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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특이 동호, 월지(月氏)를 격파하고 몽염 때 빼앗긴 땅을 모두 거두어 들임

  • 국가
    흉노(匈奴)
묵특이 즉위하니 이때 [이웃의] 동호가 강성하여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묵특에게 사자를 보내 말하였다. “생전에 두만선우의 천리마(千里馬)를 얻고 싶소.” 묵특이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이는 흉노의 보배로운 말입니다. 주지 마십시오.” 묵특은 “내가 어찌 이웃 나라끼리 한 마리의 말을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그것을 주어 버렸다. 얼마 후 동호는 묵특이 [자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해 묵특에서 [다시] 사자를 보내 선우의 연지 한 명을 달라고 말했다. 묵특이 다시 좌우에게 [그 여부를] 물으니 좌우가 모두 화를 내면서 대답했다. “동호는 무례 무도하게 연지를 달라고 하니 그들을 치기를 바라옵니다.” 묵특은 “내가 어찌 이웃 나라끼리 여자 하나 주는 것을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그가 아끼던 연지를 골라 동호에 보내 주었다. 동호의 왕은 더욱 교만해져 서쪽을 쳤다. [동호와] 흉노의 사이에는 버려진 땅에주 001
각주 001)
『史記』에는 “與匈奴閒, 中有弃地.”로 표현이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 ‘棄地’는 고비[沙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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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천여 리에 이르렀고 [양국은] 각각 불모의 사막에 망을 보는 시설[甌脫]주 002
각주 002)
甌脫 : 흙집을 지어 살피는 곳으로, 경계 지역에서 망을 보기 위한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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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 동호는 사신을 묵특에게 보내 말하였다. “흉노와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망을 보는 시설과 불모의 사막은 흉노가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니 내가 갖고 싶소.” 묵특이 여러 신하에게 물으니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였다. “이곳은 버려진 땅이니 주십시오.”주 003
각주 003)
『史記』에는 “予之”가 “予之亦可, 勿予亦可.”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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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묵특은 크게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땅이란 나라의 근본인데 어찌 줄 수 있단 말인가!” [땅을] 주자고 말한 여러 명을 모두 목 베었다. [바로] 묵특은 말에 올라타 백성들에게 뒤늦게 출진하는 자도 베어 버리겠다고 명령했다. 마침내 [흉노가] 동으로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처음에 흉노를 가볍게 보고 방비를 갖추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묵특이 군대를 이끌고 [동호 땅에] 도착해 공격하니 동호의 왕이 크게 패해 망했고 [묵특은] 그 백성[民衆]주 004
각주 004)
『史記』에는 “民人”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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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가축 등을 [전리품으로] 빼앗았다.주 005
각주 005)
冒頓이 東胡를 격파한 것은 漢 高祖 元年, 冒頓單于 4년(전206)의 일이다. 東胡는 冒頓에게 격파된 이후에 나머지 무리가 烏桓山으로 물러나 살았는데, 그래서 烏桓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들의 세력이 고립되어 약했기 때문에 匈奴에게 신속하여 매년 소, 말, 양의 가죽을 바쳤다(『後漢書』 「烏桓傳」 : 2981. “東胡自爲冒頓所破, 餘衆退保烏桓山者號烏桓, 勢力孤弱, 臣服於匈奴, 歲輸牛․馬․羊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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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서쪽으로 월지를 격파해 [도망]가게 하고,주 006
각주 006)
匈奴가 月氏를 격파한 시기는 기원전 3세기 말로 전204~전203년 전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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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누번, 백양(白羊)주 007
각주 007)
白羊 :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匈奴의 일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이 河南(河套 이남) 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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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왕주 008
각주 008)
樓煩과 白羊의 두 왕이 사는 곳이 河南에 있었다(주1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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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땅을] 병합했다.주 009
각주 009)
樓煩은 冒頓單于가 月氏를 공격하기 이전에 河南에 옮겨와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匈奴의 공격을 받고 그에 복속되었다. 이런 상황은 『漢書』의 “敬從匈奴來, 因言匈奴河南白羊․樓煩王”과 같은 기록(권43 「酈陸朱劉叔孫傳」 : 2123)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南幷樓煩, 白羊王”이라고 하면 되기 때문에 “河南”은 쓸데없이 덧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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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다시 진나라 몽염이 탈취해 간 흉노의 땅을 모두 거두어들였다. 한나라와 과거 하남의 장성선에 관문을 두고 조나[현](朝那縣) 주 010
각주 010)
朝那縣 : 縣 명칭으로 지금의 寧夏回族自治區 固原縣 동남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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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시[현](膚施縣) 주 011
각주 011)
膚施 : 명칭으로 지금의 陝西省 楡林縣 동남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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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진출하고 마침내 대(代)까지 침입해 들어갔다. 이때 한나라 주 012
각주 012)
『史記』에는 “漢兵”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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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바야흐로 항우(項羽) 주 013
각주 013)
項羽 : 이름이 籍이고 자가 羽이다. 江蘇省 臨淮郡 下相縣 출신이다. 秦 2世 皇帝 1년(전209) 陳勝․吳廣의 난으로 秦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項梁과 함께 봉기했다. 會稽郡 太守를 참살하고 印綬를 빼앗았다. 그리고 秦나라 군대를 도처에서 무찌르고, 드디어 函谷關을 넘어 關中으로 들어갔다. 이어 앞서 들어와 있던 劉邦과 鴻門에서 만나 이를 복속시켰다. 그 이후 秦王 子拏을 죽이고 咸陽을 불사른 뒤에 彭城(徐州)에 도읍해 西楚의 覇王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각지에 봉한 諸侯를 통솔하지 못하여 垓下에서 漢王 劉邦에게 포위되어 자살하였다(『史記』 권7 「項羽本紀」 : 297~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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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대치하여 싸우느라고주 014
각주 014)
楚나라와 漢나라가 서로 대결을 벌인 것은 전206년부터 전202년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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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지쳐 있었기 때문에 묵특은 스스로 강하게 되어 활을 쏘는 병사[弓士]주 015
각주 015)
控 : 당기다는 의미로, 控弦은 활을 쏠 수 있는 사람 즉, 弓士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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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30여 만이라고 했다.

