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遼黑史 > -0318 匈奴·東胡

중원의 북서쪽에 흉노가 있었고 그 동쪽에 동호가 있었는데, 동호는 다시 오환과 선비로 갈라졌다.
 
-2055- 흉노
동북아사 요약-2070 史記(-91)-2070 ~ 1600 夏-2055- 史記(-91)-1600 ᑅ 史記(-91)-1600 ~ 1046 商-1150 ± 史記(-91)-1046 史記(-91)-0770 ~ -0403 春秋时期-0624 史記(-91)-0624 史記(-91)-0260 戰國七雄
 
-0318- 史記(-91) 匈奴
흉노(匈奴)는 그 선조가 하후씨(夏后氏)의 후예로 순유(淳維)라고 불린다. 당(陶唐氏)과 우(有虞氏) 이전에는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육(葷粥) 등이 북쪽 이민족의 땅(北蠻)에 살면서 가축을 먹이고 옮겨 다니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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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史記(-91)
其後燕有賢將秦開為質於胡胡甚信之帰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郡以拒胡 -- 造陽 集解韋昭曰 地名在上谷 正義按 上谷郡今嬀州 -- 襄平 索隠韋昭云 今遼東所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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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史記(-91)
그 후에 연나라의 명장 진개가 오랑캐에 인질로 가 있으면서 그들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연나라로 돌아온 후, 군대를 이끌고 동호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이때 동호는 1천여 리나 물러갔다. 형가와 함께 진시왕을 암살하려던 진무양은 진개의 손자다. 연나라 역시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지역에 장성을 쌓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 등에 군을 설치하여 오랑캐를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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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염철론(-81)
燕襲走東胡辟地千裏度遼東而攻朝鮮 연나라가 동호를 공격하여 쫓아내고 천리의 땅을 개척했다. 또 요동을 지나 조선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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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史記(-91) 진시황본기
燕人盧生使入海還以鬼神事因奏錄圖書曰亡秦者胡也始皇乃使將軍蒙恬發兵三十萬人北擊胡略取河南地 연나라 사람 노생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와서 귀신에 관한 일로 보고했는데 ‘진을 망하게 할 자는 호(胡)다’라고 쓰여 있는 참위서를 올렸다. 시황은 장군 몽염(蒙恬)에게 군사 30만 명을 내서 북방의 호를 공격하게 하여 하남 땅을 취했다. -- 集解鄭玄曰 胡胡亥秦二世名也秦見圖書不知此爲人名反備北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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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史記(-91) 몽염열전
秦已並天下乃使蒙恬將三十萬衆北逐戎狄収河南築長城因地形用制険塞起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於是渡河拠陽山逶蛇而北暴師於外十餘年居上郡是時蒙恬威振匈奴 -- 河南 正義謂霊 勝等州 -- 臨洮 集解徐広曰 屬隴西 -- 遼東 正義遼東郡在遼水東 始皇築長城東至遼水 西南至海(之上) -- 陽山 集解徐広曰 五原西安陽県北有陰山 陰山在河南 陽山在河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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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史記(-91) 몽염열전
진이 천하를 합병하자 곧 몽염에게 30만 무리를 이끌고 북으로 융적을 내쫓고, 하남을 수습하여 장성을 쌓게 했다. 지형에 따라 험준한 곳을 통제할 수 있게 쌓았는데 임조에서 시작하여 요동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에 걸쳐 있었다. 그리하여 황하를 건너 양산을 거점으로 하여 구불구불 북으로 나아갔다. 10년 넘게 군대는 외지를 전전하다 상군에 주둔하기에 이르렀고, 이 무렵 몽염의 위세는 흉노를 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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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史記(-91) 흉노열전
