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보안사 최예섭, 권총 뽑아 ‘공식 지휘라인’ 김기석에 달려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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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5.18. 오전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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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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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부사령관 메모 의미
군 지휘권 이원화 방증
최예섭 등 전두환 복심 3인방이
5·18 진압 막후 컨트롤타워 구실

고 명노근 교수 목격 증언
최예섭-김기석 총 들이대며 충돌
“서울서 온 장성 한 명이 달려들자
전교사 부사령관도 권총 들이대”

‘무장헬기’까지 적시된 메모
‘폭도 시외 도주’ ‘코브라-장갑차’
24일치 메모에 또렷이 적혀
무장헬기로 시민군 공격 시사
가운뎃줄 오른쪽 다섯째가 최예섭 준장. 맨 아랫줄 왼쪽 다섯째가 전두환 보안사령관.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가 17일 입수한 김기석 당시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소장)의 메모는 5·18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예섭 보안사령부 기획조정실장(준장)과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대령), 최경조 보안사 감찰실장 등 ‘전두환의 복심’ 3명을 이용해 5·18 상황을 통제했다는 그동안의 의혹을 방증하는 자료다. 공식 지휘계통에 없던 이들 삼인방은 별도의 ‘작전지침’을 통해 5·18 진압작전 과정에서 컨트롤타워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기석 부사령관의 메모는 12·12와 5·18 검찰 수사(1995년) 때 확보된 것이다. 김 부사령관은 (자신의 계급인) 별 모양 두개가 그려진 메모지에 5·18 당시 상황을 한자를 섞어가며 기록해두었다. ‘GEN, choi(ASC)’는 5월19일 헬기를 타고 광주로 온 최예섭 보안사 기획실장으로 보인다.

김기석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부사령관이 쓴 ‘수습대책위 위원 접촉사항’이라고 적힌 메모.


보안사는 화순탄광에서 빼내 전남도청 지하실에 보관하고 있던 다이너마이트 등 폭약을 제거하는 데 큰 관심을 쏟았다. 최예섭 기획실장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5월24일 회의의 토의 내용은 ‘일차적으로 수류탄을 뇌관과 분리’, ‘도청내 정황 연락’ 등이었다. 대책으론 ‘수류탄 분리작업을 위한 기술문관 진입’, ‘문관 배승일 수행’ 등의 메모가 눈에 띈다. 신군부가 광주 상황을 진압하기 위한 상무충정작전 계획을 최종 승인한 5월25일엔 ‘10:00 A학생으로부터 작업 완료’라고 적혀 있다. 5·18 이후 배승일 군 기술문관은 공로를 인정받아 보국훈장 광복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형석(통일과역사연구소 소장) 박사는 2017년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10인의 의인들’이란 글을 통해 “5월23일 자연스레 결성된 폭약관리반(9명)은 도청 지하실의 폭약이 폭발하면 시민과 계엄군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에 폭약 뇌관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폭약관리반의 행동은 계엄군과의 내통이라기보다 시민을 위한 충정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1980년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재판을 받고 있는 고 명노근 전남대 교수(왼쪽 셋째). 박지원 의원실 제공


김기석 부사령관의 또 다른 메모 ‘작전일지’ 5월22일치에는 ‘12시 수습위 대표자 10명 도지사 계획관 인솔 도착’이라는 대목도 있다. 이는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회 관계자 10명이 전교사에서 계엄군과 수차례 회의를 했다는 뜻이다. 5월24일 시민수습대책위원회 일원으로 전교사를 찾은 고 명노근 전남대 교수는 이때 최예섭 보안사 기획실장과 김기석 부사령관이 서로 총을 들이대며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명 교수는 <광주5월민중항쟁사료전집>에 실린 구술을 통해 “어제 합의하지 못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부사령관실을 찾아갔는데 전투복 차림을 한 준장들 3, 4명이 들어왔다. 우리는 한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갑자기 그들의 대화 도중 언성이 높아지면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서울서 내려온 장성 한 명이 부사령관을 향해 권총을 뽑아 들고 쏠 듯이 달려들었다. 부사령관도 권총을 들이댔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양쪽 부관들이 서로 말리자 장성은 얼굴을 붉히며 사령관실을 나갔다”고 증언했다. 그간 소장에게 총을 들이댄 서울에서 온 준장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김기석 장군의 메모에 적혀 있는 ‘제너럴 최’(최예섭 기획실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김기석 부사령관의 또 다른 메모 5월24일치에도 무장헬기와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다.


보안사와 전교사 간 권총 충돌은 지휘권 이원화가 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육군본부-2군사령관-전교사-31사단-공수여단이라는 정식 지휘계통과 달리 당시 보안사-특전사-공수여단을 통해 5·18 발포명령 등 중요한 지휘가 이뤄졌다는 그동안의 의혹과 맞물려 있다. 명 교수는 “광주 지역의 군관들은 시민 대표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되도록이면 좋은 방향으로 수습하려고 하는 반면, 서울 지역 군관들은 강경으로 밀어붙이려는 의도에서 총을 들이댄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고 지적했다. 당사자인 김 전 부사령관과 최 전 실장은 각각 2010년, 2019년 세상을 떴다.

무장헬기 동원 가능성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김기석 부사령관의 5월24일치 또 다른 메모도 중요하다. 이 메모엔 ‘폭도―시외로 도주 경향/ 코부라―에이피시(장갑차)/ 500엠디―차량/ 인원―병력’이라고 적혀 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시외로 도주하는 폭도들 중 장갑차를 탄 시민군은 코브라 헬기로, 차량을 탄 시민군은 500엠디로, 그냥 시민군은 병력으로 대응하라는 내용으로 보인다”고 했다. 2018년 2월, 국방부 5·18특별조사위원회도 당시 40여대의 헬기 중 공격헬기 500MD와 기동헬기 UH-1H를 이용해 5월21일과 27일 여러차례 사격을 가했다고 밝힌 바 있다.

정대하 김용희 기자 daeha@hani.co.kr

1980년 5·18 당시 광주 전일빌딩에 박힌 헬기 총탄 자국.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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