  • 각주 001)
    『史記』에는 “與匈奴閒, 中有弃地.”로 표현이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 ‘棄地’는 고비[沙漠]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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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2)
    甌脫 : 흙집을 지어 살피는 곳으로, 경계 지역에서 망을 보기 위한 시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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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3)
    『史記』에는 “予之”가 “予之亦可, 勿予亦可.”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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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4)
    『史記』에는 “民人”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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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5)
    冒頓이 東胡를 격파한 것은 漢 高祖 元年, 冒頓單于 4년(전206)의 일이다. 東胡는 冒頓에게 격파된 이후에 나머지 무리가 烏桓山으로 물러나 살았는데, 그래서 烏桓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들의 세력이 고립되어 약했기 때문에 匈奴에게 신속하여 매년 소, 말, 양의 가죽을 바쳤다(『後漢書』 「烏桓傳」 : 2981. “東胡自爲冒頓所破, 餘衆退保烏桓山者號烏桓, 勢力孤弱, 臣服於匈奴, 歲輸牛․馬․羊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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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6)
    匈奴가 月氏를 격파한 시기는 기원전 3세기 말로 전204~전203년 전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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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7)
    白羊 : 고대 종족의 명칭으로 匈奴의 일부를 구성하였다. 이들이 河南(河套 이남) 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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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8)
    樓煩과 白羊의 두 왕이 사는 곳이 河南에 있었다(주12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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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09)
    樓煩은 冒頓單于가 月氏를 공격하기 이전에 河南에 옮겨와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匈奴의 공격을 받고 그에 복속되었다. 이런 상황은 『漢書』의 “敬從匈奴來, 因言匈奴河南白羊․樓煩王”과 같은 기록(권43 「酈陸朱劉叔孫傳」 : 2123)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南幷樓煩, 白羊王”이라고 하면 되기 때문에 “河南”은 쓸데없이 덧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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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0)
    朝那縣 : 縣 명칭으로 지금의 寧夏回族自治區 固原縣 동남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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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1)
    膚施 : 명칭으로 지금의 陝西省 楡林縣 동남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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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2)
    『史記』에는 “漢兵”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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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3)
    項羽 : 이름이 籍이고 자가 羽이다. 江蘇省 臨淮郡 下相縣 출신이다. 秦 2世 皇帝 1년(전209) 陳勝․吳廣의 난으로 秦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숙부 項梁과 함께 봉기했다. 會稽郡 太守를 참살하고 印綬를 빼앗았다. 그리고 秦나라 군대를 도처에서 무찌르고, 드디어 函谷關을 넘어 關中으로 들어갔다. 이어 앞서 들어와 있던 劉邦과 鴻門에서 만나 이를 복속시켰다. 그 이후 秦王 子拏을 죽이고 咸陽을 불사른 뒤에 彭城(徐州)에 도읍해 西楚의 覇王이라 칭하였다. 그러나 각지에 봉한 諸侯를 통솔하지 못하여 垓下에서 漢王 劉邦에게 포위되어 자살하였다(『史記』 권7 「項羽本紀」 : 297~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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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4)
    楚나라와 漢나라가 서로 대결을 벌인 것은 전206년부터 전202년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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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015)
    控 : 당기다는 의미로, 控弦은 활을 쏠 수 있는 사람 즉, 弓士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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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인어
이름
묵특, 묵특, 묵특, 두만선우, 묵특, 묵특, 묵특, 묵특, 묵특, 묵특, 묵특, 묵특, 묵특, 묵특, 묵특, 묵특, 몽염, 항우(項羽), 묵특
지명
진나라, 한나라, 하남, 조나[현](朝那縣), 부시[현](膚施縣), , 대(代),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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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특이 동호, 월지(月氏)를 격파하고 몽염 때 빼앗긴 땅을 모두 거두어 들임 자료번호 : jo.k_0002_0094_0080