秦이 여섯 나라를 멸망시키고 시황제가 몽염에게 십만의 군사를 주어 북으로 胡를 치게 해 하남 땅을 모조리 손에 넣었다. 황하를 이용해 요새를 만들고 황하를 따라 44개의 현에 성을 쌓고 죄수를 이주시켜 충당하게 했다. 그리고 직도를 통하게 해 구원에서 운양에 이르렀는데 험준한 산의 능선을 국경으로 삼고 골짜기를 이용해 참호로 삼고 수선할 수 있는 것을 손보아 임조에서 요동까지 만 여리에 이르렀다. 게다가 황하를 건너 양산과 북가 사이에 근거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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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5 史記(-91) 흉노열전
秦滅六國而始皇帝使蒙恬將十萬之衆北擊胡悉收河南地因河爲塞築四十四縣城臨河徙適戍以充之而通直道自九原至雲陽因邊山險塹谿谷可繕者治之起臨洮至遼東萬餘里又度河據陽山北假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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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9~-0174 漢書(82)
마침내 동으로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처음에 흉노를 가볍게 보고 방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묵특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해 공격하니 동호의 왕이 크게 패해 망했고 그 백성과 가축 등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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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9~-0174 後漢書(445) 鮮卑
鮮卑者亦東胡之支也別依鮮卑山故因號焉 선비도 동호의 한 갈래다. 선비산에 의지하였으므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漢初亦為冒頓所破遠竄遼東塞外與烏桓相接未常通中國焉 한나라 초기에 묵돌선우에게 패하여 요동의 경계 바깥으로 쫓겨났다. 오환과 접하였으며 중국과는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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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9~-0174 後漢書(445) 烏桓
烏桓者本東胡也漢初匈奴冒頓滅其國餘類保烏桓山因以為號焉 오환은 원래 동호다. 한나라 초기에 흉노의 묵돌선우가 그 나라를 멸망시키자 남은 무리가 오환산에 들어가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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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9~-0174 後漢書(445) 烏桓
오환은 묵특에게 패망한 후 무리가 드디어 고립되어 약해졌기 때문에 늘 흉노에 신하로서 복속하였다. 해마다 소·말·양의 가죽을 바쳤는데, 날짜를 넘겨 바치지 못하면 오환 사람들의 처자를 빼앗아서 노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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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1~-0087 後漢書(445) 烏桓
武帝遣驃騎將軍霍去病擊破匈奴左地 因徙烏桓於上谷·漁陽·右北平·遼西·遼東五郡塞外 爲漢偵察匈奴動靜 무제가 표기장군 곽거병을 보내 흉노의 동쪽 지역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는데, 이때 ❶ 오환을 上谷, 漁陽, 右北平, 요서, 요동 등 5군의 새외로 옮기고, 한나라를 위해 흉노의 동정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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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1~-0087 後漢書(445) 烏桓
其大人歲一朝見 於是始置護烏桓校尉 秩二千石 擁節監領之 使不得與匈奴交通 오환의 대인은 해마다 한 차례 입조하여 알현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호오환교위를 설치하였는데, 질은 이천석이었고 부절을 지니고 오환의 무리를 감독하고 거느렸으며 흉노와 왕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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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41~-0087
-0141~-0087
15778
 
