기전 198년에 공주와 조공을 흉노에 바치기로 하고 항복하였다. 이런 혼란기에 연나라의 위만이 대동강 유역으로 건너와 조선의 왕이 되기도 했다. 이후 흉노는 한나라에 대해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서기전 141년에 무제가 한나라의 황제로 즉위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게 된다. 무제는 지속적으로 흉노를 토벌하였고, 그 결과 흉노는 내분이 일어나고 약해져서 일부는 한나라에 복속하고 일부는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 이때 쫓겨 간 흉노족이 훗날 로마제국을 붕괴시킨 훈족이 되었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한편, 무제는 조선이 흉노와 연결될까 염려해서인지 서기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4군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신라김씨의 조상으로 주장되는 김일제(金日磾)는 흉노족의 번왕인 휴도왕의 장남이었는데 한나라 무제가 흉노를 토벌할 때 포로가 되어 노비로 전락하였다. 그는 말을 기르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나중에 무제의 신임을 받아 노비의 신분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무제에 대한 암살시도를 막아준 일을 계기로 투후(秺侯)에 봉해지고 김씨(金氏) 성을 하사받았다. 이후 김일제의 후손들은 대대로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며 지냈다.

중국에서 발견된 김씨부인묘명에는 김일제 이후 7대에 걸쳐 한(漢)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난리가 나서 요동으로 도피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은 신(新)의 건국과 패망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왕망은 서기 9년에 한(漢) 왕조를 폐하고 신(新)을 세웠으나 서기 23년에 망해서 다시 한(漢) 왕조로 돌아갔다. 김일제의 후손은 이 과정에서 중국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그들은 낙랑을 거쳐 신라에 왔고, 훗날 왕족이 된 후손들은 자기 조상의 신라 유입을 알지 설화로 신성화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정치적 격동이 있을 때 패배자가 요하를 건너 망명해 오는 사례는 여럿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동수인데, 그는 연나라(前燕)가 세워지기 전에 있었던 내전에서 패하자 고려로 망명하였다. 그의 무덤은 황해도 안악에서 발견되었는데, 무덤의 규모나 벽에 기록된 글의 내용을 보면 그가 고려에서 높은 지위를 누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높은 지위 정도가 아니라 외부에서 흘러온 사람이 아예 왕이 되는 사례도 많다.
역시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이 조선의 왕이 되었다거나 북부여를 도망쳐나온 주몽이 졸본부여에서 고려를 세웠다거나 고려를 이탈한 온조가 마한에서 백제를 세웠다거나 하는 예를 들 수 있다.
신라김씨의 경우 오랜 기간 신라의 국정에 참여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다 나중에 왕위에 오르고 그것을 세습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신라김씨 흉노유래설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바로 진흥왕 이전의 기록에 김씨 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고려도 장수왕 이전의 기록에 고씨 성이 보이지 않고 백제도 근초고왕 이전의 기록에 여씨 성이 보이지 않지만, 이미 김씨 성을 사용했을 김일제의 후손과 달리 고려와 백제 왕조는 이전에 성이 없었다.
그래서 신라의 왕족이 된 이 가문이 훗날 김씨 성을 도입하면서 자신들의 뿌리를 김일제와 소호금천으로 연결시켰을 가능성이 생긴다. 옛날에는 왕조가 정치적 목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을 날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당나라 숙종의 후예를 자처한 왕씨고려를 들 수 있다.

물론 신라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이 맞지만 중국에서 망명한 처지라 성씨를 숨기고 수백년을 지냈을 가능성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가정은 신라가 가까운 중국을 놔두고 먼 초원과 교류하게 된 이유도 설명해 줄 수 있는 잇점이 있다.

한편, 고고학적 양상을 들어 신라김씨가 초원에서 왔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신라의 적석목곽분이 초원의 무덤 양식인 kurgan과 흡사하고 신라의 금관이 초원 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나무, 사슴뿔 그리고 새를 형상화하는 등 신라의 고고학적 양상이 초원 문화의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웃한 백제나 고려와 비교하면 이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초원에서 신라로 유민이 흘러왔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이 문제다.
한국으로 유민이 흘러온 기록은 많다. 그러나 초원으로부터 유민이 흘러왔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물론 기록에 잡히지 않은 유민이 있을 수 있고 삼국지(289)와 송서(488) 사이에 기록이 촘촘하지 않은 시기가 있어, 기록에 없다는 사실을 들어 신라김씨 초원유래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 신라가 띤 초원 문화의 특색은 주민의 이동이 아니라 문화의 전파로도 설명할 수 있다.
고려와 백제는 낙랑과 대방을 통해 중국 문화를 많이 흡수하였고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류도 활발했다. 반면 신라는 고려나 백제에 비해 매우 늦게 중국과 교류를 시작하였다. 고려나 백제가 중국을 통해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때 신라는 초원길을 통해 그것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신라의 고고학적 양상이 초원 문화의 색채를 띠는 것과 역사 기록에 초원으로부터의 유민이 없는 사실을 모두 만족시킨다.
물론 신라와 초원길 사이에는 고려가 있었는데 왜 신라는 고려보다 더 초원 문화의 특색을 많이 띠었는가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다.

그런데 고고학적 양상을 기반으로 한 신라김씨 초원유래설은 신라김씨가 흉노 왕자의 후손을 자처한 사실과 연결되지 못한다.
김일제의 후손이 한나라의 조정에 7대에 걸쳐 참여하는 동안 적석목곽분을 쓰는 등 흉노의 풍습을 그대로 간직했다가 신라에 들어올 때 이를 들여왔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라의 적석목곽분은 김알지가 등장하고 수백년이 지난 후에 나타난다.

그런데 왕족이 된 이후 신라김씨가 김씨 성을 도입했다면 왜 하필 김일제의 가문을 선택했을까?
중국과 교류를 트기 전까지 신라가 초원 문화를 활발히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중국식 성씨를 도입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는데, 중국의 여러 가문 중에서 아무래도 초원에서 유래한 김일제 가문이 신라의 취향에 맞았을 수 있다.
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뿌리를 신성화할 때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것과 연결짓지 전혀 연관이 없는 것과 연결짓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