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인민봉기의 배경
by Silla on 2020-02-20
일조시대 영남은 가장 살기 힘든 곳이었다. 이는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해간 사람의 수가 가장 많은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2011년 재일교포의 본적지 구성을 보면 경남이 27%, 경북이 20%, 제주가 16%, 서울 11%, 전라도 9% 등으로 나타나 있다. 일본군 위안부도 영남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신라를 혐오하고 백제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의 역사인식이 식민통치에 반영된 결과인지 모른다.
어쨋든 경북은 일본통치에 대한 저항이 가장 컸다. 이는 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수가 이 지역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해방이 되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세워졌으나 미군이 들어와 뭉개고 자신들의 통치를 시작했다.
미군통치기 한국 민중의 삶은 일조시대보다 더 궁핍하였다.
이는 만주와 일본에서 귀환하는 사람들로 인해 인구는 급증하였으나 일본의 자본과 기술자가 철수하고 분단으로 인해 생산체계가 끊어지면서 생산은 오히려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쌀값까지 폭등하였는데, 미군정은 1946년 1월에 미곡수집령을 발표하여 잉여 쌀을 거둬들이려 하였으나 수집 가격이 생산비보다 낮아 징수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자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로 징수하기도 했는데, 미군정의 경찰은 일조시대의 경찰이 그대로 이어진 터라 민중들의 큰 반감을 샀다.
1946년 5월 콜레라가 유행하여 경상북도에서만 4천 여 명이 사망하자 미군정은 전염을 막기 위해 대구를 봉쇄하였다. 이 봉쇄로 인해 식량부족이 극심해져 굶어죽는 사람까지 나오게 되자 민중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