0008~0023 後漢書(445) 烏桓 1
왕망이 제위를 찬탈한 후 흉노를 공격하고자 하여 12부의 군대를 일으켜 동역장 엄우에게 오환과 정령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대군에 주둔하도록 하고 처자를 군현에 인질로 남겨두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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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0023 後漢書(445) 烏桓 2
오환 사람들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주둔하고 쉬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차례 되돌아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왕망이 그들을 보내주려 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스스로 달아나거나 반란을 일으켰고, 돌아가서는 약탈하고 도적질하였다. 그래서 여러 군에서는 그들이 억류해 놓았던 인질들을 모두 다 죽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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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0023 後漢書(445) 烏桓 3
이로 말미암아 왕망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 흉노는 오환의 우두머리를 유인하여 관리로 삼고 나머지는 고삐에 매어 끌어당기는 것처럼 속하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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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0023 新
전한의 왕망은 고모인 효원 황후의 비호 아래 성장하다 8년에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전국에서 반란이 잇따랐고 23년에는 왕망도 살해되었다. 이때는 유현이 반란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그가 곧 경시제다.
43
 
Military Dictionary
Aircrafts, tanks, missiles, ...
 
0012 맥고려왕 피살
왕망 초에 句驪의 병력를 뽑아 흉노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모두 도망하여 변경을 나가 도적이 되었다. 遼西大尹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자 왕망이 장수 엄우를 시켜 치게 하였다. 엄우가 구려후 騶를 들어오게 유인하여 목을 베고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이 고구려왕을 하구려후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貊人이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23614
 
0023~0025 경시제(更始帝)
23년에 왕망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25년에 쫓겨나고 살해당했다. 이때는 유수가 반란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그가 곧 광무제다.
15773
 
0025 ~ 0057 광무제(光武帝)
25년에 경시제에 반대하는 반란 세력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후 다른 반란 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15774
 
0025 後漢書(445)
왕경의 아비 굉(閎)은 낙랑군의 삼로가 되었다. 경시제가 패하자 토착인 왕조가 군수 유헌을 죽이고 대장군 낙랑태수를 칭했다.
15775
 
0025+ 後漢書(445) 匈奴
건무 연간 초에 팽총이 어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선우는 그와 함께 군대를 연합하였는데, 이것을 계기로 다시 권위를 회복하여 노방을 세우고, 그에게 오원으로 들어가서 거점으로 삼도록 하였다. 광무제는 초기에 중원의 여러 세력들을 평정하는 데 한창이었기 때문에 밖의 일을 바라볼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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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5+ 後漢書(445) 烏桓
광무제 초에 오환과 흉노는 연합하여 변경을 노략질하였으니, 대군 동쪽은 더욱 그 피해를 입었다. 새와 가까웠기 때문에 아침에 천막을 출발하여 저녁이면 성곽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5군의 민서들은 고통을 당하였고, 군현이 손상되고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유망하기에 이르렀다. 상곡의 새외에 위치한 백산이 가장 강성하고 부유하였다. ❷ 오환과 흉노가 연합하여 침략한 5군은 대, 上谷, 漁陽, 右北平 그리고 요서를 말한다.
7426#23609
 
0025¦
0025¦
대, 上谷, 漁陽, 右北平 그리고 요서가 오환으로부터 침략을 많이 받았다.
13892
 
0030 後漢書(445)
광무제가 태수 왕준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자 왕굉이 결조사 양읍과 함께 왕조를 죽이고 왕준을 맞이하였다. 모두 열후에 봉했으나 왕굉은 사양하였다.
15776
 
0030 後漢書(445) 匈奴
6년에 이르러 비로소 귀덕후 유립에게 흉노에 사행하도록 하였는데, 흉노 역시 사신을 파견하여 바쳤다. 한은 다시 중랑장 한통에게 답례하도록 하였는데, 금과 비단을 뇌물로 보내어 이전의 좋은 관계로 서로 통하게 되었다. 그런데 선우가 교만하고 거만하여 자신을 묵특에 비기면서 사자에 대한 언사가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하였으나, 광무제는 처음과 같이 그를 대하였다. 일찍이 사명이 항상 통하고 있어도 흉노는 노방과 함께 자주 북변을 침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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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3 後漢書(445) 匈奴
9년에 대사마인 오한 등을 보내어 그들을 공격하였지만 해를 넘겨도 전공은 세우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흉노는 다시 번성하게 되었고 노략질하면서 포학한 행동이 나날이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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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7 後漢書(445) 匈奴
13년에 마침내 하동을 침입하여 노략질하였지만 주와 군으로서는 막을 수 없었다. 이에 유주와 병주의 연변 사람들을 점차 상산관과 거용관 이동으로 옮기고, 흉노의 좌부는 마침내 다시 새내로 들어가서 거주하게 되었다. 조정은 이러한 상황을 걱정하여 연변의 병사들과 군민들 수천 명을 증원하여 정후를 매우 많이 쌓고 봉화대를 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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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4 後漢書(445)
建武二十年韓人廉斯人蘇馬諟等詣樂浪貢獻光武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使屬樂浪郡四時朝謁 한(韓)의 염사 사람인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대하여 한(漢)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13898
 
0044 後漢書(445)
秋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 가을에 동이 한국인이 무리를 거느리고 낙랑에 내부하였다.
13899
 
0044 後漢書(445) 匈奴
20년에 마침내 상당, 부풍 그리고 천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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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5 三國志(289) 烏丸
왕망의 말기에 이르러, 흉노와 함께 노략질을 하였다. 광무제는 천하를 평정하자, 복파장군 마원에게 3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오원관에서 변경지대로 나가서 그들을 정벌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도 못하고 군마 1천여 필만 죽였다. 오환이 마침내 강성해져서 흉노를 약탈하고 공격하니, 흉노가 1천 리나 떨어진 곳으로 옮겨가 막남 지역은 사람 없이 텅 비게 되었다.
13875
 
