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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하루 300리… 조선시대에도 ‘이봉주’ ‘황영조’가 있었네

입력 | 2017-10-02 03:00:00

팔도 뛰어다닌 ‘보장사’




조선 말기 역참의 모습. 오른쪽 말 타고 있는 이가 기발(騎撥)이고 서 있는 이들 중 일부는 걷거나 뛰어서 공문서를 전하는 보발(步撥)로 추정된다. 서문당 제공

“태상 4년(408년)… 고구려가 다시 사신을 보내 천리인(人) 열 명과 천리마 한 필을 바쳤다.”(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에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남연(南燕)의 군주 모용초(慕容超)에게 두 가지 선물을 보냈다. 천리마와 천리인이다. 천리인은 천리마처럼 하루에 1000리(400km)를 달린다는 사람이다. 요즘으로 보면 마라토너다. 중국 역사책 ‘후한서(後漢書)’에 “고구려 사람은 걸음걸이가 전부 달리기다(行步皆走)”라고 했다.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먼 길을 달린 전령(傳令)의 존재가 마라톤의 기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구려가 마라토너를 보유한 이유는 자명하다. 신속히 명령을 전달하고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서다. 말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가격이 비싸고 유지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사람은 말보다 빨리 달릴 수는 없지만, 오래 달릴 수는 있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처럼 산과 강이 많은 곳에서는 사람이 말보다 나을 수도 있다.

‘세종실록’에 잘 달리는 무사를 변방 고을에 번갈아 배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급보를 신속히 전하기 위해서였다. 병자호란 이후 말이 부족해지자 말 대신 잘 달리는 사람을 역참에 배치했다는 기록도 있다.

강원 감사로 부임한 윤부는 고을 사정을 잘 아는 늙은 승려에게 백성의 고초를 물었다. 승려는 제일 먼저 보장사(報狀使)를 거론했다. 보장사는 고을을 오가며 공문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으레 가난한 아전을 보장사에 임명했는데, 춥고 굶주려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폭설이 내리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고 해도 단 하루라도 지체하면 벌을 받았다. 그러니 보장사가 지체한 죄를 묻지 말라는 것이 승려의 첫 번째 부탁이었다.

19세기 편찬된 전남 구례군의 읍지 ‘봉성지(鳳城志)’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구례군의 보장사는 백성이 돌아가며 맡았는데 젊은 사람은 괜찮지만 노약자는 직접 갈 수가 없어 사람을 사서 보내야 했다. 1년에 서너 번은 차례가 돌아오니 재산을 탕진할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수령이 관가의 곡식을 덜어 밑천으로 삼아 자원하는 사람에게 비용을 주고 맡겼다. 백성은 환호했다. 지방 관아에서는 일일이 사람을 시켜 공문을 수발했다는 걸 알려주는 자료다.

잘 달리는 노비는 소중한 자산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 문인 박소는 권신 김안로의 박해를 피해 경남 합천으로 내려갔다. 박소의 친구에게는 하루에 300리(120km)를 달릴 수 있는 노비가 있었다. 그 노비는 한양에서 합천까지 아흐레 거리를 사흘 만에 주파했다. 박소는 이 노비를 통해 조정의 동향을 신속히 전해 듣고 대응책을 모색할 수 있었다.

전남 나주에 살던 연산군 후궁의 오라비는 누이의 권세를 믿고 인근 고을의 수령들을 종 부리듯 했다. 그에게는 잘 달리는 노비가 셋이나 있었다. 나주에서 서울까지 740리(300km)를 하루 반나절 만에 주파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수령이 있으면 즉각 노비를 서울로 보내 누이에게 일러 바쳤다. 그를 거역한 수령은 며칠 못 가 파면당하곤 했다.

담헌 홍대용이 중국 책을 읽는데 이런 말이 있었다. “조선의 아이들은 달리기를 좋아한다.” 담헌은 코웃음을 쳤다. ‘애들이 다 그렇지 뭐.’ 그런데 중국에 가 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중국 아이들도 장난 좋아하고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 아이들처럼 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나라는 겨우 14개국이다. 우리나라가 그중 하나로 당당히 들어가 있는 걸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잘 달리기는 하는 모양이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