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고대에는 왕족과 몇몇 귀족가문만 성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의 왕족은 여, 부여 등의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8족을 비롯하여 흑치, 사마 등 2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고려의 왕족은 고씨 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연, 을지 등 20여종의 성을 사용한 것이 역사기록에서 확인된다. 신라는 왕족이 박/석/김 3성을 사용하였고 귀족들은 이, 최, 정, 손, 배, 설 등 10여 가지 성을 사용하였다. 이들 중 중국식 한자성은 후대에 들어왔으나 선대까지 개칭된 것이다.
신라의 한국통일은 백제병합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고려인의 유입은 많지 않았고 백제의 왕족과 귀족은 대부분 당나라나 왜국으로 이동하였다. 그래서 신라의 성만 9주5소경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러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들도 스스로 성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왕씨고려에서는 개국공신들의 공로를 치하하거나 유력한 지방호족들을 포용하기 위해서 이들에게 성씨를 나누어 주었다. 또 향촌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 백성들이 거주지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거주지의 명칭을 본관으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양인들도 성씨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확산되어 간 성씨는 이조 후기에 이르러 일부 천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었다.
아래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판 한국사론에 실려 있는 조선후기 대구지방의 신분별 인구변동 자료이다.
1690년 숙종 16년 양반 9.2%, 상민 53.7%, 천민 37.1%
1729년 영조 5년 양반 18.7%, 상민 54.7%, 천민 26.6%
1783년 정조 7년 양반 37.5%, 상민 57.5%, 천민 5.0%
1858년 철종 9년 양반 70.3%, 상민 28.2%, 천민 1.5%
이 자료를 보면 조선후기에 들어와 천민들의 비율이 급격히 감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유독 대구뿐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다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천민들의 수가 감소한다는 것은 곧 성씨가 없던 사람들이 성씨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 성씨를 만들어 쓰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기존의 명문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쓴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씨는 대부분 오랜 역사를 지닌 명문가문의 성씨인데 그 많던 천민들이 대부분 자손을 낳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조말기까지도 남아있던 소수의 성씨 없는 사람들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폐지되고 1909년 민적법의 시행으로 모든 사람들이 성과 본관을 가지게 되면서부터 모두 사라지게 된다. 이때 새로 성씨를 가지게 된 사람들은 행정기관의 서기나 경찰이 지어준 성씨를 쓰기도 하고 노비의 경우는 상전의 성씨를 따르기도 했으며 아무런 연관이 없는 유명한 가문의 성씨를 가져다 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제시대에는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쓰는 창씨개명을 실시하였다. 이 창씨개명은 1940년 2월에서 8월 사이에 신청을 받았는데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유무형의 불이익이 주어졌기 때문에 조선인 가구의 약 80%가 참여하였다. 그러나 1946년 미군정은 조선성명복구령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을 모두 원래의 성씨로 복귀하게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