0045 五阮關
13881
 
0045 後漢書(445) 匈奴
겨울에 다시 上谷과 중산을 침입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노략질하니 북변은 다시 편안한 해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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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5 後漢書(445) 烏桓
건무 21년에 복파장군 마원에게 3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오원관을 나가서 오환을 불시에 습격하도록 하였다. 오환은 미리 이 사실을 알고 모두 무리를 이끌고 도망갔는데, 이를 추격하여 백여 급을 벤 후 회군하였다. 오환은 군대를 되돌려서 마원 군대의 후진을 공격하니, 마원은 드디어 밤낮으로 도망쳐 돌아왔는데, 새내로 들어갈 즈음에 죽은 말이 천여 필이었다.
13884
 
0045 後漢書(445) 鮮卑
鮮卑與匈奴入遼東 遼東太守祭肜擊破之 斬獲殆盡 由是震怖 선비와 흉노가 요동을 침입하자 ●遼東太守 祭肜이 그들을 격파하여 거의 대부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이로 말미암아 두려워 떨었다.
13883
 
0045¦
0045¦
이 해에는 (1) 선비와 흉노가 요동을 침공하였다가 遼東太守 祭肜에게 패하여 대부분 죽거나 사로잡혔고 (2) 한나라 군대가 오원관을 나가 오환을 공격했다가 크게 패하여 돌아갔으며 (3) 선비가 上谷과 중산을 침략하여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였다.
13889
 
0046 後漢書(445) 烏桓
흉노의 내부가 어지러워지자 오환은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흉노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흉노는 북쪽으로 수천 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였고 사막 남쪽의 땅은 비게 되었다. 이에 광무제는 폐백을 오환에게 뇌물로 주었다.
13882
 
0047 後漢書(445) 高句驪
冬句驪蠶支落大加戴升等萬餘口詣樂浪內屬 겨울에 구려 잠지락의 대가 대승 등 만여명이 낙랑에 투항하였다.
13888
 
0049 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 침략
❸ 봄에 □□가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타이르자 모두 다시 항복하였다.
7426#1319
 
0049 右北平 漁陽 上谷 太原 귀순
❹ 오환의 대인이 9천여 무리를 거느리고 궁궐을 방문하자 요동속국, 요서, 右北平, 漁陽, 광양, 上谷, 대군, 안문, 太原, 삭방 등 여러 경계 지역에 안치하여 흉노와 선비를 막게 했다.
7426#1927
 
0049 後漢書(445) 匈奴
二十五年春 遣弟左賢王莫將兵萬餘人擊北單于弟薁鞬左賢王 生獲之 又破北單于帳下 并得其衆合萬餘人 馬七千匹 牛羊萬頭 北單于震怖 却地千里 봄에 호한야선우는 아우인 좌현왕 막을 파견하니 병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북선우의 아우인 욱건좌현왕을 공격하게 하여 그를 생포하였고 또 북선우가 직접 관장하고 있는 군대를 격파하였다. 총 그 무리 합계 만여 명, 말 7천 필 그리고 소와 양을 만 두를 획득하였다. 북선우는 놀라고 두려워서 천 리나 퇴각하였다.
13886
 
0049 後漢書(445) 匈奴
北部 薁鞬骨都侯 與右骨都侯 率衆三萬餘人來歸南單于 南單于復遣使詣闕 奉藩稱臣 獻國珍寶 求使者監護 遣侍子 修舊約 북부의 욱건골도후와 우골도후가 부중 3만여 명을 거느리고 남선우에게 귀부하였다. 남선우는 다시 사신을 궁궐로 보내어 울타리로써 받들고 신하를 자칭하며 나라의 진귀한 보물을 바치면서 사자가 감호한다면 시자를 파견한다는 이전의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였다.
13887
 
0049 後漢書(445) 鮮卑
二十五年 乃使招呼鮮卑 示以財利 其大都護偏何(鮮卑名也) 遣使奉獻 願得歸化 肜慰納賞賜 稍復親附 其異種滿離 高句驪之屬 遂駱驛款塞 上貂裘好馬 帝輒倍其賞賜 이에 선비를 불러 재물을 보여주니 그 대도호 편하가 사신을 보내어 봉헌하고 귀부하기를 원하였다. ●遼東太守 祭肜이 위로하며 상금을 내리니 점차 다시 복속하였다. 그 다른 종족 만리와 고구려 무리가 마침내 국경으로 나와 담비 갖옷과 좋은 말을 바치니 황제가 항상 그 배로 상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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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 後漢書(445) 鮮卑
二十五年 鮮卑始通驛使 선비는 처음으로 역을 통하여 사신을 보냈다.
13880
 
