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la > sources > 年代記 > 0369~0474 年代記 > 0402 微叱

○ 일본서기(720)에는 신공황후 원년(320년)에 신라왕 파사매금이 미질기지파진간기를 왜에 인질로 바쳤다고 되어 있다. ○ 삼국사기(1145)에는 실성왕 원년(402년)에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왜에 인질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 ○ 삼국유사(1281)에는 나물왕 36년(391년) 庚寅年(390년)에 왕의 셋째 아들 미해를 왜에 인질로 보냈다고 되어 있다. ● 광개토왕릉비에는 왜가 391년에 한국에 진출했다고 되어 있으므로...
 
0080 三國史記(1145)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즉위했다. 유리왕의 둘째 아들이다. 혹은 유리의 동생인 나로의 아들이라 한다. 비(妃)는 김씨(金氏)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허루갈문왕의 딸이다. 처음에 탈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신료들이 유리의 태자 일성을 추대하려 했다. 어떤 사람이 “일성은 적통의 자식이지만 위엄과 지혜가 파사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드디어 그를 추대했다. 파사는 검약하며 씀씀이를 아끼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나라 사람들이 가상히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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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 三國史記(1145)
❶築城名月城 성을 쌓고 월성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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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2 三國史記(1145)
❷三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虵陵圉内 겨울 10월에 왕(파사이사금)이 세상을 떠나니 사릉원 안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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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0.10.03 日本書紀(720)
신공황후가 和珥津에서 출발하여 신라에 이르자 신라왕 波沙寐錦은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 토지의 도면과 백성의 호적을 봉인하여 항복하였다. 신공황후가 돌아갈 때는 微叱己知波珍干岐를 볼모로 하여 금, 은, 비단 등을 배 80척에 싣고 관군을 따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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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0.10.03 日本書紀(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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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0.10.03 日本書紀(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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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0~0394  진(前秦)
0350~0394 진(前秦)
감숙성 일대에 거주하던 저족은 오호십육국시대 초기에는 포홍을 지도자로 하여 전조(前趙) 및 후조(後趙)의 용병으로 각지를 전전하였다. 특히 후조에 의해 하북성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포홍의 아들 부건이 장안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351년에 전진을 건국하였다. 370년에 전진은 전연을 멸망시키고 화북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383년에 동진 침공이 실패하자 384년에 후연이 건국되고 전진은 쇠약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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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0~0450 월성
❹유물 조사와 약 40점의 시료를 대상으로 한 가속질량분석기 분석을 통해 4세기 중엽에 공사를 시작해 5세기 초반 완공된 것으로 확인됐다. ▶파사매금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의 320년 기록과 파사이사금 때 월성을 쌓았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기록 그리고 4세기 중엽에 축조된 것으로 판정된 월성의 고고학적 분석을 연결할 수 있다. 그러자면 80년에 즉위해서 112년에 죽었다고 하는 삼국사기의 파사이사금 연대를 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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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1 三國史記(1145)
26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기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위두(衛頭)를 보내 부씨(苻氏)의 진(前秦)에 토산물을 바쳤다. 부견(苻堅)이 위두에게 물었다. “경이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옛날과 같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답해 말했다.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이름이 바뀌었으니 지금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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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2 태평어람
秦書曰 符堅建元十八年 新羅國王樓寒遣使衛頭獻美女 國在百濟東 其人美髮髮長丈餘 又曰符堅時新羅國王樓寒遣使 衛頭朝貢 堅曰 卿言海東之事與古不同何耶 答曰 亦猶中國時代變革名號改易 ▶부견건원 18년은 서기 382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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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0 삼국유사(1281)
나밀왕(那密王) 36년 경인에 왜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이르기를 “우리 임금이 대왕께서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신 등을 시켜 백제가 지은 죄를 대왕에게 아뢰게 하는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대왕께서는 왕자 한 분을 보내어 우리 임금에게 성심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이에 왕은 셋째 아들 미해(美海, 未吐喜라고도 한다)를 왜국에 보냈는데 이때 미해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말과 행동이 아직 익숙지 않았으므로 내신 박사람을 부사로 삼아 왜국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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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2 三國史記(1145)
三十七年春正月髙句麗遣使王以髙句麗強盛送伊湌大西知子實聖爲質 봄 정월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나물 이사금은 고구려가 강성하였으므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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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 三國史記(1145)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 왜와 우호를 통하고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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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2 三國史記(1145)
실성왕(實聖王) 원년 임인에 왜국과 강화하였는데, 왜왕은 나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은 일찍이 나물왕이 자기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그의 아들에게 감정을 풀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때문에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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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8 모말(毛末)
○ 일본서기(720)에는 신공황후 5년(325년)에 신라가 모마리질지를 보내어 미질허지벌한을 탈출시켰다고 되어 있다. ○ 삼국사기(1145)에는 눌지왕 2년(418년)에 모말이 왜로 가 미사흔을 탈출시켰다고 되어 있다. ○ 삼국유사(1281)에는 눌지왕 10년(426년) 乙丑年(425년)에 제상이 왜로 가 미해를 탈출시켰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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