0049 後漢書(445) 鮮卑
其後都護偏何等詣祭肜求自效功 因令擊北匈奴左伊育訾部 斬首二千餘級 其後偏何連歲出兵擊北虜 還輒持首級詣遼東受賞賜 그후 도호 편하 등이 ●遼東太守 祭肜을 방문하여 스스로 공을 드러낼 수 있기를 구하였고 명령을 받아 북흉노 좌이육자 부를 공격하여 머리 2천여 급을 베었다. 그 후 편하는 해마다 출병하여 북흉노를 공격하였고 돌아와서 빈번히 수급을 가지고 요동을 방문하여 상으로 하사하는 재물을 받았다.
7415
 
0049.01 後漢書(445) 光武帝紀
二十五春正月 遼東徼外貊人(貊人 穢貊國人也 貊音陌) 寇右北平漁陽上谷太原 遼東太守祭肜招降之 烏桓大人來朝(大人謂渠帥也) 南單于遣使詣闕貢獻 奉蕃稱臣 又遣其左賢王擊破北匈奴 却地千餘里
4274
 
0049.01 後漢書(445) 光武帝紀
○ 봄 정월에 요동 요외의 맥인(예맥국 사람을 말한다)이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략하였다. 요동태수 제융이 불러 항복시켰다. ○ 오환의 대인이 내조하였다.(대인은 우두머리를 말한다.) ○ 남선우가 사신을 보내어 공헌하고 변방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였다. ○ 또 좌현왕을 보내어 북흉노를 격파하고 천여리를 쫓아냈다.
2335
 
0049.03 後漢書(445) 光武帝紀
三月南單于遣子入侍 남선우가 자식을 보내어 모시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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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9.10 後漢書(445) 光武帝紀
冬十月叛蠻悉降 夫餘王遣使奉獻(夫餘國在海東去玄菟千里餘) 부여왕이 사신을 보내서 봉헌하였다.(부여국은 바다의 동쪽에 있는데 현도에서 천여리를 간다.)
7416 COMMENT
 
0049┆
0049┆
이 해에는 (1) 맥이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략하자 遼東太守 祭肜이 불러 항복시켰고 (2) 오환의 대인이 내조하였으며 (3) 남선우가 사신을 보내어 변방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였고 (4) 선비가 처음으로 사신을 보냈다.
7422 COMMENT
 
0049┆
0049┆
25년에 오환과 흉노가 함께 변경을 침략하였는데 대군, 上谷, 漁陽, 右北平 그리고 요서가 심한 피해를 입었다. 49년 봄에 □□이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이 타이르자 모두 항복하였다. 49년에 오환의 대인이 무리를 거느리고 궁궐을 방문하자 요동속국, 요서, 右北平, 漁陽, 광양, 上谷, 대군, 안문, 太原, 삭방 등에 안치하여 흉노와 선비를 막게 하였다. □□에 들어갈 말은?
14224
 
0049┆맥이 아니라 오환이다
오환이 右北平, 漁陽, 上谷 그리고 太原을 침략하자 遼東太守 祭肜이 회유하여 귀순하게 하고 요동속국, 요서, 右北平, 漁陽, 광양, 上谷, 대군, 안문, 太原 그리고 삭방의 경계 지역에 배치하여 흉노와 선비를 막는 일을 맡겼다.
13893
 
0054 後漢書(445) 鮮卑
鮮卑大人於仇賁滿頭等率種人詣闕朝賀慕義內屬帝封於仇賁為王滿頭為侯時漁陽赤山烏桓歆志賁等數寇上谷 선비 대인 어구분, 만두 등이 그 종자들을 데리고 대궐에 들어와 조하하고 의를 흠모하며 내속하였다. 황제는 어구분을 왕으로 봉하고 만두는 후로 봉하였다. 이때 어양적산오환 흠지분 등이 상곡을 여러 차례 침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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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5 三國史記(1145)
築遼西十城以備漢兵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고려는 이때 요동을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후한서에는 이 당시 요동 태수가 오환과 선비를 잘 제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따라서 당시 정황과 맞지 않는다. 이 기록은 다른 기록과의 교차검증도 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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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8~0075 三國志(289) 烏丸
至永平中漁陽烏丸大人欽志賁帥種人叛鮮卑還爲寇害遼東太守祭肜募殺志賁遂破其衆 영평 년간에 이르러서 어양 오환의 대인인 흠지분이 그 일족을 거느리고 배반하고 선비가 다시 침입하면서 해를 입히므로 遼東太守 祭肜이 병력을 모집하여 지분을 죽이고 마침내 그 무리들을 격파하였다.
13876
 
0058~0075 三國志(289) 烏丸
영평 년간에 이르러서 어양 오환의 대인인 흠지분이 그 일족을 거느리고 배반하고 선비가 다시 침입하면서 해를 입히므로 遼東太守 祭肜이 병력을 모집하여 지분을 죽이고 마침내 그 무리들을 격파하였다.
13877
 
0058~0075 三國志(289) 鮮卑
永平中祭肜爲遼東太守誘賂鮮卑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於是鮮卑自燉煌酒泉以東邑落大人皆詣遼東受賞賜青徐二州給錢歲二億七千萬以爲常
13879
 
0058~0075 三國志(289) 鮮卑
영평 년간에 祭肜이 遼東太守가 되어 선비인들을 유혹하여 재물을 주어 배반한 오환 흠지분 등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때 돈황과 주천 동쪽에 있던 선비의 읍락 대인들은 모두 요동을 방문하여 상으로 준 물품를 받았다. 청주와 서주의 두 개 주에서 전을 지급하였는데, 해마다 2억 7천만을 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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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 이전 三國志(289)
漢末遼西烏丸大人丘力居衆五千餘落上谷烏丸大人難樓衆九千餘落各稱王而遼東屬國烏丸大人蘇僕延衆千餘落自稱峭王右北平烏丸大人烏延衆八百餘落自稱汗魯王皆有計策勇健中山太守張純叛入丘力居衆中自號彌天安定王爲三郡烏丸元帥寇略青徐幽冀四州殺略吏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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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20 이전 三國志(289)
한나라 말기에 요서 오환의 대인 구력거는 무리 5천여 락을 거느렸고, 상곡 오환의 대인인 난루는 무리 9천여 락을 통솔하였으며, 각자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였다. 요동속국의 오환 대인 소복연은 무리 1천여 락을 거느리고 스스로를 초왕이라 칭하였다. 우북평 오환의 대인인 오연은 무리 8백여 락을 거느렸는데 스스로를 한로왕이라 칭하였다. 이들은 모두 계교와 방책이 있었으며 용감하고 건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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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6 수서에 나오는 신라의 유래
수서(636)에는 신라의 왕이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신라로 들어가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지(289)에는 백제의 전신인 마한이 신라의 전신인 진한의 왕을 세웠다는 이야기와 조선의 준왕이 위만에 쫓겨 바다로 도망가 마한을 차지하고 한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수서의 이야기는 삼국지의 두 이야기가 섞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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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iongnu
Ancient Chinese Historian Describes The Xiongnu // Before The Mongols // Book of Han (111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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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곡(上谷)
戰國燕昭王二十九年(公元前283年)置,郡治在沮陽縣(今河北懷來縣一帶),為秦朝三十六郡之一。西漢、東漢、曹魏、西晉、北魏、北齊、北周沿之,轄區日易縮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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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양(漁陽)
漁陽郡最早文字記載是在戰國時的燕國,因其位於漁水(現白河)之北,故稱之為漁陽。秦朝初期設三十六郡,漁陽郡是其中之一,郡治在漁陽縣。秦朝時期的漁陽縣基本就是現在的北京市密雲區的區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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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북평(右北平)
右北平郡,中國古郡名。戰國時燕國置。秦代郡治在無終縣(今天津薊縣)。西漢移治平剛縣(今內蒙古寧城縣甸子鎮黑城村黑城古城),隸屬於幽州刺史部。王莽時改稱北順。東漢時移治土垠縣(今河北省唐山市豐潤區東南)。西晉改右北平郡為北平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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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太原)
秦始皇時為全國三十六郡之一,漢朝設并州,為全國十三州之一,太原也因此稱為「并州」,西漢初曾將并州和雁門郡合併,設立代國,國都晉陽,漢文帝、漢景帝即位前均受封於代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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